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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세병관(洗兵館)

작품명
통영 세병관(洗兵館)
소재지
경남 충무시 문화동
지정종목
보물 제293호
장르구분
관영건축
개요
임진왜란으로 삼남의 수군을 통합하여 지휘할 필요성이 생겼다. 따라서, 삼도수군통제영을 설립해 삼남의 수군을 통합 지휘하도록 하였으며, 그 초대 통제사가 이순신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일정한 장소가 없이 통제영을 옮겨 다녔으나, 제6대 통제사였던 이경준(李慶濬)이 1603년(선조 36)에 지금의 충무시로 통제영을 옮기고, 1604년(선조 37)에 세병관을 건립하였다. 세병관은 1896년 제208대 통제사인 홍남주가 병사함으로써 문을 닫을 때까지 약 300년간 조선수군의 총본영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시대 통제영은 군영으로서 세병관을 비롯하여 수십 채의 관아와 공방, 창고를 갖춘 통영성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병관의 경내 또한 일주문인 지과문(止戈門)을 통과하여 분명루(分明樓)가 있었고, 세병관 앞뜰의 좌우에 대변좌청(待變左廳)과 대변우청(待變右廳), 의생청(醫生廳), 뒤뜰에 산성청(山城廳)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세병관만 남아 있다. 세병관은 충무시의 언덕 위에서 남해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으며, 군사용 건물로써 여수의 진남관과 쌍벽을 이룬다. 규모는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대규모에 속하며 경회루와 진남관과 더불어 3대 건물로 꼽힌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대규모 단일 공간을 가지고 있다. 가구법은 툇보와 종보, 종량을 두어 전체적으로 9개의 도리를 받는 9량가구이다. 많은 도리를 둠으로써 서까래의 길이를 짧게 하여 공간이 넓어지는 구조적 취약점을 극복하였다. 또한 서까래 위에 부연을 달았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출목도리를 두었다. 평면은 전체를 마루바닥으로 깔고 기둥 배열만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있다. 평면외곽의 1칸은 퇴간으로서 기둥간격을 좁게 하여 중심공간을 강조하는 복도처럼 사용하게 하였다. 내부의 중앙부분은 5칸 규모의 1단 높은 마루를 설치하여 위계적 차이를 만들었다. 높은 마루의 후면에는 상부에 판벽을 설치하여 무인도(武人圖)를 그려 놓았고 하부에는 넉살무늬의 사분합 들어열기창으로 구획한 것도 중심공간임을 표현하는 방법의 일환이다. 그 양 옆으로는 고주(高柱) 하나씩을 생략하여 높은 마루가 복도처럼 보이는 것을 방지하였다. 높은 마루 앞으로도 주열을 하나 비워 높은 마루공간을 배례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것들은 대지가 좁아 외부공간이 협소해지기 때문에 외부공간을 내부화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세부적인 건축요소들을 살펴보면, 기단은 장대석 2벌대를 가지런히 쌓았는데 장대석은 관영건축이 아니면 함부로 쓸 수 없는 고급재료이다. 또한 정평주초와 굵은 두리기둥, 익공형 포작, 화반 등을 사용하여 고급건물로서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이익공계의 포작을 기둥 위에만 두었고 주간의 창방에는 화반을 두었다.
도면 및 이미지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경남편>, 건축가협회, 1999 <한국의 건축문화재 경남편>, 홍대형, 기문당, 1999 관련사이트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사이트
궁궐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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