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여수 진남관

작품명
여수 진남관
소재지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지정종목
국보 제304호
장르구분
관영건축
개요
여수 진남관 터는 원래 충무공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을 삼았던 곳이다. 임진왜란 후인 선조32년(1599)에 삼도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이 전라좌수영 건물로 세운 75칸의 거대한 객사건물이 진남관이다. 선조42년(1609)에 재소실된 것을 숙종 44년(1718) 95대 수사 이제면이 새로이 건립하였다. 1910년(순종 4)부터 50여년 동안은 여수공립보통학교와 여수중학교,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교실로도 사용되었다. 현재는 여수시 교육청으로 편입된 부지를 매입 정화하였으며, 1981년 진남관 전면 골목길을 완전 매입하여 계단식으로 입구에 통하도록 보수하였다. 원래 진남관에서는 왕의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정례 참배를 행하였으며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는 하례를 드리고 나라의 슬픔이 있을 때는 봉도식(奉道式)을 관민일동이 수행하였다. 지금은 모든 내부시설과 벽체가 없어져 완전히 내외가 개방된 기둥만 선 건물로 남아 있다. 진남관의 이름은 남쪽을 진무(鎭撫)한다는 의미이다. 진남관은 넓이가 240평, 높이가 40여척에 이르며 평면의 길이는 53.6m에 달해 규모면에서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 목조 건물이다. 정면이 15칸, 측면이 5칸으로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이 정면이 15칸이나 되는 건물은 사찰의 회랑과 같은 건축을 제외하고는 해인사 장경판고와 같은 건물이 있을 뿐이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기단은 사괴석(四塊石)과 장대석(長臺石)을 섞어 쌓고 그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놓았다. 기둥은 둘레 2.4m의 민흘림기둥이다.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비교적 가는 고주를 내진에 두르고, 주위의 변주와는 역시 가는 퇴량으로 결구하였다. 이 중 동·서쪽 각각 두 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內陳柱)를 옮겨서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렸다. 대들보 위 앞뒤에는 짧은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쳤고, 종량 위 중앙에는 마루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고 그 사이의 공간에는 화려한 화반을 받쳤는데 이러한 구성은 주심포 내지 익공계 건축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행공첨차는 조선시대 말기에 성행하는 첨차 하단 면을 기복이 많은 곡면으로 장식한 형식이다. 외부의 살미첨차는 쇠서와 함께 연꽃 등을 조각하여 장식판처럼 변형되었다. 처마는 부연(附椽)을 단 겹처마이며, 팔작지붕의 양측 합각은 널빤지로 마무리하였고 추녀 네 귀는 활주로 떠받쳤다. 바닥은 장널을 깐 마루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도면 및 이미지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전남편>, 건축가협회, 1999 <한국의 건축문화재 전남편>, 홍대형, 기문당, 1999 <한국의 건축>, 김봉렬, 공간사, 1994 관련사이트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멀티미디어(전체5건)
이미지 5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