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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

작품명
서울성곽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상1-3외, 중구, 성북구, 용산구, 서대문구 일부
지정종목
사적 제10호
장르구분
관영건축
개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으로서 서울성곽은 둘레가 약 17㎞, 지정면적 1,730,221㎡에 이르는 유적이다. 서울 성곽은 현존하는 남대문·동대문 등의 성문과 암문(暗門)·수문(水門)·여장(女墻)·옹성(甕城) 등의 방어시설을 갖춘 한 나라의 수도를 둘러싼 성곽이었다. 태조가 서울로 도성을 옮기면서 건립하였으며, 세종이 이를 개수하여 대부분의 토성을 석성으로 바꿨다. 이후 숙종 때 한번 더 대대적인 중수를 하게 된다. 광복 후에는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석축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건국 초 태조는 한양천도를 위해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지었으며, 1395년(태조 4)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측정, 조사하게 하였다. 정도전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백악(白岳)·인왕(仁旺)·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사산(四山)을 연결하는 5만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여,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의 민간인 장정 11만 8,000명을 동원하여 성벽공사를 시작하였다. 600척을 한 단위로, 총 97구(區)로 축성구역을 나누었다. 각 구역에는 천자문의 자호(字號)를 표시하여 구분하였는데, 백악산 동쪽에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 이르러 조자(弔字)까지 구획하였다. 공사는 매글자구간 600척을 6등분하여 각 공사구간에 판사(判事)·부판사·사(使)·부사·판관(判官) 등 12명씩을 임명하여 민정을 독려하여 견고하게 축성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해당하는 성벽에는 관직과 군명(郡名)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총 석축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석재는 자연석을 약간씩 다듬어 쌓되 기초석은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다. 평지는 흙으로 쌓았는데 너비는 아랫부분이 25척, 윗부분이 18척, 높이 25척이다. 그 단면은 사다리꼴을 이루는 성토판축(盛土版築)을 하였는데 토축의 둘레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홍예[雲梯]를 쌓고 그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 해 가을 8만명을 동원하여 토축 부분을 석축으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의 돈의문(敦義門), 남의 숭례문(崇禮門), 북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말한다. 그런데 동대문에만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은 암문으로 하여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남대문은 1396년에, 동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1422년(세종 4)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게 된다. 토축부분은 모두 석축으로 바꾸고 높이도 높였다. 석재는 약 2 : 1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사용하였다. 또한, 여장도 쌓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32만 2,000명의 일꾼이 동원된 이 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가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만들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게 하였고, 1447년 남대문을 다시 세웠고 1479년(성종 10) 남대문을 중수하였다. 또한, 1451년(문종 1) 1월부터 경기·충청의 수군(水軍) 3,000명으로 성벽을 수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함락되어 왜군에 의하여 왜루(倭壘)가 쌓여졌고, 이듬해에 수복하여 왜루를 철거하고 그 돌로 다시 수축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부분적인 수축을 하였고, 1704년(숙종 30) 3월부터 약 5년에 걸쳐 오군영(五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975보, 성첩(城堞) 7,081개의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1743년(영조 19) 부분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고, 1869년(고종 6) 동대문의 개축을 마지막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창축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성벽의 축조방법과 돌의 모양은 세 시기마다 각각 달라 성벽이 쌓여진 시기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태조 때 쌓은 성벽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로,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다. 성벽의 중앙부는 밖으로 약간 튀어나온 형상이다. 이 때는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세로 2척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는 근대적 축성기술의 완성으로 견고한 축성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1915년 일제는 근대도시로의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경성시구역개수계획이라는 것을 만들어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해방 후까지 보존된 성문은 남대문과 동대문, 숙청문, 소문으로는 창의문 뿐이며, 성벽은 성북동, 삼청동, 장충동의 일부가 남았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시대의 태조·세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축성의 변화과정을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그 의미가 크다.
연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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