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낙안읍성(樂安邑城)

작품명
낙안읍성(樂安邑城)
소재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서내리·남내리
지정종목
사적 제302호
장르구분
관영건축
개요
동서로 가로지르는 마을의 주 간선도로와 남문에서 뻗은 남문로가 T자로 만나 이루어지는 낙안읍성의 건물배치와 도로는 하나의 자족도시로 모든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계획된 이상적인 읍성이다 낙안 읍성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 주는 가옥들뿐만 아니라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들 중 15그루가 보호받고 있는 노거수로서, 낙안 읍성의 수백 년 세월을 증명하고 있다. 노거수와 초가 지붕, 기와 지붕 등이 고풍스레 어우러진 낙안 읍성은 우리 민족의 옛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 본향(本鄕)과 같은 곳이다. 낙안(樂安) 읍성(邑城)의 현재의 모습은 석성(石城)이지만 1397년에 처음 성을 만들 당시에는 흙을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말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왜구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절도사였던 김빈길(金贇吉)이 사람들을 모아 낙안 읍성을 쌓았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그 후 1424년 9월부터 여러 해에 걸쳐 토성(土城)이었던 낙안 읍성을 석성(石城)으로 바꾸면서 그 규모도 넓혔다고 한다. 또한 1450년 성이 마무리될 당시에 '낙안 읍성의 둘레는 2,865척, 성벽의 높이는 9.5척이었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는 1984년부터 시행된 정비 사업으로 3개의 성문과 낙안 객사, 여러 가옥들이 복원되거나 정비되어 있다. 낙안 읍성은 사적 제302호이다. 낙안읍성의 취락구조는 크게 읍성내와 읍성외로 구분되고, 행정상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등 세 개의 리로 구분되어 있다.
성벽
낙안 읍성의 성벽은 동쪽 성문의 성벽이 원상태로 가장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이 곳 성벽의 높이는 약 4m 정도이고 성벽의 폭은 아래가 약 8m 정도이지만 성 위쪽의 폭이 약 4m 정도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성벽 두께의 차이는 성벽을 축조할 때 성벽의 아래 부분은 큰 돌을 사용하여 축조한 것에 반해 위쪽으로 갈수록 점차 작은 돌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위쪽으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돌을 쌓았으며, 성벽에는 돌 계단과 통행로가 자리하고 있다. 낙안 읍성의 성곽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계단이다. 성곽에 계단을 만들어 놓은 수원 화성이나 남한 산성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곳의 계단은 성곽의 일부를 활용하여 계단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을 딛는 부분은 크기가 일정한 긴 석재를 사용하여 쌓아 올렸으며, 그 계단을 지지하는 바깥 성벽은 안쪽의 석재와는 다르게 넓고 큰 방형의 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또한 계단을 축조함에 있어서도 성의 안쪽 계단과 바깥쪽의 축조 방법도 달라서 눈길을 끈다. 낙안 읍성의 성벽 위쪽에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통행로가 만들어져 있다. 계단으로 이루어진 이 통행로 주위에는 성벽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어 시설이 없는 것도 큰 특징이다.
적대
적대(敵臺)는 치성(雉城)이라고도 한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 따르면, 낙안 읍성에는 모두 12개의 적대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4개만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적을 맞아 싸우는 곳인 적대는 현재 동문 터 주변에 주로 배치되어 있다. 동문지 좌우 1개씩과 동북과 동남쪽의 모서리 부분에 1개씩 남아 있어서, 문종실록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해자
해자(垓字)는 낙안 읍성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성의 방어 시설로 금전산(金錢山)의 남쪽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을 끌어들여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 따르면, 토성이었던 낙안 읍성을 석성으로 바꾸는 공사를 할 당시에, 해자는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해자는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동문-낙풍루
낙풍루(樂豊樓)는 낙안면 동내리에 있는 성문이다. 낙안읍지(樂安邑誌)와 노인당지(老人堂誌)에 의하면 이 성문은 낙안 읍성의 동문으로 사용되었고 1834년에 성균(成均) 진사(進士)인 김언호(金彦湖)가 중건하였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언제 확실하게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87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을 하고 있는 낙풍루는 2층의 누각(樓閣) 건물이다. 낙민루와 마찬가지로 1층은 12개의 사각 돌기둥을 이용하여 출입문을 내었으며, 2층에는 마루를 깔고 12개의 원형 나무 기둥을 사용하여 지붕을 올렸다.
남문-쌍청루
남내리에 있는 쌍청루(雙淸樓)는 낙안 읍성에 건립된 성문 중 가장 빠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성문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쌍청루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1920년대까지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쌍청루의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다. 1899년 <낙안군읍지>에는 쌍청루의 이름이 '진남루'(鎭南樓)라고 변경되어 있다. 1987년에 복원된 모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건물로 1층은 10개의 사각 돌기둥을 이용하여 출입문을 만들었다. 출입문은 2곳 중 1곳은 성벽을 쌓아 막혀 있는 상태로서, 다른 성문과는 틀린 모습이다. 2층은 원형 나무 기둥 위에 팔작 지붕을 올려 놓았다.
낙안 객사(客舍)
낙안 객사(客舍)는 낙안 읍성의 출입문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읍성의 가장 중심부에 세워져 있어 읍성의 모습을 조망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1451년에 건립되어 1631년과 1857년 2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사신을 맞이하고 교령(敎令)을 수행하며, 백성들이 모이던 공적인 공간에서 1909년 이후로 낙안 초등학교 교사(校舍)로 활용되었다. 그 후 객사가 많은 변형이 이루어짐에 따라 198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되었다. 완벽한 좌우 대칭을 하고 있는 객사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마루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안치하고 있다. 가운데 본사는 맞배 지붕으로 사신을 대접하던 곳인 양쪽의 익사(翼舍)는 팔작 지붕을 하고 있다. 낙안 객사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0호이다.
동헌
당초 건립 연대나 퇴락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옛 자리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에 가운데 청 마루를 두었다. 그리고 청 마루 양편에 큰방을 두었으며 서쪽 방은 가운데 열문을 두어 둘로 나누도록 되어 있고 방마다 작은 고방이 안쪽에 있다. 동헌 서쪽에 내아로 가는 협문이 있으며 한단 아래 아랫 마당이 있고 삼문과 양편에 각 창고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으며 1990년 복원이 되었다.
내아
지방 관아의 안채로서 내(內)동헌이라고도 하며 지방 수령이 기거하던 곳으로 정면은 'ㄱ'자형으로 7칸, 측면 2칸, 54.69평 팔작 지붕과 안쪽에 고방이 있으며 부엌과 창고가 함께 설치되어 있다. 단, 아래 마당이 있고 맞배형 대문에 동쪽에 방이 하나 서쪽에 창고가 설치되어 있다. 1990년 동헌과 함께 옛 자리에 복원되었다.
낙민루
낙안면 서내리에 세워진 낙민루(樂民樓)는 민중헌(閔重憲)이 세웠다고 전한다. 1951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87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2층의 누각(樓閣)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은 12개의 사각 돌기둥을 세워 2쪽의 문을 모두 3개를 달아 출입문을 내었고, 2층은 12개의 원형 나무 기둥을 사용하여 팔작 지붕을 올렸다. 2층에는 마루를 깔아 놓았으며, 대형 북을 걸어 놓았다.
최창우가옥
낙안 읍성의 동문인 낙풍루 길가에 있는 여러 상가들 중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집이 최창우(崔昌羽) 가옥이다. 1칸의 점포 뒤에는 방을 놓았으며, 점포 옆으로 'ㄱ'자형의 담을 쌓아 안채를 만들었다. 점포 옆으로 나 있는 대문을 들어가 오른쪽으로 향하면 안채가 보인다. 안채는 왼쪽에 부엌, 그 옆에 방과 헛간이 있다. 'ㄱ'자로 꺾이는 부분에 자리하는 헛간을 지나면 작은 방이 있어 다시 점포와 연결된다. 다른 집들이 일자형(一字形)이나 'ㅁ'자형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이 집은 드물게 'ㄱ'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점이 독특하다. 슬레이트를 사용하여 팔작 지붕을 얹고 부엌 앞에는 장독대가 있으며, 맞벽으로 두껍고 낮게 쌓아 남해안 지방의 집들에서 볼 수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97호이다.
김대자가옥
대나무로 엮어 만든 출입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화단과 함께 부엌 앞에 있는 장독대와 우물이 정겨움을 준다. 김대자(金大子) 가옥은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안방과 작은 방 사이에는 마루가 있으며, 그 앞에는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안방 출입문 바로 옆에는 작은 창인 눈곱재기창이 달려있어 채광과 통풍이 용이하다. 이러한 창문은 주로 남해안 일대에서 보이는 구조이다. 작은 방은 특이하게 처마 밑에 토담으로 만든 작은 부엌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구조는 중부 지방의 오래된 민가에서나 나타나는 것이다. 안방 옆에 있는 부엌에는 납작한 돌이나 깨진 기와장을 사용하여 만든 선반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 매설된 물독과 크고 작은 솥들이 있는 부뚜막이 있다. 이 집의 천장의 구조는 삿갓 천장으로 종도리, 추녀, 서까래 등 구조물이 모두 개방되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김대자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95호이다.
이한호가옥
마당에 잔디를 깔아 놓아 다른 집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는 3칸 집이다. 앞쪽의 지붕이 더 길어서 전체적인 가옥의 모습은 양규철 가옥과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반듯하게 자른 돌들을 이용하여 방형으로 쌓은 담의 모습에서 정리된 느낌을 갖게 된다. 10년전 도로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남서쪽으로 옮겨진 대문을 통과하면 처음 보이는 것이 헛간이다. 그 옆으로 작은 방과 큰 방이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으며, 가장 끝 쪽에 흙으로 벽을 쌓은 부엌이 다른 구조보다 크게 자리하고 있다. 우진각 지붕의 모습을 한 초가집으로 막돌을 허튼층 쌓기를 하여 기단을 만들었으며, 기둥의 초석도 막돌을 사용하였다. 납도리를 사용하여 보머리 부분이 도리와 연결되어 있는 점도 큰 특징으로 꼽힌다. 조왕신이 모셔져 있는 부엌의 바깥쪽에 장독대가 있다. 이한호(李漢晧)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94호이다.
박의준가옥
19세기에 만들어진 가옥으로 이곳은 향리(鄕吏)의 집이었다고 한다. 남도의 대표적인 4칸 집인 이 가옥은 앞쪽에 툇마루를 깔아 놓았다. 안채는 부엌, 안방, 안마루, 작은 방과 작은 방에서 이어진 작은 퇴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측면은 부엌이 2칸을 차지하고 있어 안방보다도 규모가 크다. 기둥을 8각으로 처리하는 등 낙안 읍성 안에 자리하고 있는 집들 중에서도 가장 멋스런 집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붕은 슬레이트로, 양쪽 벽채는 시멘트로 개축되어 있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박의준(朴義俊)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92호이다.
주두열가옥
19세기 초에 건립되었다고 추정되는 주두열(朱斗烈) 가옥은, 낙안 읍성의 동문과 서문을 서로 연결하는 큰길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접어드는 골목길에 자리하고 있다. 담장은 4면이 방형으로 세워져 있으며, 대지는 대문에서 안채로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서 북쪽으로 얼굴을 돌리면 안채가 있다. 안채는 가장 왼쪽에 부엌이 있고 그 옆에 큰 방과 작은 방, 이렇게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 방과 작은 방은 작은 툇마루로 이어져 있고 큰 방에는 뒤쪽으로 다락이 있다. 또한 작은 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ㄱ자로 담을 쌓아 만든 헛간이 보인다. 우진각 지붕을 사용한 초가집으로 큰 돌을 사용하여 허튼층쌓기로 기단을 만들었고, 그 위에 껍질을 벗긴 나무로 기둥을 세운 모습과 대나무로 엮어 만든 사립문에서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긴다. 주두열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96호이다.
김소아가옥
김소아(金小兒) 가옥은 서문 터를 나가 바로 오른쪽으로 향하는 골목에 자리하고 있다. 낙안 읍성 내에 자리하고 있는 민가들 중 가장 보편적인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담장 중 동쪽에 있는 벽은 성벽을 그대로 집의 담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일자형(一字形) 안채 뒤로는 장독대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가장 안쪽에 부엌이 있고 안방과 웃방 사이에는 안마루가 있으며, 이 3곳은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안방 뒤로는 문이 달려 있으며, 뒤에도 툇마루가 있다. 안마루에는 특이하게 벽을 두르고 툇마루 쪽으로 문을 달고 있는데, 그 용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김소아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99호이다.
양규철가옥
양규철(梁圭喆) 가옥은 1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초가집이다. 남문에 자리한 이 가옥은 남향을 하고 있고 부엌 2칸, 방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은 앞 쪽이 더 길게 뻗어 있으며, 가구(架構) 등에서 볼 수 있는 정돈된 구조는 허술해 보이는 토벽의 하부 구조와 대조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가옥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짜임새 있는 모습이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대나무로 엮어진 사립문과 텃밭, 울타리 가에 서 있는 많은 나무들과 어우러져 초가집의 소박함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양규철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93호이다.
곽형두가옥
낙안 읍성 남문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가옥이 곽형두(郭炯斗) 가옥이다. 대문은 따로 만들지 않고 쌓아 놓은 담장의 한 공간을 터서 그것을 출입구로 사용하였다. 남향을 하고 있는 이 가옥은 대문 쪽에서 일직선으로 놓여 있는 집 전체가 모두 보인다. 부엌, 안방, 고방(庫房), 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안방부터 건넌방까지 앞쪽에 툇마루가 놓여 있으며, 건넌방 한쪽 측면에 또 다른 툇마루가 있다. 부엌의 왼쪽에는 장독대가 위치하고 대문 옆에는 화장실이 있다. 원래 초가 지붕이었으나 현재는 왜기와 지붕으로 바뀐 모습이다. 곽형두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100호이다.
최선준가옥
남문을 들어서면 큰길인 주작대로가 보인다. 이 길 첫번째에 있는 집이 최선준(崔善準) 가옥이다. 주작대로와 만나는 집의 서쪽 벽은 담장을 쌓지 않고 있으며, 조그마한 점포가 있다. 이곳은 남문의 성루(城壘)와 성벽에 가로막혀 있어 규모가 작은 편이며, 집의 구조는 낙안 읍성 안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전(田)자형이다. 출입문 바로 옆에 툇마루와 방이 길 쪽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점포와 접해 있으며, 방 옆에 있는 부엌도 또 다른 방과 붙어 있다. 이 방 또한 작은 툇마루를 가지고 있다. 대문에서 오른쪽 대각선 쪽에 장독대가, 다른 한쪽에는 화장실이 있다. 막돌을 사용한 기단 위에 다시 막돌로 초석을 만들고 그 위에 껍질을 벗긴 굵지 않은 나무를 사용하여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초가 지붕이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들의 모습에서 공간 활용을 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고심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98호이다.
도면 및 이미지
연계정보
관련사이트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사이트
낙안읍성
관련멀티미디어(전체5건)
이미지 5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