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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문(豊南門)

작품명
풍남문(豊南門)
소재지
전라북도 전주시 전동 2가
지정종목
보물 제308호
장르구분
관영건축
개요
전주의 팔달로를 따라 순창 방향으로 약 5분 거리를 달리면 ‘경기전’을 알리는 도로 표지판이 있는 네거리가 나온다. 이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하면 바로 전동 성당이 나오고 성당 맞은편에는 이성계의 영정이 있는 경기전, 네거리 건너편에는 '풍남문'이 자리 잡고 있다. 풍남문은 전주성(全州城)의 남문(南門)이다. 관찰사의 소재지였던 전주에는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었다.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성곽과 성문이 모두 파괴되어 1734년(영조 10)에 성곽을 중건하고 남문의 이름을 명견루(明見樓)라 하였다. 그러나 1767년(영조 43)의 대화재로 불타서 이듬해 관찰사 홍낙인(洪樂仁)이 재건하고 풍남문이라 하였다. 1907년(융희 1)에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성곽과 성문을 모두 철거함으로써 이 문만 남게 되었다. 그후 종각, 포루 등이 일부 헐리고 지면이 묻히는 등 원형(原形)이 훼손되었으나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풍남문’이란 이름은 중국을 처음 통일했던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豊沛)에 빗대어 태조 이성계의 관향(貫鄕)인 전주를 풍패향이라 부른 것에 기인한다. 전주부성 가운데 남쪽 성문을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란 뜻으로 풍남문이라 하였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성문은 크게 하부의 육축(陸築)과 상부의 문루(門樓), 옹성(甕城)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육축은 가운데 12개의 돌로 홍예를 틀고 그 위에 무사석(武砂石)을 얼완자로 쌓았는데 하부보다 상부를 약간씩 들여쌓았다. 육축 윗부분에는 방어를 위해 여장(女墻)을 시설하였고 양측면 중앙에는 협문(夾門)을 내었다. 문루는 중층(重層)으로 하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상부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육축 위에 잘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민흘림 원주를 세웠으며 창방을 결구하여 축부(軸部)를 구성하였다. 공포는 주심포계(柱心包系) 형식으로 기둥 위에만 공포가 배열되었고 주간에는 화반(花盤)을 설치하였는데 화반의 모양은 호랑이 얼굴 또는 코끼리 모양으로 조각되었다. 제공의 외단은 앙서 형태인데 윗부분에 연봉을 부착하였으며 내단은 당초를 조각한 운궁(雲宮)으로 처리하였다. 대첨차와 주심첨차는 하단을 빗깎았으며 소첨차는 하단을 초각(草刻)하였다. 하층은 사면을 창호 없이 개방하였으나 상층에는 각 주칸마다 2짝의 판문을 달고 문짝마다 총안(銃眼)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浮椽)을 갖춘 겹처마이다. 구조는 전체적으로 하층의 내진(內陣) 고주가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의 변주(邊柱)가 되는 온칸물림 방식인데 하층의 칸수가 작으므로 내부에 귀고주(隅高柱)를 따로 세워 상층 우주(隅柱)가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구조법은 우리나라의 문루에서 그 유례가 별로 없다. 지붕 가구(架構)는 5량 가구방식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인데, 중앙부에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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