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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 희정당(熙政堂)

작품명
창덕궁(昌德宮) 희정당(熙政堂)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지정종목
보물 제815호
장르구분
관영건축
개요
서울에는 현재 5개의 궁궐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궁궐은 경복궁(景福宮, 사적121호)과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덕수궁(德壽宮), 경희궁(慶凞宮)이다. 조선 건국 초기, 태종은 한양으로의 재천도 이후 도성 안 동쪽에 다시 제2 궁궐인 창덕궁을 창건하고 여기서 머물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 역시 완전히 불타 없어지고, 17세기 전반기의 오랜 복구 작업을 거친 뒤, 고종에 의해 경복궁이 다시 재건되기까지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으로서의 궁궐 역할을 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화제로 계속 중수해 오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80% 정도의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그 결과 현재는 중요한 건물들만 남아있다. 희정당은 연산군 2년(1496) 12월에 숭문당(崇文堂)의 명칭을 희정당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이며 이 숭문당은 그 전부터 있었던 수문당(修文堂)으로 추정된다. 희정당은 여러번의 화재를 당해 다시 짓곤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창덕궁이 불타면서 함께 소실되어 광해군이 1609년에 재건하였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다시 화재를 당해 인조 25년(1647)에 대조전과 함께 중건되었다. 그 후 또 다시 순조 33년 대조전과 함께 불에 탄 것을 1834년에 재건하였으나, 1917년에도 불에 타 현재의 건물은 일본인들이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 건물을 헐어 중창한 것이다. 이 때 희정당은 본래의 건물과는 다르게 칸수가 크게 늘었을 뿐만 아니라, 정면에 현관도 새로 부착되었다. 내부는 구한말에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희정당은 선정전의 동쪽, 대조전(大造殿) 정남에 위치한 것으로 궁궐지에는 편전이라 하였다. 하지만, 원래는 침전에 속하는 건물로 추정된다. 즉, 침전의 하나로 내전에 속하는 건물이었으나, 순조대부터 편전으로 이용된 듯하다. 또한 이곳은 고종이 경복궁이 완성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고 순종(純宗)이 마지막까지 있었던 곳이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현재의 희정당의 규모는 정면 11칸, 측면 5칸, 단층 팔작지붕의 익공집이다. 순조 대까지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전체 15칸 규모의 건물이었다. 앞뒤로 회랑과 연결되어 있어 앞으로는 남행각의 협양문(協陽門)과 선양문(宣陽門)을 통해 들어오고, 뒤로는 대조전 행각과 연결되어 선평문(宣平門)을 통해 대조전으로 들어간다. 현존 건물은 장대석을 5단으로 쌓아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방형의 초석과 기둥을 세웠으며 전후면 중앙에 넓은 계단을 두었다. 기둥 윗몸에 창방을 돌리고 일반적인 이익공을 결구했으며, 주간 창방 위로 운공(雲工)을 두어 주심도리를 받았다. 평주(平柱) 사이의 중앙 칸은 하방 위로 아자(亞字) 분합문, 그 위에 교창을 달고, 좌우측방은 머름인방 위로 아자 분합문에 교창을 달았다. 평면을 살펴보면 정면 9칸, 측면 3칸은 거실로 쓰고 주위는 툇간으로 하여 통로로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3칸을 통간으로 처리하여 서양식 접객실을 만들고, 그 서쪽에 회의실을 두었으며 동쪽은 여러 칸으로 막아 창고로 사용하였다. 접객실은 대들보 위로 소란반자를 하였고 회의실은 서양식 반자로 구성되고 내부 의장 또한 서구적이다. 각 마루는 모두 양성하고 용두와 잡상을 놓았다. 지붕의 합각벽에는 전돌로 완자 문양을 넣고 그 중앙부에 길상문을 새겼는데 동쪽으로는 강(康)자 문양을, 서쪽으로는 녕(寧)자 문양이다.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서울편>, 건축가협회, 1999 <한국의 건축문화재 서울편>, 홍대형, 기문당, 1999 <한국의 건축>, 김봉렬, 공간사, 1994 관련사이트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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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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