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작품명
흥인지문(興仁之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가
지정종목
보물 제1호
장르구분
관영건축
개요
조선시대 서울을 한양으로 정하고 그 경계를 성으로 쌓고 성문을 내었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대문(大門)을 내었고 그 사이에 소문(小門)을 내었다. 대문의 이름을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할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따라 지었다. 동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을 숭례문이라 하고 북대문은 지(智)를 정(靖)으로 고쳐 숙정문 (肅靖門)이라 하였다. 동대문인 흥인지문은 전체 형태와 규모가 남대문인 숭례문과 유사하지만, 조선초기작품으로서 드러나는 숭례문의 위풍당당함에 비해서, 조선후기의 섬세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모두 헐려져 나가 도로 가운데 성문만 남았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화강석으로 쌓은 성곽 육축에 아치형의 홍예문을 만들고, 그 상부에 2층의 목조 문루(門樓)를 세웠다. 성문 밖으로 반원형의 옹성(甕城)을 두르고, 옹성 상부에 요철(凹凸)이 있는 여장(女墻)을 쌓아 방어용 기능에 치중했다. 옹성은 성문에 근접한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한 용도이다. 옹성을 가진 성문은 서울에서 흥인지문뿐이며, 이는 축성시(태조)부터 있었던 것이다. 서울의 동쪽 산인 낙산은 형세가 낮고 평탄하다. 동대문 일대의 지형도 낮아서 적을 방어하기에 부적절한 형세이다. 동대문이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적을 방어하기에 부적절한 지형을 인공적으로 보충하려던 의도로 볼 수 있다. 중층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가운데 칸은 다른 칸보다 2배에 가깝게 넓게 잡혔다. 바로 아래에 나있는 홍예문의 크기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했고, 내부 중앙에 고주를 일렬로 배치해 대들보와 위층 누마루를 받고 있다. 구조형식은 다포계 구조로서, 하층이 외2출목, 내3출목이고, 상층은 내외모두 3출목이다. 구조부재들이 섬세하고 복잡하게 장식화 되고 있어서, 조선후기의 조형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 지붕이며, 두 층 모두 우진각형의 모양이다. 사래 끝에는 토수를,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올려 왕성의 대문으로 손색이 없다.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서울편>, 건축가협회, 1999 <한국의 건축문화재 서울편>, 홍대형, 기문당, 1999 <한국의 건축>, 김봉렬, 공간사, 1994 관련사이트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멀티미디어(전체2건)
이미지 2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