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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돈화문

작품명
창덕궁 돈화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지정종목
보물 제383호
장르구분
관영건축
개요
서울에는 현재 5개의 궁궐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궁궐은 경복궁(景福宮, 사적121호)과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덕수궁(德壽宮), 경희궁(慶凞宮)이다. 조선 건국 초기, 태종은 한양으로의 재천도 이후 도성 안 동쪽에 다시 제2 궁궐인 창덕궁을 창건하고 여기서 머물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 역시 완전히 불타 없어지고, 17세기 전반기의 오랜 복구 작업을 거친 뒤, 고종에 의해 경복궁이 다시 재건되기까지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으로서의 궁궐 역할을 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화제로 계속 중수해 오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80% 정도의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그 결과 현재는 중요한 건물들만 남아있다. 평지에 세워진 경복궁과는 달리, 창덕궁은 매봉 기슭의 불규칙한 경사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일견 무질서해보이는 창덕궁의 배치는 철저하게 지형의 변화에 맞추어져 있다. 창덕궁 안쪽에는 거대한 규모의 왕실 후원이 조성됐으며, 동쪽에는 창경궁, 남쪽에는 종묘로 연결되어 있었다. 무질서한 듯 보이면서도 전조후침의 원칙은 고수되어 정문인 돈화문의 진입축과는 직교되는 주통로를 따라 정무공간(정전영역-편전영역-침전영역)과 생활공간 등이 차례로 전개된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대궐문으로 태종 12년(1412) 처음으로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2층 문루에 15,000근의 큰 종을 걸었다고 한다. 이 문은 창덕궁과 임진왜란으로 불탔다가 선조 41년(1608)에 복구되었다. 본래 넓은 돌계단이 있는 장대석 기단위에 지어졌으나, 일제기와 해방 후에 거듭된 도로 포장의 결과, 기단부가 아스팔트 밑에 덮여 버렸던 것을 최근에 발굴하여 어색하나마 제 모습을 찾았다. (1996, 석계 발굴 복원) 돈화문의 이름인 돈화의 뜻은 중용(中庸)의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취한 것으로 '교화를 도탑게 한다'는 뜻이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돈화문은 궁궐 영역의 서쪽에 남향하여 세워졌으며, 3칸으로 문을 구상하는 것이 일반적 통념과는 다르게 정면 5칸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좌우측 한 칸씩은 벽으로 구성되어 있어 실질적으로 문의 기능을 하는 것은 3칸이다. 육중한 석축을 쌓아 만든 경복궁 광화문과는 달리, 석축없이 소박한 목조 2층 건물이다. 위층에서는 가운데 고주를 생략하여 공간을 넓게 해 수문 기능에 편리하도록 했다. 전체 기둥은 전후측면에 12개의 평주(平柱)를 세웠고 중앙에 4개의 고주(高柱)가 있으며, 상층에 12개의 병렬주와 2개의 고주가 세워졌다. 공포는 상하층이 모두 내3출목, 외2출목이다. 천장은 1층은 우물천장으로 짜고, 꽃무늬 단청으로 채색하였고, 2층은 연등천장으로 마무리하였다. 상층마루는 청마루로 구성하여 같은 시기의 창경궁 홍화문과는 동일하지만, 숭례문의 우물마루와는 다르다. 또한 오르내리는 계단을 끝칸에 마련하였는데 이는 홍화문의 수법과는 다르다. 겹처마 지붕으로써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두와 잡상을 배치하였으며, 끝에는 취두를 올렸고, 사래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서울편>, 건축가협회, 1999 <한국의 건축문화재 서울편>, 홍대형, 기문당, 1999 <한국의 건축>, 김봉렬, 공간사, 1994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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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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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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