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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작품명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정동 1번지
지정종목
보물 제819호
장르구분
관영건축
개요
서울에는 현재 5개의 궁궐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궁궐은 경복궁(景福宮, 사적121호)과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덕수궁(德壽宮), 경희궁(慶凞宮)이다. 이중 덕수궁(사적 124호)은 원래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것을 임진왜란 직후에 잠시 궁궐로 사용했던 별궁이었다. 이때, 규모가 좁아서 인근에 있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을 합하여 궁내로 편입시키고,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광해군 때 경운궁(慶運宮)으로 승격(1611)되었고, 창덕궁이 복원된 뒤에는 간헐적으로 왕궁의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궁궐건축의 완벽한 배치규범을 찾기 힘들며, 조선 말기에 많은 양관들이 세워지는 등 원상태를 추정하기 곤란하다. 처음에는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가 고종이 1901년 새로 공사를 시작하여 중층으로 된 정전인 중화전을 건립하면서 새롭게 궁궐의 격식에 맞도록 건물들을 갖추었다. 그러나 1904년 화재로 많은 건물이 타버렸고, 1905년 수옥헌(嗽玉軒, 후에 중명전(重明殿)으로 개칭)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등 기울어 가는 조선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06년에는 불에 탄 중화전을 복구하는데 이때 규모가 단층으로 축소되었다. 또한 대안문(大安門)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였다.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개호(改號)된 것은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후 이 궁에 거하면서이다. 1919년 고종이 침전인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하시면서, 궁으로서의 생명이 끝났다. 현재의 덕수궁은 일제강점기 이후 대폭 축소되었으며 대한문도 태평로가 나면서 서쪽으로 옮겨졌다. 현존하는 전통 건축물은 정문, 정전 앞에 중문인 중화문, 생활공간인 석어당, 즉조당과 일부 행랑채와 신식정자인 정관헌(靜觀軒)만 있을 뿐이며 건물 자체도 조선조 최후의 것으로 그다지 질이 높지 않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중화전은 창건(1902)당시 새로운 대한제국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중층으로 당당하게 지어졌으며 장식또한 황색을 주조로 하였으나, 경운궁의 대화재시 소실되어 다시 중건된 것이 단층건물로 현재에 이르렀다. 중화전의 평면은 인정전과 비슷한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넓은 이중의 월대 위에 높직한 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월대와 축부, 그리고 지붕은 다소 날카로운 조선말기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석계 중앙에는 답도를 놓고 쌍용을 새겼으며, 석계 모서리에는 석수를 조각해 놓았다. 바닥은 전석(塼石)을 깔고, 고주와 창방에는 낙양각(落陽刻)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의 다포식 구성을 하고 있으나 고주 위에 익공집처럼 주두(柱頭)를 겹쳐 끼운 것과 퇴량에 별창방을 더 짜 돌린 점 등이 특징이다.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어 놓고 토수(吐手)를 끼웠다. 단청은 은은한 채식의 모루단청이고 광창과 꽃살분합문을 달아 위관(偉觀)을 돋우었다. 건물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두 마리를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서울편>, 건축가협회, 1999 <한국의 건축문화재 서울편>, 홍대형, 기문당, 1999 <한국의 건축>, 김봉렬, 공간사, 1994 관련사이트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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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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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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