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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松廣寺)

작품명
송광사(松廣寺)
소재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지정종목
사적 및 명승 제 8호
장르구분
불교건축
개요
한국불교에는 일찍부터 세 가지 보배를 가리키는 삼대사찰이 있는데 이를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고 한다. 양산의 통도사(通道寺),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순천의 송광사(松廣寺)가 그들이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불보사찰, 해인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法寶寺刹),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을 포함하여 16명의 국사를 배출하였기 때문에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송광사는 남도의 명산 조계산 북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고 신라 말기에 체징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국사전(國師殿) -국보 제56호
송광사 국사전은 나라를 빛낸 큰 스님 16분의 영정을 모시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로,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고, 그 뒤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국사전과 하사당의 건축연대는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국사전은 여러 차례의 중수로 인한 변형된 모습이라고 추측되는 부분이 많다. 건립 연대는 고려 말이란 설이 있으나 건물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초기로 추정된다. 국사전에는 건물의 이름처럼 보조국사(普照國師)를 비롯하여 열여섯 분의 고매한 조사의 영정을 모시었다.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인 국사전은 하사당 남쪽으로 약간 떨어져 서향을 하고 있다. 송광사 국사전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비교적 긴 방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통칸구조이다. 지붕은 하사당과 같이 맞배지붕의 양측에 풍판을 달고 정면은 부연을 둔 겹처마에 후면은 홑처마이다. 정면이 우수(隅數)인 4칸이 되어 좀 특이하나 기둥간격이 북측의 한 칸만이 한 자가 작고 나머지 3칸은 다 같은 것과 또 북측 면이 2칸으로 남 측면과 다른 점으로 보아 북측의 한 칸은 후에 증축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전면에는 띠살문 양4분합문을 달았고 북측면의 전협간(前夾間)에도 출입문을 두었다. 공포 역시 하사당의 공포와 거의 비슷하여 일출목에 행공첨차를 두고 처마도리를 받치고 있다. 다만 이 곳에서는 살미 내부 끝의 보아지를 당초(唐草)무늬로 아름답게 조각하였다. 첨차는 출목에서는 당초형 첨차이고 주심(柱心)에서는 교두형 첨차이다. 국사전의 공포에서는 주심선상(柱心線上)에 네 갈 소로가 전혀 놓이지 않는다. 이전의 주심포 건물에서는 십자 맞춤된 부분에 네 갈 소로가 반드시 놓였었다. 그런데 이 국사전의 부재들 사이에는 공간이 생기지 않게 되어 소로가 놓일 수 없게 된다. 다포계 공포에서 주심에 소로가 놓이지 않고 결구되는 모습과 동일한 것이다. 천장은 원래 반자가 없는 연등천장인 듯 보이나 후에 우물반자를 달았다. 대공 역시 일반 판대공도 있고 복화반형도 있어 하사당과 거의 같은 조선 초기 수법이 나타난다고 하겠다. 국사전의 변형된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여 진다. 국사전의 공포에서는 주심선상의 네 갈 소로가 생략되어 있고, 출목선 중앙에 있는 네 갈 소로 중 상단의 소로는 양옆갈이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소로의 형태와 배치에 있어서의 변화는, 주심포식 공포가 변해 가는 과정의 한 단계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모습은 단아하고 조촐한 건물이나 기둥의 높이와 처마의 깊이가 비슷할 정도로 처마는 길고 기둥은 낮아 상대적으로 건물이 낮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송광사 국사전은 건축 구조상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어서 송광사 하사당(보물 제263호)과 같은 시대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그 기법에서도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건축물이다.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02호
약사전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모시는 불전으로 약사여래는 병을 치료해주고 고통을 덜어주는 현실적 필요의 부처다. 약사의 세계는 동쪽 정유리정토이며, 일광월광보살을 좌우에 동반한다. 조선조에는 대웅전의 부불전으로 많이 신앙되었다. 송광사 약사전은 규모가 작고 위치도 모퉁이에 있지만 건축적으로는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중요한 건물이다. 원래는 약사전의 4면을 전각들이 둘러싸고 있었으나 현재는 대웅전에서 보아 앞마당의 좌측 모서리 부분에 영산전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소위 가람배치형식으로 보면 중단에 해당하는 위치이고 대웅전과 같은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쌓은 석축 위에 역시 장대석을 쌓은 한단의 기단을 두고 위치하고 있다. 4면을 모두 한 칸씩으로 구성하여 평면이 정방형으로 되어 있는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다포계 건축물이다. 건물의 규모에 비교하면 기둥이나 평방과 같은 부재들은 굵직한 재목을 사용하고 있다. 처마 밑을 받친 공포는 이출목이면서도 앙서(仰舌)의 수를 3개로 하여 전체 모습이 장중한 느낌을 준다. 내부에서 공포는 삼출목이 되는데 네 모서리의 귀살미에서 연장되는 부재가 중앙에서 교차하여 천장을 받들고 있다. 또 대들보를 사용하지 않고 공포와 도리만으로 가구한 건물이므로 내부를 앙시할 때 큰 효과를 거둔다. 이러한 무량구조는 1칸짜리의 조그마한 건물에서 자주 쓰인다. 전면에는 4분합의 띠살문을 달고 측면에도 따로 출입문을 냈으며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공포의 쇠서위에 연(蓮)봉오리를 새겨서 장식한 것이나 창방의 조각적인 수법을 보면 조선중기 이후의 건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송광사 성공중창록(松廣寺 成功重昌綠)>에 의하면 1751년(영조 27)에 중창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1974년도의 중수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31년(인조 9)에 중건되었다가 전란으로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303호
중정의 모서리에 약사전과 나란히 서 있다. 사찰의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건물은 조선 인조 17년(1639)에 창건하고 영조 12년(1736)에 중수하였으며 근년에 와서는 1974년도에 약사전과 함께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산전은 일명 팔상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법화경에서 비롯된다. 또한 영산정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데 법화경에 기록된 것을 참고할 때 석가여래가 열반을 보이는 것도 중생들로 하여금 해태심(懈怠心)을 없애고 불도를 닦게 하는 방편이요, 석가여래 자신은 과거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영취산에 상주하여 법화경을 설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법화경 전7권을 통하여 영산회상의 장엄이 설명되고 있는데 이 영산전 내부에도 본존 석가여래 석조상을 봉안했고 후불탱은 영산회상의 법화경 설법상(說法相)을 모사한 영산회상탱이다. 또 좌우에는 석가여래의 일생을 나타낸 팔상탱을 봉안했다. 중앙의 영산대회탱은 영조 원년(1725)에 완성되었다. 약사전과 더불어 조선조 후기의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크기와 칸수만 서로 다를 뿐 외관은 비슷하다. 건물의 전면은 기둥사이를 3칸으로 분할하고 있으나 그 길이는 합쳐서 21척밖에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소규모의 건축임에도 불구하고 처마 밑의 공포는 과중하게 3출목으로 짜 올렸는데 이는 건물의 외관을 한층 더 크고 장중하게 꾸미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공포는 내부에서 오히려 2출목으로 감축되었으며 그 이유는 중첩되는 공포의 부피 때문에 천장의 공간면적이 좁아지는 것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때문에 대들보를 받는 공포의 살미 끝은 양봉(樑奉)의 형태처럼 확대되었다. 한편 천장의 네 모서리에는 귀살미와 그 좌우의 살미 끝이 길게 뻗어 나와 그것을 교차시켜서 연결한 묘한 부재가 생기게 되었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그 중앙 후면에 불단을 놓았는데 그 위의 닷집은 보개형식으로 되어있다.
하사당(下舍堂) -보물 제263호
송광사의 가람은 대체로 대상(臺上)과 대하(臺下)로 구분되는데 이는 대웅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하여 생긴 이름이다. 하사당은 대상에 있는 건물로서 절에 부속된 승방건물의 하나로 주거건축과 유사한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그 건축양식이 조선초기의 수법을 따르고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희귀한 유구이다. 바로 옆에 위치한 상사당(上舍堂, 일명 三日庵)과 함께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상·하사당을 같이 사용할 때는 구참납자는 상사당, 신참납자는 하사당에 거처하면서 수선(修禪)했다고 한다. 평면형태가 정면 3칸, 측면 3칸이긴 하지만 남부지방 민가(民家)의 일자(一字)집 평면을 하고 있어 정면에서 보아 우측 한칸에는 부엌을 두고 다른 2칸은 방을 들여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남쪽 퇴를 들어서면서 방으로 들어가는데 한 짝의 띠살문양의 창호를 방에 각각 달았다. 또 부엌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는 2짝 판장문을 달아 밖으로 여닫게 하였다. 왼쪽 2칸의 방은 원래는 온돌이었으나 현재는 건물의 보존상 그리고 화재의 위험을 감안하여 온돌을 없애고 마루로 대용하여 서고(書庫)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건물의 구조는 1고주 2량으로 이웃한 삼을암이 팔작지붕인 것에 비하여 하사당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의 천장은 종이천장이고 부엌은 연등천장이므로 내부가구는 드러나 있다. 대들보는 툇마루와 방 사이에 세운 고주에서 후면의 평주에 걸쳐 통보로 걸렸다.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본래 부엌 지붕 위로 네모난 구멍을 내고 그 위에 조그만 맞배지붕을 만든 환기공을 달아낸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이것이 훼손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원형이 복구된 상태이다. 이것은 환기용 솟을지붕으로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공포는 원주 위에 짜인 주심포 형식인데 출목을 하나 두고 행공첨차로 외목도리를 받치는 형식이다. 주두 밑에 헛첨차가 익공식으로 돌출하고 그 위에 이와 비슷한 두공을 올려놓되 짧은 헛보와 같은 형태로 그 위의 퇴보를 받고 있다. 퇴보는 주심(柱心)을 초공(草拱)과 같이 받고 보머리에서 외목(外目)을 받치고 있다. 이 건물에서 특이한 것은 대공이라 할 수 있는데 측벽에서 보이는 대공은 소위 타봉형(낙타 등 모습) 또는 산형(山形)의 대공을 사용하고 내부의 것은 초기적 복화반형(覆花盤形)을 하고 있어 일본에서 중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이다가에루마다’와 비유된다. 첨차는 쌍S자형 첨차로 주심의 첨차 역시 같은 형이다. 다만 외목도리를 지탱해 주는 살미첨차가 적고 상대적으로 처마가 길게 돌출되어 첨차에 다소 과중한 무게가 실린 것 같다. 또 다른 이유에서는 전면의 처마는 겹처마이고 배면은 홑처마이기 때문에 지붕의 무게가 앞쪽에 더 실리게 된 까닭도 있다. 이 건물은 공포의 형식이나 대공형식으로 보아 국사전과 동일한 건축양식임을 알 수 있고 조선 초기 건축물에 속하는 맞배지붕 집으로 믿어진다. 하사당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주심선상에 놓인 제2소로가 옆갈이 있는 네 갈 소로라는 점이다. 이것은 수장폭(修裝幅)으로 돌출된 퇴량이 뜬장혀보다 운두가 큰 상태로 결구되어 운공이 퇴량 뺄목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심위치의 소로에 옆 갈 소로가 사용된 예로는 전주객사(全州客舍)의 주관과 더불어 처음이다. 전주객사 주관의 건축연대를 15세기 초로 송광사의 하사당을 1450년으로 추정하고 있어 비슷한 시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전남편>, 건축가협회, 1999 <한국의 건축문화재, 전남편>, 천득염·전봉희, 1999 관련사이트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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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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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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