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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佛國寺)

작품명
불국사(佛國寺)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지정종목
사적 및 명승 제1호
장르구분
불교건축
개요
불국사는 토함산 중복에 자리 잡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쌍탑식 가람이다. 토함산의 서남쪽으로는 조양평야가 전개되고 동으로는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 감은사지, 이견대를 두고 감포 앞의 문무왕릉과 동해바다를 굽어보고 있으며 산 정상 아래에는 석굴암이 있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영상 김대성(金大成, 700~774)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 현생 부모(金文亮)을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고, 모량리(牟梁里)의 전생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石佛寺, 석굴암)을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535년(법흥왕 22)에 왕모(王母)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당시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김대성이 751년(신라 경덕왕 10)에 불국사를 크게 중창하여 규모를 일신하였으며, 774년(혜공왕 10) 그가 죽은 뒤에도 공사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 후 불국사의 목조건물은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에 의하여 몇몇 석조물만을 남긴 채 육백년간 내려오던 많은 수장보물들과 함께 일시에 불에 탔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전체는 세 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었는데, 대웅전·극락전·비로전이 중심 건물이 된다. 오래된 목조 건물들은 1659년(효종 10)에 그 일부가 재건된 것이며, 1972년의 복원사업으로 무설전(無設殿), 관음전(觀音殿), 각회랑 등이 새로 건축되었다. 창건 때의 모습을 그대로 전하는 것은 청운·백운교와 칠보·연화교로 불리는 동서 석교와 그 사이를 잇는 대석단(大石壇), 범영루(泛影樓)를 받친 석주(石柱)와 석축 그리고 각 건물의 기단과 다보탑, 석가탑 등이라 할 수 있다.
대웅전
불국사 대웅전은 1765년(건륭 30)에 중창된 것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컫는 데서 유래한다. 기단부 및 초석 등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남아 있다. 건물의 규모를 보면 정면 5칸, 측면 5칸인데 당당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건물 기단은 높지도 얕지도 않은 알맞은 높이로서 4.2척 정도이다. 건물의 전체 높이는 43척(13미터)이고 기단 4면에 계단을 설치하여 건물로 오르게 되어 있다. 동·서 양 측면 중앙으로는 동·서회랑에서 꺾여 들어온 익랑(翼廊)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다포식 팔작지붕 단층 불전으로 18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구조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중앙부에 수미단(須彌壇)의 불단이 있고 그 위에 목조의 석가 삼존불이 안치되었다. 삼존불은 중앙에 석가모니불이 있고 그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협시하였고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쪽이 약간 길지만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불단이 뒤쪽으로 치우쳐 있어 내부 공간이 넓게 느껴진다. 내부에는 안두리 기둥을 둘렀는데 앞뒤쪽으로는 외두리 기둥 배열과 같게 기둥을 배치하고 측면 쪽은 기둥 1개를 생략한 이른바 감주법(減柱法)을 적용하여 공간을 넓게 하였다. 공포는 다포로 외3출, 내4출의 형식으로 외7포, 내9포작이며 살미 첨차는 초화무늬와 봉황머리 등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평방에 돌출된 용머리가 인상적으로 보인다. 가구(架構)는 2고주 7량가로 고주 위에 대량을 얹고 대량 위에는 동자주를 얹고 종량을 놓아 판대공(板臺工)이 종도리(宗道里)를 받도록 하였다. 고주와 평주사이는 퇴량과 격량으로 연결시켜 내진과 외진이 결합되도록 하였는데 그 구성이 견고하게 짜였다. 천장은 우물 천장인데 층단식으로 중앙 쪽으로 높였다. 외관에서 보면 정면의 중앙칸이 다른 건물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주칸 크기로 되어 있다. 협간(夾間)과 툇간(退間)에 비해 거의 2배에 가까운 주칸이라 시원스럽고 확 트인 느낌을 준다.
무설전
무설전은 강당에 해당하는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1973년 중창 불사 때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 건물이 세워지기 전의 발굴 조사에 의해 평면 규모와 기단 내용이 밝혀졌다. 신축된 건물은 그 근거에 의해 기단과 평면이 확정되었다. 원래의 무설전은 어떠한 건축 모양이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건물에 대한 자료는 <불국사 고금창기>에서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믿는다면 불국사 경내에서는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로 볼 수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왕명에 의해 무설전을 새로 짓고 그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비로전
비로전(毘盧殿)은 무설전 후방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화엄종 사찰의 주불전일 경우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하지만, 화엄종사찰에서 주불전이 아닐 경우에는 비로전이라 한다. 비로전은 751년에 창건되고 1593년에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뒤 현종 원년(1660) 중수되었으나 그 뒤 황폐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중창 불사 때에 다시 새롭게 지은 건물이다. 중창 전 이 건물터는 발굴 조사를 통해 평면 규모 및 그 내용이 밝혀져 그 근거에 의해 평면이 복구되었으며 지상 건물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어 고려시대 건물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이 건물에는 극락전에 있었던 높이 1.8미터, 폭 1.36미터의 금동제 비로자나불이 안치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인데 정면이나 측면 모두 어간을 양 옆의 협간, 툇간보다 훨씬 넓게 잡아 대웅전이나 극락전과 같은 주칸 크기비를 보인다. 이 건물에서도 뒷면은 정면 쪽보다 1칸 많은 6칸으로 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앞뒤에 각각 2개의 안두리 고주를 세웠는데 이는 철저히 감주법(減柱法)을 채용한 예라 할 수 있다. 공포는 주심포형식으로 고려기에 많이 사용된 형식을 취하였고 가구는 2고주 9량가로 대·중·종량의 삼중보를 얹은 형식이다.
관음전
관음전(觀音殿)은 무설전 후방 동쪽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원래는 751년에 창간되었으나 여러차례 중수를 거치다가 어느 때인지 없어진 것을 1973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거의 정방향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안두리 기둥이 4개 있고 다포식의 사모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건물 역시 정면이나 측면의 어간이 양측 주칸에 비해 2배 가까이 되어 중앙칸을 특히 강조한 느낌이 들며 이로 인해 구조적으로는 어간에 무리가 간다고 생각되지만 정면이나 뒷면 어간에는 문선을 샛기둥과 같은 역할이 되도록 튼튼한 부재를 사용하여 이를 보완하고 있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의 5포작으로 외부 살미는 견실한 쇠서형을 조각하고 내부는 교두형으로 하였다. 가구 형식은 2고주 5량가로 하고 종량 위는 심주를 세워 절병통의 심주로 하고 이곳에 추녀 뿌리가 모이도록 하였다. 천장은 내진에 우물천장, 외진은 빗천장으로 하고 바닥면에는 전돌을 깔았다.
극락전
극락전(極樂殿)은 극락전 일곽의 중심 건물이다. 극락전 혹은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시는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하는 법당으로, 미타삼부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토신앙 계통의 종파나 화엄종 등 사찰의 주불전이 될 때는 무량수전(無量壽殿), 수광전이라고도 하며, 주불전이 아닌 경우에는 미타전 또는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 한다. 건물 안에는 아미타여래를 봉안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뒤에 영조 26년(1750)에 오환, 무숙 등에 의해 중창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5년 일제 때에 중수되었지만 중창 때의 모습에 비해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이 극락전 건물은 평면 규모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3.5척의 기단 위에 총높이 30.33척 크기의 건물로 정면이 측면보다 8척 정도 작은 정방형에 가까운 건물이다. 이 건물의 평면에서의 특이한 점은 뒷면의 도리칸 주칸은 정면과 달리 4칸으로 한 것이며, 정면에서도 3칸이기는 하나 중앙칸에 2개의 샛기둥을 넣어 5칸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이는 아마 중앙칸의 크기가 18척이나 되는 긴 주칸이라 위에서 오는 하중을 받기에 좀 무리라고 생각되어 보조적 기둥이 필요하였는지 모른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내외 모두 2출목을 낸 5포작으로 살미 첨차에는 초화무늬와 봉황 머리를 조각하여 과치장(過治粧)을 한 느낌을 준다. 가구 형식은 2고주 5량가 형식으로 고주머리에 퇴량을 얹었고 고주의 위에는 일반적으로 대량을 얹는 것이 상례(常例)이나 이 건물에서는 고주 위에 초화각 판재를 얹어 종도리를 그 위에 놓게 한 특이한 수법을 써서 내부 공간의 활용을 최대한 넓히려 시도하고 있다.
석조구조 &#8211; 석가탑과 다보탑, 연화교·칠보교, 청운교·백운교
불국사 전면에서 바라 볼 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 당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병화로 소실되어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글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정교하게 잘 다듬은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높이 8.2m의 삼층석탑인 석가탑(국보 제21호)은 각 부분의 비례와 전체의 균형이 알맞아 간결하고 장중한 멋이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3층 석탑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위치하며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한다. 석가탑은 다보탑에 대칭되는 호칭으로 <법화경>에 이른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나란히 앉아 하나는 설법하고 하나는 증명하는 데서 연유한다. 높이 10.4m의 다보탑(국보 제20호)은 석가탑과 더불어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당시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석탑 중 일반형을 따르지 않는 독특한 형태를 가진 탑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의 석가탑과 마주하여 위치해 있다. 다보탑이라 함은 다보여래가 석가여래와 나란히 앉아 석가의 설법을 증명하는 상으로 해석되는데, 동양의 불교 국가에서 석조로서는 가장 뛰어나고 오랜 작품이다.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위에 여러 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건축처럼 짜 맞추었는데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에서 석가탑과 다보탑만큼이나 아름다운 석조물로서 연화교·칠보교와 청운교·백운교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의 물을 건너는 다리가 아닌 계단이다.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는 불국사 전면 대석단 동쪽의 청운교·백운교(국보 제23호)에 대하여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가구수법은 동쪽의 청운교·백운교와 같지만, 전체의 높이가 청운교의 높이와 같은 소규모의 것이다. 아래에 있는 연화교는 높이 2.31m, 너비 1.48m인 10단의 계단을 만들었는데 계단식 등항을 두고 둘로 나누었고, 등항의 양쪽 끝에는 난간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망실되고 돌기둥만 남아 있다. 다리 밑은 호형으로 가공한 석제로 궁륭형 통로를 만들고 있는데 각 층계마다 아름다운 연판이 양각되어 있어 안양문에서 내려다보면 연꽃이 펼쳐진 모양을 이루고 있다. 칠보교는 높이 4.06m, 너비 1.16m인 8단의 보계이며 한 장의 긴 돌로 된 등항으로 양분되고, 돌기둥이 상하에 남아 있는 것은 연화교와 같다. 다만 규모의 축소 때문에 다리 아래에 통로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보계에는 특별한 조각장식이 없다. 칠보교를 올라서면 안양문을 지나 극락전에 이르게 되는데, 이 석재 또한 약 45도의 안정된 경사를 보이며, 동쪽 석제의 웅장함에 비하여 아름답고 섬세한 맛이 있어 조화와 변화를 주고 있다. 동쪽의 석재와 마찬가지로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의 발원으로 불국사를 중창하였을 때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1974년 중수할 때 돌간대를 세워 끼워 옛 모습을 재현시켰다. 또 다른 계단인 청운교와 백운교는 불국사 전면 대석단 서쪽의 연화교·칠보교에 대하여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18단의 청운교는 등항에 의하여 좌우로 양분되며, 등항에는 중앙에 능선을 두었다. 좌우 끝의 등항에는 원래 난간이 가설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아래위에 돌기둥만 남아 있다. 다리 아래는 작은 돌을 가구하여 궁륭형의 통로를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위쪽 양쪽에는 등항까지 내밀린 갑석이 있는데, 모서리각의 반전 수법은 다보탑이나 석가탑의 그것과 일치한다. 청운교를 올라가면 보도가 마련되어, 서쪽의 범영루 돌기둥을 지나 극락전 앞에 이르게 된다. 청운교 위의 백운교는 16단으로 구성 양식은 청운교와 같으며 다만 규모가 작을 뿐이다. 이 다리 아래에도 작은 궁륭형 통로가 있고, 그 양쪽에서 길게 옆으로 뻗은 얇고 넓은 갑석의 수법도 청운교와 같다. 백운교를 올라서서 자하문을 지나면 앞에 대웅전이 나서고,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다. 약 45도의 경사를 보이는 이 석재는 설계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만들어졌으며, 좋은 화강석을 써서 다듬은 수법도 정교하다. 세부 양식에서도 서쪽의 석재나 기타 당탑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재의 건립도 연화교·칠보교와 마찬가지로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의 중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불국사에 있는 문화재로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경주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된 불교건축의 정수로서,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경북편>, 건축가협회, 1999 <한국의 건축>, 김봉렬, 공간사, 1994 관련사이트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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