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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뢰진(田礌鎭)

예술가명
전뢰진(田礌鎭)
구분
조각가
생애
1929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전뢰진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충남지역에서 중·고등학교 미술과목 강사를 하며 미술의 경험을 지속시켰다. 전쟁 후 홍익대학교 조소과로 편입하여 조각을 배우면서 석조에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1954부터 1961년은 본격적인 조각 수업을 받고 조각가로서 기반을 닦은시기이다. 그 동안 대학을 졸업하고 국전 등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하였으며 1961년에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홍대 조각과에 재직하게 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석조 구상의 영역을 자신의 세계로 굳혀 나갔다. 제23회 국전에서 작품 <유영(遊泳)>으로 초대작가상을 수상하고 그 이듬해 1975년에 첫 개인전을 가진 후 세계 일주로 동양과 서양의 조각예술을 순방하였다. 인간과 자연의 순수한 본질미와 가장 평화로운 세계를 찾아 평생을 석조 조각과 대좌한 그는 전통조각의 우아한 선을 되살려 내어 ‘동심적 조형’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전형을 창조해 냈다.
약력
1950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도안과 수료 1954년~1981년 제3회~30회 국전 연속 출품 1956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조각과 졸업 1956년 마포중학교 미술교사 1957년 국전 문교부장관상 1965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조각과 교수 / 국전 심사위원 1974년 국전 초대작가상 1975년~1996년 개인전 7회 개최(서울6회, 뉴욕1회) 1979년 석탑산업훈장 1985년~1988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 출품 1985년~1996년 서울시주최 현대작가초대전 1989년 韓·獨미술전 출품 / 화관문화훈장 1990년~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93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5년 철탑산업훈장
예술활동
서울대 도안과에 들어갔던 전뢰진이 조소과로 편입한 것은 윤효중교수를 만나고 나서이다. 국전(國展) 조각부의 첫 출품작이었던 그해 가을의 <습작>은 이 시기에 만든 작품으로 대리석을 깎은 앉아있는 소녀의 나상(裸像)이었다. 그 후의 국전출품작과 그 밖의 모든 작품활동을 오로지 대리석 재료로 일관했고, 대리석과의 그러한 철저적인 대좌는 한국의 근대조각사에서 전뢰진이 처음이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예술에서 감명을 받은 바가 많았다는 전뢰진의 개성적 석조추구는 정신적으로 한국의 전통적 기반 위에 성립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국전 등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하였으며 1961년에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 시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자기의 작품세계를 형성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그의 독창성으로 부각되고 있는 동화적인 소재와 따뜻한 석조기법은 이 시기에 벌써 형성되고 있었다. 1970년대 말 이후의 그의 작품은 종래의 기법에 안주하지 않고 ‘흔들리는 조각’을 창안함으로써 다시금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고 있다.
대표작품
<두상>(1957) <사색>(1957) <인어>(1958) <선경가족>(1986)
평론
우리나라 현대조각가 중에서 석조에 주력하고 있는 작가가 그리 많다고 할 수 없지마는, 이에 더하여 사실적인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온 작가는 더욱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40년간 꾸준히 외곬으로 이 길을 걸어온 석조가(石彫家) 전뢰진의 경우는 가히 독보적이라고 하겠다. 사실 오늘날에 와서 과거와 달리 한 특정재료에 의한 조형적 표현이 지속적이어야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작가들의 소재에 대한 선택의 범위는 매우 넓어졌다 하더라도 반면에 어느 특정재료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는 또 다른 조형 예술의 문제의 해결을 가능케 함으로써 오늘날에도 그것은 얼마든지 요청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自己)의 조형적 재료성은 그것의 단점과 한계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오늘날의 자유로운 조형을 가능케 할 새로운 가능성을 얼마든지 작가들은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조각가 전뢰진도 같은 이유에서 석조각업(業)을 해왔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언급해야 할 점은 사실성의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대도시에 모든 건축이 국제 양식으로 지어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조각이 추상 조각이나 새로운 실험조각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말하자면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자연주의 조각의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현대인의 느낌과 생각과 표현의지를 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애정어린 눈으로 보아온 전뢰진의 작품에서는 원초적인 생명에 대한 찬미가 그들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또 소년상(少年像), 소녀상(少女像), 모자상(母子像), 또는 가족상(家族像)과 함께 사람과 꽃, 나무가, 아이와 거위가 하나로 어울리는 매우 독자적인 조각 형식을 통해, 단독이거나 무리로 또는 직설적이거나 은유적인 방법을 통해, 건전하고 도덕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일련의 조각 작품은 이들 세계에 대한 작가의 관계가 직접적인 만큼이나 직접적이며 따라서 그들의 표현은 매우 단순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점은 다른 작가들과 어렵지 않게 구별되는 이 작가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작품세계가 이러한 특성을 근본에 지닌 채 어느 정도의 전개과정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다. 초기의 인물상(人物像), 특히 두상이나 좌상(座像)이 압도적이었던 것이 점차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자연과의 융합의 상(像)을 보이고 있다던가 보다 정적이거나 정지의 상에서 동적인 움직임(일련의 여행 연작과 같이 횡적으로 배열된 방향성의 강조)의 암시로 비중이 달라진다든가 하는 과정상의 변화를 보여주기는 하지마는 환조(丸彫)이면서 부조적인 그의 조각 형식의 성격이라든가 한국인의 관상학적 전형의 유형적 형태를 반복한다든가 나아가서 도식적인 형태처리의 반복과 같은 공예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와 같은 면은 일관되어 공유하고 있는 그의 특질이라 할 수 있다. 또 끌과 징으로 부드럽게 보이기 위한 조각 표면의 처리라든가 대리석의 석질(石質)이 갖는 재질의 미를 능숙하게 살릴 수 있는 고도로 연마된 조각술이 이에 더하여 그의 조각의 수준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이 작가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단순하며 친밀한 일상생활 속에서의 느낌을 형상화하고 조형화함으로써 현실의 특수세계, 개별세계를 넘어서서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원상의 세계에로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동심의 세계, 설화(說話)의 세계, 무아의 경지가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곳에는 착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인간 삶의 영원한 시간이 가득하다 할 것이다.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작품활동 초기인 1950년대 중반기부터 두상, 좌상의 소년, 소녀상과 같은 단독 인물상을 제작하기 시작하고 각종 전람회에 출품하고 있으나 이것이 점차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보다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 부여를 통한 조각 세계를 실현시키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단독상에서 군상(群像)으로, 인간상에서 인간과 자연의 통합상으로 전개시켜 가면서 모자상이나 가족상의 형식을 빌리는 일면, <낙원>(1978, 1981, 1987)이나 <선동> 또는 <선동가족>(1987)이나 <선경가족>(1988)을 출현시키고 있다. (……) - ‘인간 삶이 빚은 영원한 아름다움-전뢰진 석조각이 보여주는 세계’, 박래향(미술평론가)
관련도서
<田礌鎭>, 전뢰진, 1990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전뢰진>, 금성출판사, 1976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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