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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자(尹英子)

예술가명
윤영자(尹英子)
구분
조각가
생애
광복 후 홍익대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한국의 선구적인 여류조각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갖고 있는 윤영자는 주로 국전을 무대로 활동해왔다. 국전 1회부터 30회까지 출품하여, 특선 4회,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윤영자는 주로 여인상과 모자상을 주제로 여성적인 볼륨과 리듬감을 살린 부드러운 형태의 조각을 고집했고, 이는 구상과 추상이 서로 교차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서라벌예대, 대전 목원대학교에서 수많은 후진들을 길러내며 교육자로서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고, 퇴임 후에도 석주미술상을 창설하여 후진들에게 힘을 주는 등 인생의 원숙기에 접어든 예술가의 진정한 모습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약력
1953년 홍익대 미술학부 조각과 졸업 1949년~1981년 국전 1회부터 30회까지 출품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 회장상 1955년 국전 문교부장관상 1967년 5월문예상 1962년~1981년 국전 심사위원 및 조각분과 위원장 1982년~1993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1973년 목원대학교 미술학부 교수 1979년~1993년 개인전 7회(현대화랑, 진화랑, NEW YORK, 대전 등 초대개인전) 1982년~1988년 한국여류조각가회 동경전, 파리전, 로마전, 한·불 여류조각가전 기획 및 전시 1983년 한국여류조각가회 회장 1985년 국제중진작가초대전 출품(이태리 Montignoso) 1985년~1986년 France 르.싸롱 한국작가 초대전(파리 그랑페레) 1988년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회장 1988년 제2회 예술문화대상 1988년~1996년 서울시 미술대전 초대출품 1989년 목원대학교 명예교수 1990년 서울시미술대전 추진위원 및 추진위원장 1990년 ’90 SEOUL ART FAIR 특별 초대출품, 호암갤러리 1991년 寶冠문화훈장 1991년 서울시문화상 심사위원 1994년 한국의 추상미술 1960년대 전후의 단면전, 서암미술관 1996년 Canada, 목우회 합동전(캐나다 오타와) 1996년 서울국제미술제(SIAF) 출품 1995년 대한민국 기독교 미술상 1995년 한국조각가협회 고문 1996년 사단법인 목우회 이사장 1997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예술활동
조각가로서의 윤영자의 편력을 보면 이른바 좁은 의미의 조각가와 모뉴멘트 제작자로서의 윤영자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비단 윤영자의 경우 뿐만 아니라 모든 조각가가 그의 기능을 두가지로 나눈다면 즉, 조각과 기념 구조물로 구분된다. 윤영자의 작가적인 생애를 돌이켜봐도 이 두가지 기능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지금도 그 현상은 계속되는 것이다. 초기의 조소물 조각의 작품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던 바, 후기부터는 대규모의 모뉴멘트를 만들고 나서부터는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윤영자의 조각 주제는 주로 여인상과 모자상이 주역을 이룬다. 그는 이것을 초기에는 석고로, 이후에는 돌로, 금속으로 만들었다. 그의 여인상이나 모자상들은 가장 구체적인 개념으로 추구되고 있으면서도 그 형태면에서는 매우 단순화되어 본질적인 형, 원형적인 것으로 환원되면서 강한 생명주의를 띠고 있다. 1990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한 팔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운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브론즈로 된 매끄러운 표면은 유기적인 형태를 띠고 있어 따뜻한 정감을 전달해 준다. 그의 단순화된 형태는 차가운 논리의 귀결이 아닌 생명의 원초적인 생성의 단계로 환원된 것으로서 생명의 맥박과 율동이 느껴지게 한다. 그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조각의 경계선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데 그 대표적인 예가 1978년의 <사랑>(브론즈)과 1987년의 <사랑>(대리석) 등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각가 윤영자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의 중간 지대에 서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추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구상적인 요소가 많고, 구상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 그의 작품이다.
대표작품
<가을여심>(1967) <작품>(1976) <망>(1979) <기다림>(1990)
평론
(……) 조각이 아직도 널리 인식되고 있지 못했던 상황이려니와 무엇보다 거칠고 과격한 작업을 요구하는 조각과 같은 분야에 여성은 질적으로 미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회화나 다른 조형 영역에 비해 조각의 제작조건이 불리한 시대에 있어 여성이 조각을 시도했다는 것은 우선 선구자적인 결의와 의욕이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로 보인다. 모든 조건과 상황이 갖추어져 있는 상태에서 출발하는 경우와 거의 황무지다 싶은 조건과 상황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선구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 많은 어려움과 동시에 자기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예술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기 전에 먼저 개척에 따르는 어려움을 극복해온 그 정신을 높이 사주지 않으면 안되며, 바로 그 정신으로 인해 풍요로워진 오늘의 결실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초로 조각계에 뛰어든 여류조각가 윤영자씨의 평가는 일차적으로 이같은 선구적인 입장에서의 그것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조각영역에 있어선 회화영역에서처럼 이른바 국전파와 재야파 또는 반국전파라는 뚜렷한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일부 조각가들의 의식은 낡은 가치관을 벗어나 현대회화의 활발한 전개에 못지않은 그 나름의 변혁을 꾸준히 추진해 나갔다. 대체로 해방 후 제1세대에 속하는 조각가 가운데서도 낡은 방법과 양식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의식을 실험과 모색에 투자해온 이들이 있다. 주로 국전을 무대로 활동해온 윤영자 씨도 이런 조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과격한 해체와 파기의 실험적인 열기로서보다는 전통적인 소재와 방법의 점진적인 쇄신과 새로운 해석을 통한 심화의 그것으로 들여다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과거의 것 일체를 팽개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과격한 실험파가 아니라 조각의 오랜 전통의 숨결을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감각과 해석을 추진해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엔 과격한 실험에서 오는 생경한 의식이나 전통에 얽매여 있는 양식에의 안주 같은 것을 볼 수 없는 반면, 무리 없는 접근과 억지 없는 해석의 원만함이 안정감으로 감싸고 있음을 만날 수 있다. 이같은 방법의 전개가 어쩌면 여성임으로 해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추구해온 주제는 비교적 일관된 두 개의 범주로 나타나고 있다. 여인상과 모자상이 그것이다. 굳이 애인이나 모자라는 명제의 작품이 아니라도 그의 모든 형태의 원형은 여인과 모자에서 출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여인과 모자는 그의 원형이라고 해도 좋다. 여인상과 모자상은 물론 그만이 다루어온 주제는 아니다. 적지 않은 조각가들이 다루어 온 것이다. 더욱이 여류조각가의 경우, 여인상과 모자상은 가장 빈도가 많은 주제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영자씨만큼 이 두 주제에 집착해온 경우도 드물 것이다. 더욱이 모든 형태의 원형으로서 그것을 일관되게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그 예는 흔치 않다. 여인상과 모자상은 인체란 모티브를 띤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조각의 형태를 연상시키며 동시에 두 모티브가 여성의 일종의 자전적인 요소가 짙은 것이란 점에서 여류조각가에겐 더없이 친밀한 소재로 간주된다. 여인상은 일종의 자화상으로, 모자상은 일종의 가족상으로 구별될 수 있지만 두 개의 모티브가 다같이 여심이나 모성에 직접적 관계를 지닌다는 점에서 거의 일치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어머니로서의 여인이 두 개의 측면으로 나타났다가 때로는 일체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 <愛>의 시리즈에 나타난 형태는 좌우대칭의 것과 중심을 향한 집중된 밀도와 단순화를 기한 두 계열로 구분해 볼 수 있으며 재료의 측면에서 보면 대리석과 브론즈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좌우대칭의 형태는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에서 기인된 것으로, 여기엔 어머니와 아기가 두 개의 지주로서 전체 형태를 지배한다. 그러면서 남녀의 사랑에서와 같은 대립된 두 개의 상의 공존이 아니라 아기를 포옹하는 어머니의 따스한 품이 은연중 나타나 있는 대칭적 설정이다. 말하자면 이 경우 대칭은 각기 두 개의 다른 뿌리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한 줄기에서 빠져나온 가지와 같은 양상을 띤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때때로 두 개의 뚜렷한 형태로 나타났다가도 때로는 하나로 합일되어버리는 전인적 형태를 띠기도 한다. 그가 주로 다루어온 재료가 석조와 브론즈라는 점도 이 주제의 형상화와 깊은 관계에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최근에 많이 다루고 있는 대리석은 그 부드러운 질감에서 연유하는 따스한 인체의 온기가 사랑의 주제에 상응되면서 기품있는 형상을 지탱시켜 주고 있다. 조탁의 방법이 아닌 주물의 브론즈 역시 대리석으로 다루어진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날카로운 공간감의 획득은 아무래도 브론즈 계통이 뛰어나지만 좌우대칭이나 유기적인 형태의 생성의 논리 면에서 역시 따스한 정감이 전체를 감싸고 있는 편이다. 그러니까 재료 자체가 지니고 있는 특성의 확대보다는 주제를 위한 통일된 형상에의 지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의 주제에서 나타나는 최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대지에 굳건히 선 당당한 힘과 상승의 예지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대지를 딛고 서있는 것 같은 부동의 자세를 보이고 있음이다. 연약하기만한 어머니의 이미지가 아니라 굳건히 땅을 딛고 일어서 온갖 세파를 헤쳐 나가는 든든한 품으로서의 어머니의 이미지이다. 그의 여성의, 또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섬세하고 다정한 속성에서 이렇게 한편으로 강인한 생명력으로서의 이미지로 등장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온갖 인고를 딛고선 한국의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를 전해주기도 한다. (……) - ‘힘과 정감의 조화’, 오광수(미술평론가)
작가의 글
아득한 옛 추억 갓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조교생활을 거쳐 나는 수상경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숙명여고 전임 강사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3년 후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하면서 주로 경기고등학교 실기 선생으로 발탁되었다. 고등학교라도 조각실기실이 현대식으로 시설이 잘 구비되어 정감이 가고 본인의 작품도 열심히 그 속에서 작업하면서 학생지도도 밤 10시가 넘도록 하면서 즐겁고 자유스럽게 지냈던 것 같다.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라 하면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소위 수재들만이 입학할 시기였다. 때문에 조각을 배우겠다고 실기실에 들어오는 고3, 고2 학생들의 유난히도 생기에 넘친 반짝이는 눈동자와 단정한 자세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과연 어딘가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조각도 열심히 하기에 공모전에만 출품하면 최우수상만 받아오니 경기고등학교 미술부가 인기가 많았었다. 학교에서 안국동 4거리까지의 골목길은 젊었을 시절에도 멀다고 느껴졌으며 밤 10시에도 작업하던 학생들과 즐겁게 귀가를 서둘렀다. 방학 때도 하루도 쉬지 않고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되는 아들과 같이 도시락을 싸 가지고 매일 등교를 한다. 밑에 동생이 또 있기 때문에 아들은 내가 학교까지 같이 가야 할 형편이다. 어려서 그런지 어린 아들은 힘들어서 코피를 흘릴 때도 있었다. 조각실에서 자주 만나던 학생들은 나를 보면 길 가다가도 많은 학생들 앞에서 서슴지 않고 군인 같은 기립자세로 손을 올려 인사를 한다. 그 당시는 너무 민망해서 웃으면서 그 자리를 피해갔지만 멀찌감치에서 또 다른 학생을 발견하면 내가 어디론가 숨어버리기가 일쑤였다. 학생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가끔 꺼내보면 이제는 다 유명인사가 되어서 활동하는 모습이 참 자랑스럽다.
관련도서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윤영자>, 금성출판사, 1982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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