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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승(金景承)

예술가명
김경승(金景承)
구분
조각가
생애
1933년 일본에 건너가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에서 데생 훈련을 쌓고 다음해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조각과에 입학, 1939년에 졸업하였다. 1937년 같은 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양화계에서 크게 활약한 인승(仁承)과는 친형제 사이이다. 1937∼1944년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서 거듭 입선하고, 1940년부터 연이어 특선함으로써 추천작가가 되어 각광을 받았다. 특히 <여명>은 한복 바지저고리에 해머를 든 노동자상을 사실적 역동감으로 조형하여 민족색 짙은 작품으로 주목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뚜렷한 특질의 창작적 작품 활동보다는 미술대학 교수직과 역사인물상 또는 기념동상 제작으로 많은 실적을 남겼다. 주로 소녀와 젊은 여인의 전신 또는 반신 나체상으로 시종된 작품들은 대개 1949년 이후 국전(國展)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제1회 국전 때부터 추천작가·심사위원으로 참가한 뒤로 마지막 제30회(1981) 때까지 그 위치에서 초대 출품한 엄격한 사실주의와 서정적 시각으로 포착한 여러 자세 및 움직임의 나녀상들이 순수한 창작활동의 전모였다. 그에 비하여 기념동상과 기념물 제작은 두드러지게 거듭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상>(1955), <안중근의사상>(1959), <세종대왕상>(1968), <김구선생상>(1968), <김유신장군기마상>(1969), <정몽주선생상>(1970) 등과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상>(1957) 등이 주요 동상 작품들이고, 그밖에 청동주조의 많은 초상작품들을 만들었다. 이화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교수 및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하였으며, 1958년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문상, 1964년 3·1문화상 예술본상, 1969년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 1982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약력
1915년 개성 출생 1934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현 동경예대) 졸업 1939년~1942년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서 연4회 특선, 李王家常 1회 및 총독상 2회 수상 1939년~1972년 이화여대 교수역임 1949년~1981년 국전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1948년~1968년 서울시문화위원, 문교부예술위원 역임 1958년 서울시문화상(미술) 수상 1964년 3·1문화상(예술본상) 수상 1969년 대한민국예술원상(미술공로) 수상 1973년~198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진흥위원 1974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 부위원장 선임 1976년 구미 미술계 시찰 1953년~1977년 이충무공동상, 김구선생동상, 맥아더 장군동상 등 40여 점 제작건립 1976년 윤치호선생 동상제작건립(인천송도고교) 1984년 제6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예술활동
김경승(1915~1992)은 한국 현대조각의 시발점인 서구식 조각의 도입기에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이다. 그의 조각 작품은 인체의 해부학적인 사실주의에 근거한 특징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예술 시기는 ‘전기(1934~1945)’와 ‘후기(1945~1992)’로 나뉜다. 전기는 일제시대 하에서 조선미술전람회(鮮展)를 중심으로 과학적 아카데미즘에 근거한 사실적 조각을 제작하던 시기이다. 후기는 해방 후의 시기로 대한민국미술대전(國展)을 중심으로 전기의 조각적 특징을 일관되게 고수하면서 기념비적 작품 제작이 활발히 진행된 시기이다. <소년입상(少年立像)>(1939)은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인체의 해부학적인 골격미를 충실히 드러내려는 사실성에 기초하고 있다. 이 작품은 김복진의 <소년>과 비교해 볼 때, 김복진의 작품에서 돋보이는 고전적인 박진감이나 인물의 자신만만한 자세, 강건한 육체의 아름다움과 달리 나약하고 왜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등신대의 스케일과 자세는 한쪽 다리를 약간 구부리고, 양팔을 허리 위로 돌려서 S자형의 곡선을 이룬다. 원래는 석고상이던 것을 청동으로 주조한 것이다.
대표작품
<소년입상>(1943) <춘몽>(1961) <여인와상>(1969)
평론
한국의 현대조각이 1920년대 김복진(金復鎭)에 의해 도입된 서구식 조소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러한 현대 조각에 도입기의 사정이 작용하여 조각예술의 표현방식은 한결같이 사실표현이었다. 조각이 갖고 있는 입체성과 그 양괴감을 흙이나 석고로써 형성하고, 그 형성 위에다 평면적인 繪畵와는 다른 입체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한국의 현대 조각이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조각가가 된 김경승도 역시 그의 시각이 사실에서 출발하여 사실로 끝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30년대 동경미술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선전을 무대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의 조각계는 불과 몇 명밖에 안 되는 조각가가 있었고, 그들도 선전 출품작의 제작 이외에는 수요에 따라 동상을 몇몇 제작하는 미미한 활동뿐이었기 때문에 조각예술이 하나의 예술로서 발효하기에는 시대적인 여건이 성숙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45년 광복 후에는 근대화된 사회적 여건 속에서 많은 기념건조물과 동상, 그리고 각종 무게 있는 전람회들이 활발히 꼬리를 물고 일어났기 때문에 조각은 괄목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이 무렵, 김경승은 이대나 홍대 등에서 조각교수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 경향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정확한 사실적인 관찰을 토대로 한 역시 사실적인 표현이랄 수 있다. 이 말은 조각가 김경승의 시각은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최소한도의 주관의 해석으로써 만인이 납득할 수 있는 조형적인 공약수를 찾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 공약수를 찾기 위하여 그는 우선 양의 세계를 탐구하고, 그 양이 서야 할 구조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리하여 그 물체가 하나의 물체가 아닌 유기체로서 존재하게끔 생명을 부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술 분류에 따른다면 김경승의 작품 계열은 가장 구상적이고, 그 구상은 생명을 잃었을 때 일종의 아카데미즘에 빠질 우려조차도 내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조각이라는 미명하에 가장 기초적인 構造의 바탕과 양괴의 투시력을 저버린 채 허황된 문제의식에만 좌우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꾸준히 자기의 보조로써 사실의 대도를 걸어온 그의 고집은 그 나름대로의 한국현대조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조각가 김경승은 작가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동시에 그것에 못지않은 큰 공적을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미술 교육가로서의 김경승이다. 오늘날 한국 조각계에서 그의 지도를 받은 많은 유망한 작가가 있다는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여 준다. 현대라는 다양한 변화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를 지켜온 김경승의 작가적 고집이 바로 조각가로서의 그의 위치인 것이다.
관련도서
<飄泉 金景承 彫刻作品集: 1939~84>, 김경승, 1984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김경승>, 금성출판사, 1976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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