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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高羲東)

예술가명
고희동(高羲東)
구분
서양화가
생애
1903년 한성법어(法語)학교를 졸업하고 서화를 시작하여 안중식(安中植), 조석진(趙錫晉)에게 배웠다. 1909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서양화를 공부했다. 귀국 후 18년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창립하여 회장직을 맡는 한편 ‘서화협회보’를 창간하고 ‘협전(協展)’을 개최하는 등 신미술운동에 진력했는데, 1925년경부터 돌연 전통회화로 다시 전환하면서 동양화가로 일관하게 되었다. 8·15광복 후 대한미술협회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고, 1948년 한민당(韓民黨) 상임위원,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심사위원장,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1955년 대한민국예술원장으로 선출되는 한편 민주당 고문, 민권수호연맹위원장 등으로 추대되었다. 1960년 민주당 공천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1년 이후는 은퇴하였다. 당초 조선 후기의 화풍을 이으며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워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으며 1920년대 중반부터 다시 동양화로 전환하여 전통적인 남화(南畵) 산수화법에 서양화의 색채, 명암법을 써서 새로운 회화를 시도했다. 1949년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으며, 작품으로 <금강산진주담폭포>, <탐승> 등이 있다. 한국 땅에 서양화를 도입하고 발전시킨 최초의 서양화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약력
1903년~1905년 궁내부 광학국 주사 역임 1909년 동경미술학교 입학 1915년 단체전-공진회전 1918년 서화미술협회 창설 및 총무 역임 1936년 제15회 서화미술협회전 1945년 조선미술협회 회장 역임/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장 역임 1948년 제1회 서울시문화상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회 위원장 역임 1949년~1959년 제1회~8회 국전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 역임 1953년 대한미술협회 회장 역임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1955년~1959년 제2, 6회 대한민국예술원상 1957년 홍익대학교 명예교수 역임 1957년 개인전-화필생활 50년 기념 작품전, 중앙공보관 1960년 참의원 역임
예술활동
1909년 한국 최초의 미술 유학생으로 동경으로 건너가 1915년 동경미술학교에서 수학한 후 귀국한 고희동은 우리나라에 서양유화를 정착시키는 데 힘썼다. 공진회 등 단체 활동도 활발히 하였으며, 이때 <부채를 든 자화상>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에 들어 다시 복고적인 산수화를 다수 제작하면서 동양화 분야의 작품 활동으로 선회하게 된다. 고희동의 산수화들은 동양화를 기반으로 서양화의 기법과 시각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 남종산수에 서양화의 색채감이나 명암법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산수도>는 화면의 공간처리는 전통적인 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바위, 나무의 묘사에 서양화적 색채와 명암법을 보이고 있다.
대표작품
<자화상>(1915) <자화상>(1918) <추경산수>(1941)
평론
(……) 관립 한성법어학교에 들어간 총명한 고희동은 서양문화의 경이로움에 눈뜨기 시작하였고, 프랑스에서 보내온 교과서와 그림책을 통한 서양식 그림의 현실감은 그를 매료시켰다. 그의 양화 관심이 그때부터 싹텄던 것으로 보인다. 레미옹의 마르텔 초상 스케치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의 그림 취미와 재질은 한층 자극되었던 것이다. 1903년 6월에 한성법어학교 4년 과정을 졸업한 고희동은 집안의 뜻에 따라 일단 관직의 길로 들어갔다. 1908년까지 그는 광학국(鑛學局) 주사, 궁내부(宮內府) 주사, 궁내부 대신방 서기랑(大臣房 書記郞), 예식원(禮式院) 주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양화 개척의 뜻을 굳히고,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이 24세 때인 1909년 초의 일이었다. 고희동에게 그 길을 주선해 준 사람은 당시 궁내부의 일본인 차관(次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당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위치에 있었던 중부(仲父) 고영희의 힘도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그간 고희동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그림의 취미를 살리려고 당시 서울 화단의 쌍벽 대가(大家)였던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에게 전통화법을 사사한 적이 있었다. 뜻대로 동경에 간 고희동은 처음 몇 달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예비과정에서 처음으로 석고(石膏) 데생의 기초를 익힌 후, 외국 학생에 대한 특별 배려로 그 해 6월에 서양화과 1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도에 어떤 사정으로 1년은 휴학했던지 1915년 3월에 5년의 정규과정을 졸업하고 돌아오게 된다. 고희동의 미술학교 졸업과 양화 전공은 서울의 매일신보가 대서특필하였듯이 ‘서양화가의 효시’였다. 그 보도는 사진으로 곁들인 졸업작품 <자매(姉妹)>에 ‘조선에서 처음 나는 서양화가의 그림’이란 설명으로 역사적인 취급을 하였다. 마침내 한국에 양화가 정착하는 신호였다. 고희동이 미술학교 졸업제작으로 그린 <자매>는 아마도 졸업을 앞둔 겨울에 서울집에 돌아와 있으면서 그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모델이 된 한복 치마 저고리의 두 처녀는 큰 딸 계계(癸癸)와 조카딸 신신(辛辛, 둘째 형 高義中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 그림은 그 후 보존되지 못했으나, 당시의 신문 사진으로 그 내용과 기량을 대충 살펴볼 수 있다. 당시의 고희동의 유화 역량을 현존하는 3점의 <자화상>이 역연하게 알려준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두 점 중 감색 두루마기를 입은 신식머리의 <자화상>은 뒤에 언급할 동경예술대학(동경미술학교 후신) 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과 두루마기 모습 및 색조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먼저 시작(試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양서(洋書)가 꽂히고 유화 풍경의 액자가 걸린 방안에서 흰 모시적삼에 누런 삼베 바지를 시원하게 입고 앉아 부채로 더위를 식히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여름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졸업 때에 학교에 제출되어 지금도 모교에 보존되어 있는 <정자관을 쓴 자화상>은 정자관(程子冠)을 쓴 민족적 풍모로 그려져 있다. 앞의 <자화상>들에서 주목되는 공통적인 요소는 색채가 매우 밝고 신선하게 구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실내 좌상의 투명한 자주색조의 분위기는 프랑스 인상파에 영향받은 교수의 지도를 받았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고희동으로 시작된 한국 양화는 일본류의 사실주의 습득과 동시에 서구(西歐)의 새로운 인상파 색채감각도 수용된 셈이다. 서울에 등장한 첫 양화가로서 고희동은 그의 집 사랑채에서 예닐곱 명의 재질이 있는 중학생에게 목탄 기법과 석고 데생을 지도하며 후진 양성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유화 활동으로는 1915년 여름에 서울의 한 기생을 모델로 가야금을 타는 자태를 그린 사실이 당시 신문 보도로 확인된다. 그밖에 1917년에는 매일신보에 연필 스케치로 <정월 세시풍속>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렇듯 고희동은 선구적인 양화 개척자였으나, 주위와 사회의 몰이해 및 냉담으로 갈등을 겪다가 1920년대 중엽 이후에 가서는 그동안에도 가끔 손댔던 전통적인 수묵화로 완전히 전향함으로써 양화계 형성의 구심적인 위치를 스스로 저버렸다. 그 후 그는 친밀한 사이였던 전통화가 이도영(李道榮)과 민족사회의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이끌며 포괄적인 민족미술 운동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양화의 마지막 작례는 1922년과 1924년에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출품하였던 <어느 뜰에서>와 <습작>으로, 당시 도록에서 그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앞의 작품은 봄철의 고궁(古宮)뜰에서 애기를 업고 서 있는 소녀를 그린 것으로 모델은 둘째 딸 본본(本本)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뒤의 작품은 망건을 쓴 흰옷의 노인이 나무숲을 배경으로 장죽을 물고 옆으로 서 있는 인물화였다. - <현향희의 미술읽기>, 현향희, ‘양화의 선구적 개척자 고희동’
관련도서
<한국현대미술전집1>, 정한출판사, 1980
관련사이트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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