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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국악단

단체명
난계국악단
구분
국공립단체
개요
충북 영동 난계국악단은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 사람인 난계 박연 선생의 동양음악 철학을 전승·발전시키고 문화사절로서 우리 음악과 국악의 고장 영동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1991년 5월 창단되었다. 창단 이후 전국의 축제행사 및 해외연주 등 왕성한 연주활동으로 국악단의 위상을 높였으며, 1999년 ‘세계문화유산의 해’에는 문화관광부가 주최한 행사에서 세종대왕즉위식 재현행사와 종묘제례악을 상설 연주함으로써 실력 있는 국악단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2002년~2004년에 이어진 해외초청공연으로 우리 소리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활약하는 한편,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최초로 상업용 국악 CD를 제작, 판매함으로써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소재지: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379번지
주요활동내용
1991년 난계국악단 창단연주회 1994년 전국국악관현악축제 연주 1997년 제2회 광주비엔날레 초청연주 1998년 대통령취임식행사 취타대 연주 1999년 종묘제례악·세종대왕즉위식 재현행사 연주 2001년 세계도자기축제 초청연주 2002년 해외초청공연(일본 후쿠시마) 2003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초청연주 / 해외초청공연(일본 다까네정, 가츠누마정, 이치노미야정) / 서울로얄심포니오케스트라 협연 2004년 제1회 대한민국지방자치박람회 초청연주 / 해외초청공연(일본 오사카, 야마나시현) / 제1회 대한민국지역혁신박람회 초청공연 2005년 충북공예인세미나 초청공연 2006년 제1회 대한민국축제박람회 초청공연
참고
난계(蘭溪) 박연과 영동 난계는 1405년(태종 5년) 28세에 생원이 되었고 34세 1411년(태종 11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를 거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문학을 지냈다. 세종이 즉위하자 난계를 관습도감 제조로 임명하여 음악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난계는 음악에 대한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지 않아 악률 사용법조차 없어질까 염려되어 악서의 편찬이 시급함을 느끼고 즉시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조사하고 악기보법 및 악기의 그림을 실어 한 권의 악서를 만들었는데, 이 책은 예조 봉상시 악학관습도감 아악서에 각각 한 권씩 소장되어 있다. 박연은 많은 아악기를 제작하였는데 석경을 비롯하여 생포, 방경, 훈축, 토악, 대고, 영고, 뇌고, 노고, 죽독, 건고, 편종 등 모두 옛 제도에 맞도록 제작 혹은 개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악기는 제작보다 여러 악기의 율조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악기의 조율이 완전히 되어야 비로소 139개의 악기합주가 깨끗한 화음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악기의 율조에 필요한 것은 편경인데 경은 돌로 만든 것으로 쇠로 만든 종같이 춥고 더운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아 음이 불변하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다른 여러 악기가 조율된다. 또한 편경의 율조에 필요한 것은 12율관인데 편경은 율관으로 조율되어야 하며 율관 제작에 필요한 것은 거서(기장이라는 곡식)였다. 세종 7년에 마침 기장이 해주에서 나오고 경석이 경기도 남양(현재 화성군)에서 나와 같은 해 8월에는 예조의 요청에 의하여 채석해다가 시험, 제작하였고 1427년(세조 9년) 5월 드디어 12매 한틀의 완성을 보았다. 이 편경은 중국 황종의 경을 표준하였고 웅진에서 산출된 기장으로 삼분손익법에 의하여 12율을 제작한 것이다. 또한 세종실록 59권(세종 15년)에 의하면 박연의 감독하에 세종 8년 가을부터 세종 10년 여름까지 종묘와 영녕전 및 제사에 통용할 편경과 등가에 쓸 편경, 특경 등 528매를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경은 중국의 경보다 더 잘 맞는다고 하였다. 난계는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였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하도록 하였다. 1431년(세종 13년)에는 남급 정양과 함께 조회 악기를 제작하여 왕에게 올렸고 정월하례에 새로 제정된 아악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는데 이 때의 궁중의식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매우 찬연한 것이었다. 또한 옛 제도에 대하여 약간의 착오가 있는 제향의 악을 바로 잡았고 종묘의 악뿐 아니라 사직, 석존, 원구단, 적전, 선잠, 선농, 산천 등의 모든 제사악에 대해서도 옛 제도와 틀린 것을 지적, 정정하여 세종 20년대의 종묘악을 정통적인 아악으로 확립하게 된 것이다. 세종 15년 7월에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등용되어 이후 공조참의와 첨지중추원사를 거쳐 동지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 1445년(세종 27년)에는 67세의 노인으로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로 다녀와서 인수부윤, 중추원 부사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에까지 이르렀다. 1453년(단종원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인 계유정난 때 아들 계우가 처형되었고, 박연은 3조에 걸친 원로였다는 점을 참작하여 화는 면했으나 파직되었다. 늙어서 이런 비운을 당하게 되자 고향인 영동에 내려와 있다가 1458년(세조 4년) 3월 23일 81세에 돌아가니 그 유해는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안장되었으며 영조 43년에 문헌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박연은 거문고를 창제한 고구려의 왕산악, 가야금을 창제한 신라의 우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분으로 악서제작, 편경제작과 각종 아악기 제작, 조회악 및 회례아악의 창제, 제향아악, 특히 종묘악의 정정 등 조선음악의 기반과 아악의 정리로 큰 업적을 남겼으니 영동의 자랑이다. 음악가 난계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해서 매년 가을 난계국악축제가 다채롭게 개최되고 있다. 악학도감이 된 성임에게 세조가 말하기를 “음악을 아는 자는 적고 지금 공인배가 배우는 것은 모두 음란한 소리여서 그것을 악이라 할 수 없다. 경은 짐의 뜻을 받들어 악률에 유심하라” 이르고 또 “배우면 박연을 따를 수 있느냐”라고 물으니 성임은 “박연을 따를 수는 없으나 배우면 혹 따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요는 전심에 있다”라고 그를 격려하였으니 세조가 박연의 악률을 사표로 삼은 것은 물론이며, 당시 음악에 대한 박연의 해박한 정도를 말해주고 있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박연의 분은 1676년(숙종 2년) 영동군 심천면 초강서원에 배향되었다가 없어졌고 1871년(고종 8년) 세덕사를 건립하였으나 6·25동란에 퇴락한 것을 1973년 재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문헌공 난계 박연을 비롯하여 고려조 대제학 문간공 박시용, 증이판 박천석, 자헌대부 한성판윤 박천귀, 증이판 국당공 박흥생, 전중어사 이요당 박흥거 6위를 모시고 있다. 3,500㎡ 대지에 사당과 8동의 부속건물, 6위의 신도비가 있으며 주위는 철책으로 보호시설이 되어 있고 1973년 지방비 1,015천원을 투입하여 폭 4m, 길이 207m의 진입로를 개설하였다. 부지 5,584평 맨 상단에 난계 사당(정면 3간, 측면 2간 맞배지붕)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후손들이 제를 올리고 있다.
관련사이트
난계국악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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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국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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