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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의(金永義)

예술가명
김영의(金永義)
분야
연주자
생애
김영의는 1908년 1월 10일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5촌 아주머니가 당시 이화학당의 기숙사 사감으로 있을 만큼 집안이 일찍 개화한 덕분에 인천 영화보통학교에 다니던 그는 아홉 살 때 이화학당 보통과로 전학했다. 이미 인천에서도 서양 선교사들을 본 일이 있지만 이화에서의 경험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으며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에 이르기까지 온통 서양풍의 느낌 속에서 김영의의 학창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숙사 생활은 매우 따뜻한 분위기여서 한 형제들처럼 지냈고 상급생 중에는 5촌 아주머니와 6촌 언니도 있었다. 보통과 시절에 그는 장난꾸러기여서 무슨 내기를 하든지 지는 법이 없어 언제나 친구들과 놀 때는 가장 인기있는 학생이기도 했다. 이런 활달한 성격은 테니스라든가 농구 등 본격적인 운동으로 발전했고, 고등과 때는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보통과 시절 우연한 기회에 선배인 이정애 선생의 지도로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그가 후일 피아노를 전공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이화학교 고등과에 올라가서는 본격적으로 피아노와 운동을 함께 하게 되었는데 테니스 연습 때문에 피아노를 치는 시간이 줄어들자 당시 음악 선생이었던 윤성덕 선생이 쫓아다니며 피아노를 가르쳐 학교를 졸업할 때는 운동이냐 음악이냐로 고민까지 했다. 고등과 시절, 그는 음악부장을 맡아 동료 학생들의 음악지도까지 함으로써 그에 대한 학교의 관심도 그만큼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고등과를 마친 김영의는 이화중등 예과로 진학해서 공부하는 중에 본격적인 대학과정인 이화여자전문학교가 문을 열면서 전문학교 안에 문과와 음악과가 생기게 되었다. 어느 곳을 갈까 하며 망설인 끝에 일단 문과에 지망했지만, 4월 개학이 되어 학교를 가보니 그 사이에 음악과로 옮겨져 있었다. 이유인즉, 당시 음악과 과장이었던 선교사 영(Young)선생과 정애식 선생이 “영의는 꼭 음악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장학금을 마련, 음악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영 선생과 정애식 선생의 결단으로 김영의는 결국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당시 음악과는 피아노전공과 성악전공만 있어 김영의는 피아노를 전공으로 택했다. 1920년대 후반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는 미스 영과 베이커, 벤플리트, 아펜젤러가 있었고, 정애식, 윤성덕, 이은라, 안기영 등이 역시 교수직을 맡고 있었다. 김영의는 이화여전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면서도 3학년부터는 부전공도 할 수 있게 되자, 정동교회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을 이용해서 당시 세브란스 병원의 치과의사인 붓스박사 부인으로부터 오르간까지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야말로 당시에는 팔방미인 격으로 그가 끼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성악 전공이 아니었는데도 합창 시간에는 소프라노와 알토 등 모자라는 파트를 맡아하며 그 누구보다도 알찬 학창시절을 끝낼 수 있었다. 1929년 3월 이화여전 음악과를 3회로 졸업하게 된 김영의는 유일한 동기생인 이금동과 졸업연주회를 가졌는데, 베토벤의 <월광>을 비롯해서, 스승인 미스 영, 정애식 선생과 함께 피아노 듀오 연주를 하기도 했다. 이화여전을 졸업하자마자 그는 바로 이화여고에 음악교사로 취임,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YMCA강당과 정동교회의 음악회에도 열심히 참가해 독주와 반주를 맡기도 했다. 그의 일생 가운데 연주가로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던 3년의 세월이 흐른 1935년, 영 선생의 주선으로 미국의 줄리어드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그는 고별독주회를 가졌다. 바흐와 베토벤, 그리고 미국의 작곡가 맥도웰 등의 작품으로 고별독주회를 끝낸 그는 8월 부관연락선과 프레지던트호 등을 번갈아 타고 미국으로 향했다. 명문 줄리어드에 입학한 그는 4년 동안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열심히 음악에 몰입하는 한편, 각종 음악회에도 열심히 참관하며 연주도 했는데 1937년, 뉴욕인터내셔널하우스에서 한인들의 모임이 있었을 때는 안익태가 첼로 독주를, 김영의가 피아노 독주를 하기도 했다. 1939년 줄리어드를 졸업한 김영의는 그 해 8월 귀국, 다시 모교의 강단에 섰지만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귀국독주회도 갖지 못한 채 8·15 광복을 맞았다. 이후 1947년 9월 미군정청의 도움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에서 1년 동안 연구를 했고, 이듬해인 1948년에 돌아와서는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 원장으로 한국전쟁 때까지 봉직했다. 그의 세 번째 도미 유학은 1958년에 이루어졌는데 이번에는 퍼시픽대학의 대학원에 등록, 음악 전반에 걸친 폭넓은 지식을 터득할 수 있었다. 1908년 태생이니 그의 나이 50세가 되었건만, 좀 더 배워 보려는 음악에의 정열은 기회만 있으면 그로 하여금 연구하는 데 힘을 쏟게 한 것이다. 그는 이 곳에서 졸업 작품으로 우리 민요인 <농부가>를 주제로 한 여섯 개의 변주곡을 발표했는데 이듬해 귀국해서는 특히 음악이론에 대한 관심과 학생들을 위해 음악사전을 집필, 출간했다. 젊어서는 매우 사교적이고 활달했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 봉직하면서부터는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지 않고 오직 음악교육과 김활란 박사를 도와 학교를 위한 일에만 모든 힘을 기울였다. 그러한 공로를 기려 1961년 이화대학은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1970년 은퇴 이후에도 이화학당의 상무 이사로 계속해서 학교 일을 보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쉬지 않았다. 1986년 11월 26일 7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고, 28일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이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든 김영의 홀에서 고별예배가 거행되었다.
약력
1929년 이화여전 음악과 졸업 1939년 줄리어드 음악대학 졸업 1947년 줄리어드 음악대학 연구직 1948년 예림원(이화여자대학교 예술대학)원장 1954년~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58년 미국 퍼시픽대학원 입학 1962년~1964년 서울시 문화위원
상훈
1961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문학박사 1963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1964년 교육 공로 표창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 음악분과위원장, 국민훈장 목련장
리뷰
우리나라 음악계의 선각자들을 살펴보면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양악을 접한 후 순전히 자신의 독자적인 노력으로 조금씩 양악을 터득해서 이를 후학들에게 가르친 그룹이 있고 그 다음으로는 무언가 좀 더 배워 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학교에서 본격적인 서양음악을 접하고 돌아온 그룹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이 바로 양악의 본고장, 다시 말해 미국이나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인데 이들 중에서 최초의 줄리어드 출신으로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연주가로서 교육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피아니스트 김영의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조교로 대학 음악교육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으로 정년 퇴직하기까지 38년간을 우리나라 여성 음악교육과 음악문화를 위해 몸을 바쳤고, 비단 음악 뿐만 아니라 선각자로서 여성운동에 앞장섰다. (……)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줄리어드 출신으로 음악에 대한 본격적인 접근 방법을 통해 깊이 있는 연구를 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음악교육을 위한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 본고장의 교육과정을 그대로 이화대학에 옮겨 놓음으로써 주먹구구식의 양악교육에서 탈피, 전문음악인을 양성하는 음악교육기관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지금은 많은 음악대학들이 설립되어 음악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나라 음악교육의 기본이 되는 씨를 뿌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김영의와 같은 굳은 신념을 가진 음악교육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 ‘한국 음악교육의 기틀을 다진 피아니스트’, 한상우,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대한민국예술원, 1998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한상우, 지식산업사, 2003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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