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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종(朴敏鍾)

예술가명
박민종(朴敏鍾)
분야
연주자
생애
박민종은 1918년 개성의 유복한 명문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중학교 과정까지는 개성에서 다니다가 지금의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서울의 명문 제1고보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이미 음악을 하는 선배를 다수 배출하였는데 채동선, 이혜구, 문학준 등이었다. 피아노의 윤기선은 거의 같은 연배였고, 오르간의 곽상수는 그의 후배였다. 박민종은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바이올린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그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홍난파와 함께 현악3중주를 연주하고, 또 1928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관현악단인 중앙악우회에도 관여했던 이영세로부터 바이올린 개인지도를 받는다. 이때부터 박민종은 일찍부터 음악도로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어서 그는 1936년에 동경의 우에노음악학교(현 동경예술대학)에 진학하는데, 박민종의 본과입학은 바이올린으로서는 최초였고, 또 마지막이기도 하였다. 졸업 후 대학원에 해당하는 2년 과정을 마치고, 바로 학교의 강사가 되었으니 당시 박민종에 대한 기대와 찬사는 대단한 것이었다. 동경예대의 대학원을 졸업한 박민종은 한국에서는 물론 현지 일본, 만주 등지에까지 명성을 떨치고, 일약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부상한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때 그는 공습이 심한 동경을 피하여 고향인 개성에 돌아와 2년 동안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명문 호수돈여고에서 교편을 잡는다.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서울로 와 당시 유일한 음악전문교육기관인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된다. 그때 박민종은 20대 후반의 약관이었지만 뛰어난 연주기량과 열정적인 활동으로 해방 직후 악단을 선도하는 실질적인 연주자 그룹에 포함된다. 1946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이 설립되면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영입된다. 한국전쟁 시 박민종은 해군정훈음악대의 초대악장을 지내고, 1952년에는 파리유학에 오른다. 그는 파리에서도 단계를 밟아서 한국인 최초로 파리악단에 진출, 프랑스 직업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된다. 그는 이어 노르웨이, 서독 등에도 진출, 한국음악을 알렸다. 그는 유럽의 후반부를 독일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외국인들에게는 문호를 개방하지 않던 시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1950~1960년대 그의 독일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1971년 귀국해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최초의 연주 이후 다수의 독주회를 갖는 등 연주, 지휘, 그리고 작곡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경희대학교 음대 학장으로 2년간 재임한 뒤, 1972년 그의 젊음을 바쳤던 서울대학교 교수로 복귀하며 학장으로서 1983년 정년을 맞는다.
약력
1942년 동경예술대학교 및 대학원 졸업 1946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54년 파리국립음악원 디플롬 1964년 서독 W.S.O 교향악단 악장 1970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1980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1년 한국음악학회 회장 1984년 마드리실내악단 단장 1995년~1996년 대한민국예술원 음악분과 회장
상훈
1980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84년 올해의 음악가상 1987년 월간음악 본상 1987년 보관문화훈장 1994년 국민음악상 1998년 3·1문화상
공연
1956년 파리 O.S.I.P교향악단 협연 1959년 12개 도시 순회연주 1961년 뉴욕타운홀 독주회 1966년 W.S.O 교향악단과 협연 1974년 대구시립교향악단 협연 1977년 파리 살가보 독주회 1986년 마드리실내악단 순회연주 및 지휘
작품
연가곡 <꿈> <안개> <그리움> 듀오곡 <진명곡> 등 22곡
리뷰
(……) 그는 매사에 있어 자기가 정해 놓은 영역을 함부로 넘나들지 않았다. 또한 자애로우면서 엄격한 스승의 도를 지켰다. 그는 악단에 대한 마지막 봉사사업으로 마드리실내악단을 창단하고, 육성하였는데 이것도 정년 이후에 봉사하는 일이었다. 그의 또 하나의 업적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한국음악을 소개하기 위해서 시작했던 편곡과 작곡 작업이었다. 1986년 <조곡 제2번>, 1993년 <조곡 제1번>, <제2번 플루트>, 1993년 조병화 시 <안개>, <그리움>, <꿈> 등의 연가곡으로 발전해 자기의 음악세계를 발전시켰고, 1995년에는 우리나라 현악합주를 위한 중요한 작품으로 <현악합주를 위한 소나티네>를 작곡하여 작곡세계에서도 깊고 넓은 경지에 몰입했다. 그가 한때 음악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초창기 제자들의 음악생활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인연을 맺은 마드리실내악단은 창단 15년을 넘어 여성들의 음악계 진출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연주활동에 대한 서구의 비평을 알 수 있는 프랑스 피가로 지의 일부를 보자면 “프랑스 음악이 멀고 먼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 음악가에게 완전히 이해되어 연주되었다. 한·불친선음악회가 파리에서 열린 것은 감격적이고 또 호감이 가는 일이며 동양의 세밀한 조화를 갖춘 바이올리니스트 박민종의 연주는 대성공적이었다. 박민종의 삶은 오랜 국제적인 활동속에서 개방적이며 합리적이되 어떤 부분에서는 한국적인 법도와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지키고 있다. (……)” - 프랑스 <피가로>
관련도서
<오음음계적 즉흥곡 1,2>, 음악저널, 1998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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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종 / 현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나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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