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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복(金元福)

예술가명
김원복(金元福)
분야
연주자
생애
김원복은 1908년 7월 25일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4세 때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 김형준은 기독교인으로 정신학교와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 김원복도 자연스럽게 기독교학교인 이화여고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9세가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처럼 처음 피아노를 가르친 것은 아버지였지만 당시 이화학당의 김영환을 비롯해서 선교사로 와있던 미스 영(Young)으로 옮겨가며 계속해서 지도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가 피아니스트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역시 아버지였고,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만들기 위해 엄한 훈련을 시켰다. 1926년 이화여고를 졸업한 김원복은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원 피아노과에 입학, 처음에는 일본인 교수에게 사사했으나 그 일본인 교수가 조금 가르쳐보더니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다고 판단하면서 다른 선생을 소개해 독일 선생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독일 선생은 당시 일본에서 피아노 교수로 있던 파울 솔즈 교수였는데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솔즈 교수로부터 연주가가 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1930년 3월 동경고등음악학원을 졸업한 김원복은 그 해 6월까지 모교의 강사로 재직했는데 그와 함께 졸업한 동창생으로는 첼로 전공의 안익태와 바이올린 전공의 홍성유가 있었고, 특히 홍난파의 조카인 홍성유와는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홍성유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고 숙부인 홍난파가 만든 난파트리오의 단원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음악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결혼은 당연히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이 나라 최초의 부부 음악가가 탄생되는 순간이기도 해 당시 신문에서도 크게 다루었다. “19일 밤 청년회 강당에서 열린 신인환영음악회. 장중한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와 안익태 씨의 정열 그대로인 첼로 독주가 끝난 후 김원복 양의 청초한 자태가 단위에 나타나자 그림자같이 피아노 옆에 앉아서 악보를 넘겨주는 젊은 사나이-백어같은 흰 손가락이 건반 위를 달리는 것을 눈으로 지키는 탐탁한 두 사람의 포즈, 그는 말할 것도 없이 로맨스의 주인공인 신진 바이올리니스트 홍성유 군이다. (……)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한 쌍의 어린 카나리아와 같이 서로 격려하며 공부한 지 4년 만에 두 사람이 함께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동경악단에서도 조선의 젊은 천재 음악가라는 찬사를 받다가 얼마 전 금의환향하여 21일 신학교에서 거행하는 꽃다운 결혼예식을 이틀 밤 남겨두고 첫 번 연주회를 열었던 것이니 나이도 똑같이 스물 세 살이라 한다. - ‘한쌍의 카나리아’, <조선일보>, 1930년 6월 21일 그러나 홍성유는 결혼한 지 6년 만에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리고 김원복은 이때부터 이를 악물고 두 아들을 키우는 한편, 피아니스트로서의 정열을 불태워 홍난파와 함께 연주활동을 했고, 성악가 이인선, 윤심덕, 한기주,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의 반주도 도맡아 했다. 1935년에는 경성중앙보육학교의 교수로, 다시 1938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로 학교에 몸담고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1930년대 중반에서 194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도 국내의 모든 음악행사에서 그의 이름은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현제명이 이끄는 연희전문이 주최한 여름음악캠프에서도 피아노 교수로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인으로는 김원복 한 사람만이 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광복을 맞자 김원복은 한국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의 피아노 주임을 맡으면서 1946년 12월엔 임원식이 지휘한 고려교향악단과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을 한국에서 초연했다. 1946년에는 경성음악학교 교수가 됨으로써 그 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 부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정교수, 기악과장 등을 맡으며 1973년 정년 퇴직 때까지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도 연주가로서의 활동은 계속되어 많은 무대를 소화해냈고, 특히 정년으로 대학에서 물러난 후 그의 연주 활동은 오히려 더욱 불꽃이 피어올라 후학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겨주었다.
약력
1926년 이화고등여학교 졸업 1930년 일본 동경고등음악학원 졸업 1938년 이화여자전문대학 교수 1945년 고려교향악단 피아노 주임 1946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3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기악과 주임 1974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상훈
1962년 대한민국 문화포상 196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5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84년 채동선음악상 1990년 5·16 민족상
공연
1939년 피아노 삼중주단 발표회(서울 공회당) 1941년 모차르트의 밤 이중주연주단 연주회(서울 공회당) 1947년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연주회 1956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연주 1961년 일본동경 세계음악제 한국대표 참가 1967년 모차르트, 슈베르트, 바이올린 2인 연주회(국립극장) 1971년 국립교향악단협연 1972년 교수음악회 연주 1973년 교수음악회 연주 1976년 국립교향악단협연 1978년 국립교향악단협연 1978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연주회 1982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연주회 1985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연주회 1988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연주회 / 팔순기념음악회 1994년 김원복 교수와 함께하는 듀오의 밤
리뷰
무대연주 70년의 기록을 끝으로 그의 연주가 마감된 것으로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1996년 9월, 88세의 나이로 다시 변화경, 백혜선과 함께 3대 사제음악회 무대에 섬으로써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 날 호암아트홀 무대에서 변화경, 백혜선과 가진 블랑의 소나타와 모차르트, 부조니의 2중주곡은 리듬처리, 그리고 음악적 젊음으로 제자들과 호흡을 함께 함으로써 놀라운 정신력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김원복은 연주 이외에 어떤 일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고, 1984년에는 제1회 채동선음악상을 수상했으며, 이어서 5·16민족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연주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다만 감탄과 깊은 경의를 보낼 뿐이지만 구순을 넘긴 나이에도 제자들의 음악회에 빠짐없이 참석해서 격려하는 등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또다시 그를 무대에서 만나리라는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다. 그의 나이 91세가 되는 1999년 2월에 다시 제자들과 연주회를 갖기 위해 매일 세 시간씩 피아노와 씨름하고 있는 김원복. 그는 평생 70년 이상을 피아니스트로 무대를 지킨 단 한 사람의 연주가로 기록될 것이다. - ‘한국 최초의 전문 피아니스트’, 한상우,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1998
관련도서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한상우, 지식산업사, 2003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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