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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열(金淳烈)

예술가명
김순열(金淳烈)
분야
연주자
생애
김순열은 192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회의 풍금소리에 매료되어 장차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원산은 항구도시였고 특히, 바다는 아름다웠으며 개항 이후에는 송도원 해수욕장이 개장되어 관광지로서 외부와의 문화접촉도 빈번한 도시였다. 원산은 또한 게일 선교사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예배에서 찬송가를 중요시하게 되었고 김순열이 다닌 미션스쿨인 성흥영생고보에서도 자연스럽게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 이 학교는 이미 피아노를 보유하고 있었고, 캐나다 선교사 중에는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분이 있었다. 당시 음악에 소질이 있는 이 학교 학생들은 선교사로부터 노래와 피아노를 그룹으로 지도 받을 수 있었다. 당시에 원산출신으로는 이흥렬이 있었는데 그는 일본 동양음악학교 출신으로 개선장군같이 원산에 돌아와 피아노를 연주하였다고 한다. 집안의 반대로 인해 중학교(현 고등학교 수준)를 졸업한 후 일 년 동안은 취직을 해 일을 하기도 했지만 동경유학의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 네 분의 누님 도움으로 그는 드디어 동경고등음악학원(구니다찌 음악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구니다찌의 면학 분위기는 엄격하였고, 그는 여기에서 당대 독일의 최고 베토벤 해석자인 알트로 슈나벨의 지도를 받았다. 김순열이 후에 베토벤 소나타 전곡에 도전한 것도 바로 이러한 영향 때문이었다. 1943년 귀국, 1946년 서울 시공관(명동소재)에서 한국음악협회가 개최한 춘기 대연주회에서 첫 데뷔연주회를 가졌다. 이 연주회에서 쇼팽의 연습곡 작품 10의 9, 발라드 1번 작품 23, 앙코르곡으로 쇼팽의 연습곡 작품 25의 1을 연주했다. 젊고 패기있는 연주가상이 부각되었고, 성공적인 데뷔 공연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1947년 5월 7일 명동 시공관에서 가졌던 정훈모의 독창회에서 반주를 맡았는데, 여기에서 신인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을 입증 받는 계기가 되었다. 피아노 반주 실력을 인정받으며 그는 정훈모, 김성태, 현제명의 강력한 추천으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의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김원복, 정훈모, 박민종, 김창락, 김순열 다섯 사람이 합의해서 5인음악회를 마련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학구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음악회로서 연주자들의 기량과 연주의 내용면에서 신선하고 자극이 되는 음악회였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힘겨운 생활을 견뎌온 그는 1954년 6월 최초의 독주회를 갖게 된다. 제1회 독주회가 끝나고 1968년 제2회 독주회까지는 약 14년이라는 장기간의 공백이 생겼지만 그동안 그는 후진양성과 1964년 황병덕 독창회의 피아노, 전봉초 첼로독주회의 피아노를 맡으면서 간간히 실내악 활동도 벌인다. 그러면서 긴 사색과 음악예술에 대한 새로운 통찰의 시간을 갖게 되는데 그 결과, 1968년 베토벤 시리즈의 첫 번째 연주회를 갖게 된다. 이 때 당시 그의 나이 48세. 그는 정년 퇴임하는 65세까지를 완주 목표로 설정하는데 이것은 일찍이 한국음악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연주계획으로 그의 차근차근하고 진지하게 음악에 접근하려는 자세와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약력
1943년 일본 동경고등음악학원(현 동경국립음악대학) 피아노과 졸업 1947년~1985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66년~1970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학과장 1973년~197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기악과 주임교수 1987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8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91년~1992년 대한민국예술원 음악분과회장
상훈
197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0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83년 보관문화훈장 1985년 국민훈장 목단장
공연
1946년 정훈모 독창회 협연 1947년~1948년 김창락 불란서가곡 독창회 협연 1948년~1950년 5인음악회 1954년~1978년 피아노 독주회 6회 1964년 황병덕 독창회 협연 1964년, 1993년 전봉초 첼로독주회 협연 1976년 김자경 독창회 협연
논문
<쇼팽과 그의 작품>(1980) <마우리찌오 폴리니의 연주예술>(1984)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의 개념과 특성>(1988)
리뷰
(……) 김순열의 첫 데뷔연주회는 1946년 서울 시공관(명동소재)에서 한국음악협회가 개최한 춘기 대연주회였다. 이 공연은 여러 사람이 함께 서는 연주회였는데 일종의 축제 형식의 음악회로서 이 당시에는 이러한 류의 연주회가 일반화되었다. 이 연주회에서 쇼팽의 연습곡 작품 10의 9, 발라드 1번 작품 23, 그리고 앙코르로 쇼팽의 연습곡 작품 25의 1을 연주했다. 젊고 패기있는 연주가상이 부각되었고 성공적인 데뷔공연이었다. 이 연주회의 파장은 급속하게 서울 장안에 퍼지게 되었고, 또다시 배재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독창회 반주 후에 당시의 신문평은 독창자와 긴밀한 호연이라고 찬사를 보내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때 유일한 방송기관인 서울중앙방송에서도 두 번에 나누어 슈베르트 전곡을 방송했다. 또 하나 독창회의 역사적인 반주는 1947년 5월 7일 시공관에서 가졌던 정훈모 여사의 독창회였다.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는 전곡 공연으로 역시 한국 초연이었으며, 당시 정훈모 여사는 이미 중견 성악가로서 그 권위와 예술의 격조가 높은 분이었다. 이 공연도 대성황이었으며, 신인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이 만천하에 입증되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피아노 반주에서 그는 일약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의 교수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당시 정훈모는 음악학부의 교수로 재임하고 있었고, 피아니스트 김원복 여사도 피아노과 교수로 있었다. 이들의 강력한 추천이 없었던들 학부장인 현제명, 교무처장 김성태의 동의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교수 부임은 음악계의 큰 사건이었다. (……) 제1회 베토벤 연주회는 1968년 5월 7일, 명동 소재 국립극장이었고 제2회 연주회도 같은 국립극장, 제3회 연주회는 4년 후인 1974년 5월 7일 장충동의 국립극장에서 이루어졌는데 그의 베토벤 시리즈의 마지막이 된 제4회 연주회는 1975년 9월 16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있었다. 이 때 우연치 않게도 그 프로그램에는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 32번이 포함되었는데 그때 나이 55세였다. 그 연주회를 열면서도 9년 내지 12년 걸려서라도 전곡을 완주하겠다는 포부를 다시 피력하였다. - ‘피아노 아카데미즘의 추구’, 이상만,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1998
관련도서
<음악과 현실>, 박용구, 예솔, 1998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한상우, 지식산업사, 2003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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