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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금(黃英金)

예술가명
황영금(黃英金)
분야
성악가
생애
황영금은 1931년 청진에서 출생하였다. 오로지 ‘성악공부를 위해서는 이남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열 여섯 어린 나이에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고, 풍랑이 너무 심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는 밀항선을 두 번씩이나 타고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 그에게 한국전쟁은 지금도 진저리쳐지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져 청진을 떠난 일, 청진에서 철원까지 ‘오징어 장사’로 위장해 간 일이며 초조하게 3·8선 넘는 날을 기다리던 일, 아슬아슬한 위기를 몇 번이고 넘기며 초겨울의 임진강을 건너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같은 고비를 넘기고 피난민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생존에 대한 안도감에 앞서 ‘이제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더욱 설레었다고 한다. 황영금은 그러나 이런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리 ‘노래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청진여자중학교 시절에는 연거푸 합창부 테스트에서 떨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혼자 열심히 연습한 결과 합창부 테스트에서 떨어뜨린 음악 선생님에 의해 함경북도 중·고등학교 대표 솔리스트로 뽑혀 공회당에서 <고향 그리워>를 부르기에 이른다.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재학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마친 그는 오페라 전문 가수로 활동하며 다수의 오페라 무대에서 그 기량을 과시했다. 특히 <토스카>의 토스카 역을 잘 소화해내어 ‘황토스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강한 목소리를 지녔다. 1959년부터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오페라 가수로서, 교육자로서 많은 학생들을 길러냈다.
약력
1951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2년 중퇴 1956년 일본 동경예술대학 음악학부 성악과 졸업 1958년 동경 이기회(二期會)오페라연수과 수료 1959년~1996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73년 독일 베를린음대 수학 1962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명예교수 200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기타 88올림픽음악자문위원, 한국슈베르트가곡연구회 회장, (사)한국음악협회 이사, 한국바그너협회 이사, (재)한국문화협회 이사 등 역임
상훈
1987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88년 문교부장관 표창 1996년 국민훈장 목련장 2001년 대한민국예술원상
공연
1959년 조선일보 주최 독주회 1975년 동아일보 주최 독주회 1992년 아카데미심포니 초청 귀국독창회 국내외 주요음악회 출연 200여 회
오페라
1962년 <왕자호동> 1973년 <아이다> 등 오페라 주연 35회
저서
<벨칸토 창법 연구>(1965)
리뷰
(……) “저는 새 학기에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아름다운 욕망을 가지라’는 얘기를 꼭 해줍니다. 욕심을 갖는다는 것은 성취를 위한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요즘 학생들은 예전에 비해 공부를 덜 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너무 평이한 얘기 같지만 ‘첫째도 노력, 둘째도 노력, 셋째도 노력이 비결’이라는 것, 그리고 ‘전공에 반쯤 미쳐보라’고 얘기해 주고 싶습니다. 그 자신도 평생 공부하는 자세로 살려고 애써왔다. 1990년 안식년 휴가로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 때는 1년간 이탈리아 시에나에 가 이탈리아어 공부를 했다. 흔히 이탈리아 사람들은 상냥하다고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프레토상구에’(피가 냉정하다는 뜻)라고 할만큼 냉정하기 이를 데 없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도 하루 네 시간씩만 자고 공부했다. 아름다운 관광지는 돌아오기 전날 단 하루 돌아보는 데 그쳤다. 그는 그처럼 노력하면서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목소리만은 어쩔 수가 없다’며 웃고 만다. “남들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위로하지만, 제 자신은 느끼지요. 어디선가 좋은 노래 소리가 들려오면 마음으로는 그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안되거든요. 그럴 때는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1960년~1970년대 한국 오페라계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하던 소프라노 황영금 교수. 그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단어 하나에도 신경 써가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는데 이런 그를 두고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장일남 씨는 ‘끔찍한 완벽주의자’라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완벽주의야말로 62세의 프리마돈나를 건강하게 지켜온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 ‘무대은퇴 선언한 한국 오페라계의 프리마돈나 황영금’, 하유미, <음악동아>, 199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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