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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목 (1953.5.13~)

예술가
이춘목 (1953.5.13~)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80.12.31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수자 선정 1982.4.1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조교 선정 2001.11.30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71.1. 국악고등학교 졸업 1974. 이정범에게 설장고 사사 1974. 황재기에게 농악 사사 1980.12. 김정연에게 서도소리 사사
생애(약력)
1972.~1976. 국립국악원 연주단원 1973. 국립국악원 아악연주단 순회공연 1975. 일본 NHK 아시아민속예능제 참가 1985.9.~1998. 제6회 이춘목 서도소리 발표회 1986. '86아시안게임 놀이마당 기념공연 1988. '88올림픽 놀이마당 기념공연 1989.11. KBS 국악제 1989.11. 이춘목 서도소리 발표회(국립국악원) 1990.10. 제2회 이춘목 서도소리 발표회 1990.10. 문화의 달 및 광명시민의 날 기념 이춘목 서도소리 발표회 1990.11. (사)한국국악협회 광명시 지회장 1990.12. (사)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광명지부 부지부장 1990. 광명시 광일초등학교 가야금 교사 1991.5. 청소년의 달 및 광명국악협회 창립기념공연 1991.9. 제1회 구름산예술제 아악의 밤 공연 1991.9. 제7회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 장려상 수상 1991.12. 경기도문화상 공연예술부문 수상 1993. 국립국악원 주최 민속음악연주회 서도소리 발표 1994.9. 제9회 경기도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 1995.10. 제3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종합우수상 수상 1999.~2003. 광명시 문화예술위원 2002.6. 월드컵 문화행사공연(국립극장 문화마당) 2002.11.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민속박물관) 2002.11. 서도소리극 <향두계놀이> 출연(국립국악원 예악당) 2002.11.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민속박물관)
리뷰
스승의 삶이 내 좌우명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의 보유자였던 김정연(金正淵)씨의 소리를 이어받아 지키고 있는 이춘목(李春木)씨는 스승이 돌아가신 후 외롭지만 더 큰 결심으로 스승의 소리를 지키고 있다. 서도소리 명창으로 국악전반에 걸친 폭넓은 바탕과 큰 재주를 갖고 있던 서도소리 인간문화재 김정연씨는 1987년 2월에 작고했다. “선생님 소리는 맑고 듣기 좋은 소리에 떼구루루 구르는듯한 방울목이 특징이셨죠. 민속예능전반에 탁월한 재능이셨고 경우가 분명한 깔끔하신 성격이셨구요. 서도소리에 대한 애착이나 사명감이 유별나셨습니다. 당신의 고향소리여서 더욱 그랬죠.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살아서 평양에 가보고 싶었던 소원을 이루셨을 텐데…” 스승생전에 공부를 더 충실하게 못한 후회와 고향에 가보고 싶은 스승의 못 이룬 소원 때문에 그는 더 아쉬워한다. “저는 열성적인 제자가 못됐어요. 선생님은 제가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국악을 배운 근본이 있고 다른 소리때가 묻지 않은 좋은 재목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붙잡고 계셨던 거죠.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니까 책임과 의무, 사명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스승의 소리계보를 지켜야 한다고, 스승의 뛰어난 소리 그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고 기를 쓰고 열심히 하는 깨달은 제자가 된 것이다. 그는 1952년 5월 31일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다. 중,고과정 국비생인 ‘국악사양성소’에 들어가 피리전공으로 김태섭, 정재국씨에 사사했다. “아버님이 시조 잘하시고 장구장단에 밝은, 이를테면 한량이셨죠. 국비생이라는 것과 아버님의 국악에 대한 이해가 저를 그 학교에 들어가게 한 이유였죠. 저는 호기심은 있었지만 싫고 좋고도 모르고 배웠죠. 돌아가신 김기수 선생님이 저에게 피리를 전해주셨구요.” 그가 평생 스승인 김정연씨를 가깝게 모신 것은 1972년 ‘국악원연주단’에 들어간 후였다. 김정연씨는 단원들에게 시조 서도소리 가야금 병창 등을 가르쳤다. “서도소리 입창 중에 ‘초목이…’라는 소리가 있었어요. 사람들이 내 이름 춘목이와 비슷하대서 나를 아예 초목이라고 부르곤 했어요.” 어쩌면 이 별명이 그를 서도소리에 가깝게 해준 하나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목이 세고 소리가 맑다. 국악학교에서 닦은 시조, 가곡, 가사 등 성악의 기초와 피리, 양금 등 기악의 기본이 있고 다른 소리에 묻히지 않아 서도소리로 쉽게 뻗어나갔다. “저보다 먼저 이수자가 된 선배가 세분 있었는데 지금은 활동을 안 해요.” 그가 스승이 떠난 후 더욱 큰 사명감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서도소리의 <관산융마(關山戎馬)>와 <수심가>는 세고 맑은소리죠. 저에게 기질적으로 맞아요. 관서지역의 사람들이 가진 특성이나 어떤 애환 같은 것은 저와 꼭 어울리지는 않지만 소리자체의 기질은 제 기질과도 잘 맞는 것 같아요.” 스승 김정연씨의 소리는 이제 그의 예술의 목표가 됐고 ‘경우가 분명한’ 스승의 성격은 그의 삶의 모범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현재 경기도 광명시에 살면서 ‘예총 광명시지부’ 부지부장 일을 하고 광명시 국악시범학교인 광일국민학교에서 주1회 가야금반과 서도소리 특별지도를 맡고 있다. 처음에는 아내의 집밖에서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남편도 이제는 이해하고 도와주어 자라는 세 아이 모두 엄마의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걱정 없이 내일을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서도소리 전수와 내 공부, 광명시 국악발전 등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앞으로 나서는 마음이 뜨겁다. <일간스포츠>, 구히서, 1991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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