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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귀희 (본명:오계화, 1921.2.6~1993.7.14)

예술가
박귀희 (본명:오계화, 1921.2.6~1993.7.14)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68.12.21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인정 1993.7.14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사망해제
학력(계보)
1931. 박지홍에게 소리공부 시작 1933.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에 입단, 장판개, 이화중선에게 소리 사사 1935. 강태홍에게 가야금과 병창 사사 1935. 오태석에게 병창 사사 1938. 박동실에게 판소리 흥보가, 심청가 백일공부 1939. 류성준(劉成俊)에게 수궁가 백일공부, 이기권에게 정정렬제 춘향가 사사
생애(약력)
1938. 한양창극단에 입단, 오케이레코드에서 <천하가 태평하면서>, <심봉사 눈뜨는 대목> 등을 음반 취입 1940. 전국명창대회에서 1등(조선일보) 수상 1942. 동양극장 경연대회 연기상(연극협회) 수상 1944. 황금좌 연기상(연극협회) 수상 1945. 명치좌 연기상(연극협회) 수상, 여성국악동호회 창설 상무이사 역임 1947. 국악원 산하 조선창악회를 김봉업과 함께 창립 1948. 여성국악동호회 결성과 함께 제1회 공연 춘향전을 각색한 <옥중화>를 공연 1953. 예술학원을 운영 1960.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설립인가 1966. 명인명창대회에서 최우수상(동양TV 방송국) 수상 1969. 박귀희 예술생활 30년 기념공연(시민회관) 1973. 재단법인 국악학원 초대 이사장 취임, 국민훈장 동백장 서훈 1977. 서울시문화상 수상 1979. 가야금 병창곡집(세광음악출판사) 발간 1980.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장 역임 1983. 대한민국 사회교육문화상 수상 1989. KBS 국악공로상 수상,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 1993.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발전기금으로 운니동 사저 및 대지 현금 전액을 기증 1994. 자서전 <순풍에 돛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 발간
리뷰
“조상(祖上)의 뛰어난 슬기와 예술성(藝術性)에 무한(無限)한 감사(感謝)를 드릴 뿐입니다.” 국악계의 후진양성을 위해 24억원의 거금(巨金)을 흔쾌히 희사한 가야금 병창(倂唱)의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 박귀희(朴貴姬) 여사를 찾았다. “애당초 국악교육의 진흥을 위해 마련했던 재산(財産)이니 국악계의 후진양성을 위해 내놓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요. 실은 죽음에 임박하여 유언(遺言)으로 기증할 생각이었는데 국악예고(國樂藝高)가 이전(移轉)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모금운동을 벌인다기에 좀 앞당겼을 뿐입니다. 그 동안 운당(雲堂)여관을 아껴주신 분들께는 추억어린 명소(名所)가 헐리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앞서기는 합니다만 평생의 소신에 따라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애착이나 아쉬움은 없습니다.” 운당(雲堂)여관은 150여년 전에 지어진 전통 한옥으로 박귀희(朴貴姬) 여사가 지난 1958년에 가회동 부자인 한상욱씨로부터 사들여 대지 450평에 한옥 7채, 객실 31개의 여관으로 개조, 지난 30여년간 각종 기전(棋戰)의 타이틀매치만도 4백국 이상이나 개최된 곳이기도 하며 외국인들이 즐겨찾던 한국풍이 어린 여관으로 꼽혀왔다. 박(朴)여사는 이 여관(싯가 16억원)을 처분하고도 국악예고의 이전기금이 부족하자 다시 대전(大田)의 농토(싯가 8억원)도 희사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倂唱)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인 그의 본디 이름은 오계화(吳桂花)다. 1921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로 가는 길목에 있는 어느 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에 끌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을 그 쪽으로 옮겼다. 그곳은 단가(短歌)등을 가르치는 곳으로 <만고강산>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는 학교를 오가면서 밖에서 듣기를 며칠, 그 후에는 아예 학교 가는 것도 잊은 채 경청하기를 몇 달, 부러운 눈으로 훔쳐보며 노래를 속으로 따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소리 선생님 손광재(孫光在)씨가 그를 안으로 불러들여 노래를 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동안 귀동냥하며 익힌 <만고강산>을 불렀다. 그의 노래를 듣고난 소리 선생님 3~4년 배운 사람보다 낫다며 “대구에 소녀(少女)명창(名唱) 나왔다.”고 칭찬하였다. 손(孫)씨의 이 찬사가 박귀희(朴貴姬) 여사로 하여금 국악과 인연을 맺게 한 동기였다. 이 후 그는 손씨의 문하생이 되어 천성적인 소질과 꾸준한 노력으로 소녀명창((少女名唱)이 되어 15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 5월에 당대의 명창(名唱)이었던 이화중선(李花中仙)에게 소개하고 그를 데뷔시켰다. 그는 그 때 빨간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고 <만고강산>을 불렀더니 객석에서 떠나갈 듯이 환호하더라고 그 때를 아련히 회상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2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공연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소리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대동가극단을 떠나 박기홍(朴기紅)씨와 유성준(柳成俊)씨로부터 창악(唱樂)을 사사하는 한편 강태홍(姜太弘)씨로부터 가야금 병창을 사사하였으며 대구 근처에 있는 화원 용인사와 하동 쌍계사에서 각각 백일(百日)공부도 하였다. 그는 이 백일 공부에서 비로소 소리의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19세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 OK레코드 회사에서 <천하태평가(天下太平歌)와 심청가(沈淸歌)>중에서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을 취입했으며 이듬해에는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한 ‘전국명창대회(全國名唱大會)’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 그 이듬해 오태석(吳太石)씨 문하에서 다시 가야금병창을 사사하여 오늘의 예능을 대성시켰으며 1968년 12월에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로 지정되었다. 박귀희(朴貴姬) 여사는 일제말기에는 임방울씨 등과 함께 ‘한양창극단(漢陽唱劇團)’과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을 창설하여 잊혀져가는 우리의 전통음악(傳統音樂)을 보급하기 위하여 전국을 순회공연 하기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김소희(金素熙)씨 등과 함께 ‘여성국악동호회(女性國樂同好會)’를 조직하여 <해님달님>을 공연하였는데 이 연극의 인기(人氣)는 대단하였다. 6ㆍ25 동란으로 한 때 경기도 광주에 피신했던 그는 부산에서 ‘여성국악동호회’를 재건, 공연활동을 계속하다가 환도하면서 서구화의 물결이 휩쓸고 있는 풍토 속에서 우리의 것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 시급하다는데 상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5년 돈암동 전차 종점에 김소희, 박초월, 한영숙씨 등과 ‘한국민속예술학원(韓國民俗藝術學院)’을 설립하여 초대 원장이 되었다. 그는 이 학원이 3년 동안에 학생 수가 780명으로 늘어나자 학교를 세워도 되겠다는 확신을 얻어 삼성(三星)의 이병철(李秉喆) 회장, 경방(京紡)의 김용완(金容完) 회장, 전방(全紡)의 김용주(金龍周) 회장, 조선일보 방일영(方一榮) 회장 등을 찾아 다니며 도움을 요청, 국악예술고등학교(國樂藝術高等學校)의 전신인 국악예술학교를 1960년, 관훈동에 세웠던 것이다. 그는 이어 1973년에는 국악예술학교를 재단법인 국악학원(國樂學園)으로 등록한 후 3년 동안 초대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오늘날의 국악예술고등학교(國樂藝術高等學校)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의 후진양성(後進養成)은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해외까지 뻗어나갔다. 그는 지난 1962년, 일본 동경(東京)에 ‘한국무악학원(韓國舞樂學院)’을 창설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재일교포들에게 우리의 민속음악과 무용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학구열(學究熱)도 대단했다. 대구에서 보통학교를 나온 다음 소리공부를 하면서도 한문서숙(漢文書塾)에 나가 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부터 통감(通鑑)까지 익혔으며 국악예술학교를 운영하기 위하여 1957년에 대구 경상대학을 수료하기도 하였다. 박귀희(朴貴姬) 여사의 국악공연(國樂公演)은 비단 국내에서만이 아니다. 1960년 ‘시카고박람회’의 세계민속예술대회에 참가한 것을 필두로, ‘파리세계민속예술대제전’, ‘일본동경올립픽대회’, ‘세계민속예술제’, ‘뮌헨세계올림픽대회’, ‘민속예술공연’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해외공연을 통하여 우리 전통예술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선양하기도 하였다. 그는 우리 조상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세계 가는 곳마다 한국예술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 조상의 슬기와 예술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귀희(朴貴姬) 여사는 국악교육진흥과 국악의 보급ㆍ선양을 위한 공로로 해서 국민훈장 ‘동백장(冬柏章)’을 비롯하여 ‘서울시문화상(市文化賞)’, ‘대한민국 사회교육문화상(社會敎育文化賞)’, ‘국악대상(國樂大賞)’ 등 수많은 상을 타기도 하였다. 그는 학교교육을 통해서 많은 국악인을 양성하기도 하였지만 개인적으로도 가야금병창의 후계자 양성에 여념이 없다. 그 동안 중견국악인 안숙선(安淑善)을 비롯하여 김성녀(金星女), 강정숙(姜貞淑), 조남희, 윤소인, 정기분, 정옥순 등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냈으며 현재의 문하생도 30여명에 이른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 스승의 호를 따 ‘향사(香史) 가야금병창연구회’를 조직, 지난 봄에 창단공연을 가진 바도 있다. 이 공연에서는 박(朴)여사가 작곡한 민요 꽃타령, 뽕따러가세, 봄노래 등도 선보여 많은 관람객으로부터 갈채를 받았었다. 이제 소망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나의 제자들이 출세하여 나보다 나은 명창(名唱)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가야금병창의 관소리제(制)를 악보화(樂譜化)하는 것” 이라면서 남은 여생(餘生)을 이 일에 쏟겠다고 다짐한다. 그가 가야금병창에서 즐겨 부르는 가사는 단가로서 <죽장짚고>, <녹음방초>, 판소리를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 <수궁가> 중에서 ‘고고천변’, <심청가> 중에서 ‘방아타령’, <홍보가> 중에서 ‘제비노정기’, <적벽가> 중에서 ‘좌룡이 활 쏘는 대목’이라 했다. 국악예술고등학교(國樂藝術高等學校)에서는 박(朴)여사가 희사한 돈을 기금(基金)으로 시흥(始興)에 5천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내년 말까지 신축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우리나라 국악예술사를 조감할 수 있는 ‘박귀희(朴貴姬)기념관’을 건립한다니 그의 뜻은 영원히 살아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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