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함동정월 (본명:함금덕, 1917.8.25~1994.10.12)

예술가
함동정월 (본명:함금덕, 1917.8.25~1994.10.12)
출생지
전라남도 강진군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80.10.17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전수 보조자 인정 1994.10.12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전수 보조자 사망해제
리뷰
김창조(金昌祖)·최옥산(崔玉山)계보 잇기 60여년 12세에 입문(入門), 많은 제자들 길러내 가야금은 거문고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심성과 애환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현악기이다. 열두 줄의 명주실을 퉁기면 그 소리가 청아하고 유현하기 이를 데 없다.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며 우륵(于勒)으로 하여금 곡을 지어 연주케 하였다는 사실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가야금음악에는 산조와 병창의 두 흐름이 있다. 가야금산조는 진양조에서부터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 등의 선율로 짜여진 가야금만의 독주곡이고, 가야금병창은 가야금을 퉁기면서 거기에 맞추어 스스로 노래하는 것이다. 가야금산조의 연혁을 밝힐 옛 문헌은 없다. 다만 함화진(咸和鎭)이 펴낸 <조선음악통론(朝鮮音樂通論)>에는 김창조(1865~1918)가 <심방곡(心房曲)>을 변작(變作)하여 우조와 계면조로 분류하고, 각종 악기에 탄주하기 시작하여 산조를 창작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박헌봉(朴憲鳳)은 한성기, 박상근, 심상건의 스승이 김창조와 동년배라는 사실을 들어 김창조의 산조 창작설을 부인하며 그 연원을 우륵까지 소급하고 있어 이를 밝히기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판소리가 한 사람의 명창에 의하여 창작된 것이 아닌 것처럼 가야금산조도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김창조의 산조 구성이 다른 계통의 산조 구성보다 뛰어난 구성미를 가진 것으로 보아 산조의 음악형식 구성에 가장 뚜렷한 공을 세웠으며 그런 의미에서 김창조를 가야금산조의 중시조(中始祖)로 보는 것은 무방할 것 같다. 김창조 이후에는 많은 가야금산조의 명인이 탄생하였는데, 이들은 자기나름대로 가락을 첨가하기도 하고 약간 바꾸기도 하면서 지역적인 연유나 전승의 계보에 따라 ○○○제(制)니, △△△류(流)로 나뉘어 여러 유파가 형성되었는데 그동안 한성기(韓成基)류, 최옥산(崔玉山)류, 한수동(韓壽童)류, 안기옥(安基玉)류, 정남옥(鄭南玉)류, 강태홍(姜太弘)류, 박상근(朴相根)류, 심상건(沈相健)류 등이 전해져 왔으나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최옥산류와 한성기류, 안기옥류이다. 한성기류는 김창조와 한숙구(韓淑求)에게서 사사한 한성기의 가야금산조를 말하는데 김창조의 직계 손녀인 김죽파(金竹坡)에게 전승되었다가 현재는 양(梁)승희씨(보유자후보)가 그 맥을 잇고 있으며, 안기옥류는 한숙구에게서 사사한 안기옥의 가야금산조로, 정남희(丁南希), 김윤덕(金允德)을 거쳐 이영희씨(예능보유자)에게 전승되었다. 최옥산류는 김창조에게 직접 사사한 최옥산의 가야금산조로, 그의 제자인 함동정월(咸洞庭月)에게 전승되어 오고 있다. 함동정월(咸洞庭月) 그의 본디 이름은 함금덕(咸金德)이고 아호는 소운(昭芸)이다. 약간의 대인공포증과 피해망상증으로 세속의 사람들과 담을 쌓은 채 칩거하고 있는 서울 중랑구 망우3동 어느 2층집 전세방으로 그를 찾아갔다. 함씨는 1917년 8월 25일,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기로리에서 함일권(咸一權)씨의 2남5녀중 넷째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당대 최고명창들과 교유하며 소리북을 쳐주던 명고수였으며 집안도 머슴을 둘이나 둘 정도의 부농이었다. 그가 국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2살 때였다. 작은 오빠가 땅을 잡히고 사업을 벌이다 실패하여 가세가 급격히 기우는 바람에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실의에 빠져 날마다 울며불며 지냈다. “그때 광주에 사는 김창수씨가 찾아왔어요. 내가 학교에 못가는 게 화가 나서 매일같이 운다고 어머니가 말하니까 나를 달래준다며 서울에서 내려온 ‘협률사’의 창극을 구경시켜 주더라구요. 이화중선과 이중선이 나오는 춘향전인데 첫눈에 반했어요.” 집안의 내림일까, 아니면 타고난 끼일까? 그는 그 길로 학교에 다니지 못한 한을 소리로 성공하여 풀겠노라고 다짐하면서 김창수의 수양딸이 되어 광주에 가서 그 당시의 유일한 예술교육기관이던 ‘권번’에 들어가 예기수업을 받았다. 엄격한 지도 아래 광주권번의 장(長)인 최영감한테 정악·시조·가야금·승무·검무 등의 기초과정을 1년반만에 떼고 고향에 돌아왔다. 예술에 맛들인 소녀는 고향 병영에서도 더 공부할 방도를 찾았다. 능주 김복술에게 가곡을 배우고 김군옥과 오수암에게는 <흥부가>, <적벽가>, <춘향가>, <심청가> 등 판소리를 익혔다. “그땐 입에 독을 물고 했지요. 나도 이화중선 같은 유명한 국창이 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오기로 덤볐지, 참말로 지독하게 했습니다.” 국민학교를 갓 졸업했을 나이의 어린 소녀치고는 당찬 다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무렵 6촌 형부인 최옥산이 병영에 왔다. 최옥산은 김창조의 직제자인데다가 산조는 물론 병창도 하고 단소·북·젓대, 묵화와 사군자도 치고 글씨도 잘 썼다. “최선생, 그 선생님이 가르칠 때는 죽도록 무섭게 가르쳐요. 산조 배울 때 고생 많이 했어요. 줄을 팽팽하게 매고 계속 퉁기면 손가락이 부어 올라요. 불에 데워 피어오른 버드나무의 거품으로 지져서 손가락이 돌처럼 딴딴해져야 경지에 이르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함씨는 국악의 백미로 꼽히는 가야금, 판소리, 가곡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렇게 쌓아올린 예인의 기량을 발휘할 곳이란 우선 ‘권번’이었다. 16세 되던 해에 목포권번에 이름을 올려놓고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였다. 미색에 소리와 춤까지 겸비하였으니 순식간에 사교계의 꽃이 되었다. 숱한 사내들이 가산을 탕진하며 그를 찾았다. 상답 한마지기에 50원 밖에 안할 때에 그의 한달 벌이가 3백원을 넘었으니 그의 인기는 알 많다. 게다가 회갑연이나 혼인축하연에까지 불려나가면 “임금 부럽지 않은 팔자”였다. 동정월(洞庭月)이란 예명도 중국의 동정호에 뜬 달처럼 예쁘다면서 머리를 얹어준 어느 한량이 이때 지어준 것이다. 그의 실력이 공인된 것은 19세 때의 일이다. 일본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광주의 콩쿠르대회에 나가 제일 어린 나이로 당당하게 1등의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 그해 가을에는 일본 동경에 가 50여일간 머무르며 가야금산조와 병창, <춘향가>, <심청가> 등 판소리, <육자배기>와 <흥타령> 등 12장의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이후 ‘광주권번’, ‘서울조선권번’으로 옮기면서 명월관, 국일관 등에서 그의 재능을 한껏 뽐내던 23세때, 20여세 연상의 어느 부자집 소실로 들어가면서 그의 예인생활은 끝이 나는 듯하였다. 된장 담그고 붓글씨 배우며 살다가 그 집안이 몰락하는 바람에 혼자몸이 되었다. 이때 그의 명성을 기억하는 이들의 주선으로 대전에 ‘국악예술원’을 설립하고 초대원장이 되었다. 가야금을 놓은지 17년만의 일이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가야금가락이 되살아났다. 함씨를 가야금 명인으로 거듭 나게 한 것은 명고수 김명환과의 만남이었다. 53세에 김고수를 만나 6년을 사는 동안, 명창에 명고수라 소리 궁합 하나는 천생연분이었다. 이때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절정기였다. 김명환과 헤어진 후로는 다시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1979년 KBS에 녹화를 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껏 고통을 받고 있다. 이따금 교통사고의 환상에 빠지면 지난날의 사내 배신자들이 떠오르고 그때마다 욕설과 분노가 표출된다. 그러나 그의 산조가락이 워낙 뛰어난지라 그는 1980년에 가야금산조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으며 그 후로 그의 뒤를 이으려는 제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국악고등학교의 윤미용(尹美容) 교장을 비롯하여 황병기(이화여대 교수), 나현숙(추계예대 강사), 성애순(전남대교수), 황병주(돈보스꼬예술학교교수), 김정자(서울대 교수), 이재숙(서울대 교수), 이경자(경북대 교수), 정회천(전북대 교수), 김상순(국악고교 교사), 김해숙(중앙대 강사) 등은 모두 함씨가 길러낸 이 시대의 가야금산조 주자들이다. 12세에 가야금산조에 입문한 이래 가시밭길 만큼이나 험난한 생애를 살아오면서 60여년을 오직 국악의 보존 전승에 바쳐온 함씨는 희수(喜壽)의 나이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창조-최옥산류의 산조를 대물림하기 위한 전수활동에 온힘을 다 쏟고 있다. 숱한 곡절이 각인된 인생역전 속에서도 그가 간직한 예술혼만은 제대로 평가받고 싶어하는 가야금의 달인(達人) 함동정월(咸洞庭月)씨. 그는 이렇게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예술인은 예술로써만 평가받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갖다 붙일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국악은 어디까지나 예술이지, 상품일 수는 없는거예요.”
연계정보
관련가치정보
연계정보
-산조
관련멀티미디어(전체0건)
이미지 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