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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농성 (본명:한귀례, 1934.1.24~2002.4.8)

예술가
한농성 (본명:한귀례, 1934.1.24~2002.4.8)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1. 흥보가 전수생 선발 2002.2.15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 인정 2002.4.8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 사망해제
학력(계보)
1948. 최막동에게 심청가 사사 1953. 강장원에게 수궁가 사사 1961. 박초월에게 수궁가 사사 박록주에게 흥보가 사사
생애(약력)
1972.~1981. 중앙국립창극단원 활동 1982.~1986. (사)한국판소리보존연구회 부이사장 및 판소리 강사 1983.~1985. 국악예술학교 강사 1985. 한농선판소리연구소 운영 1990.9.~1991.9. 중앙대학교 판소리 강사 1996. 전남대학교 판소리 강사
리뷰
재인-전통 예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9 구슬프면서도 힘찬 ‘섞어제’ 창출 한농선(韓弄仙, 58)씨는 8세 때 뛰어든 예인의 길을 50년째 걸어오고 있다. 가야금 명인, 영화 배우, 민요 가수, 가정 주부 등 그녀의 생애를 통해 팔자를 바꿀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한씨는 여류 명창의 길을 택했다. 영화 <홍살문>, <한>, <월하의 공동묘지>를 기억하는 팬들은 “바로 그 얼굴이었구나.” 하고 금방 되살릴 것이며, 1960년대 연속극 주제가 <공주며느리>, <후취댁>을 창으로 불렀던 ‘한농선’을 못 잊는 올드팬들도 적지 않다. “가정을 갖고 소리제를 지켜낸다는 것이 저로선 쉽지 않았습니다. 10년 동안의 결혼 생활과 명창의 길을 택일해야 하는 기로에 섰을 때 명창의 길을 선택했지요.”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귀어야 하는 예인이란 직업 탓에 필요 이상의 오해도 감수해야 했고, 급기야는 가정 불화로까지 비화돼 결국 남편(이씨)을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 여자로서의 한씨 일생은 이렇게 압축된다. 한씨의 출생지는 일본 동경이다. 가야금 명인이었던 아버지(韓成基)에게서 8세 때부터 줄풍류를 학습했다. 당시 한성기씨는 조선의 예술인들을 일본에 강제 이주시키는, 이른바 ‘내선일체’ 정책으로 동경에 살고 있었다. 김창조(金昌祚)씨한테 예술을 익혔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농성씨였지만 가야금을 배울 때만큼은 거침없이 매도 들 만큼 아버지가 엄했다고 떠올린다. 9세 때 목포 양동으로 이사하면서 한씨가 걸어야 할 예인의 길은 최초의 변혁을 맞는다. 목포극장에서 먼발치로 만난 당시의 신숙(愼淑)씨와 김소희(金素姬)씨가 그렇게 예쁘고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를 졸라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목포의 최막동(崔莫童)선생을 찾아가 춘향가와 심청가를 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1950.9)인 18세까지 가야금과 소리 공부를 함께 했습니다.” 미모의 한씨는 28세에 당대에 날리던 여류 명창 박녹주(朴綠珠, 1906~1978)씨를 만나면서 평생을 모녀같이 지내며 오늘의 인간문화재(5호, 판소리 보유자후보, 1982년 지정)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동안 박초월(朴初月)씨한테 <수궁가>를 배우고 김소희씨한테는 <심청가>와 <춘향가>를 이수 연마한 뒤였고 ‘이씨’와의 결혼으로 인생의 쓴맛 단맛도 겪고 난 뒤였다. 한씨가 잇고 있는 소리제는 송만갑(宋萬甲)-김정문(金正文)-박녹주로 내리닫는 동편제지만 강산제의 계면조(界面調, 슬프고 구성진 調格)를 가미하고 있어 ‘섞어제’란 표현이 적절하다는 주장이다. 박녹주씨에게서 박송희(朴松姬), 조순애(曺順愛)씨 등과 함께 소리 공부를 했다. 박녹주씨는 경북 선산 출신으로 가선(歌仙) 박기홍(朴基洪) 문하에서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를 이수하고, 다시 송만갑(심청가), 정정렬(丁貞烈, 춘향가), 김정문(흥부가) 명창의 소리제를 전수받은 걸물(傑物) 여류 명창. 김해 김녹주, 대구 박귀희(朴貴姬, 가야금 인간문화재)와 더불어 영남을 대표하는 3대 여류 명인으로 한 시대를 드날렸다. 늘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으며 꼬장꼬장한 성격에 한 번 가르쳐 준 법제와 더늠을 반복하지 않았고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광복 이후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1952년 국극사를 재건하여 창극 발전에 끼친 그의 공로는 찬연히 빛나고 있다. 한씨는 몸이 불편한 박씨를 안양 삼막사에 지게로 업고 가 백일 독공에도 들었고 한때는 목을 삐어(성대가 상함) 소리를 집어치우려 했던 적도 있다. 1960년대에는 한동안 방황을 하며 자칫 영화 배우, 민요 가수의 길로 전업할 뻔했다. 196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은 가수 이미자, 현미와의 공연 이후 한동안 번민에 휩싸였던 것이다. 아무리 명창이라고 배냇소리를 내질러야 알아주지도 않았고 쓰고 싶은 만큼 돈을 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학습해 온 한 국악인의 의지는 이렇게 해서 다시 한 번 꺾일 뻔했다. 그럴 때마다 한씨를 채찍하고 일깨운 건 ‘복날 개 패듯’ 두드려 대며 가르치던 아버지의 무서운 학습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 매가 오기로 솟구쳤고, 인간이 두 길을 가 봐야 별수없다는 자각이 엄습해 오더라는 것. 한농선(본명 귀례(貴禮))씨는 요즘 국악인으로서 평탄치 않았던 자신의 길을 정리하면서 후학 교육에 정열을 쏟고 있다. 서울 성동구 신당동의 ‘한농선판소리교습소’에는 한씨 법제를 이으려는 국악 지망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전수자로 강선희(姜仙姬), 김영서(金永瑞)씨가 창제 연마중이며, 임명이(林明伊, 가정 주부), 김영옥(金英玉, 부산대 강사)씨는 일반 이수자. 전수 장학생으로는 박선미(朴仙美, 중대 국악과), 김미정(金美貞, 단국대 국악과) 등을 양성해 내고 있다. 도건영(都建榮, 재수생), 정충식(政忠植, 고3), 이동운(李東雲, 고1) 등 10여 명의 남녀 학생들도 한씨를 어머니처럼 따르며 소리 학습을 하는데 온갖 시름을 놓아 버린다고 했다. 한씨가 못 잊는 공연은 1950년대말 원각사 개관 공연. 박귀희(이도령), 박초월(춘향모), 김경희(방자, 김소희씨 동생)씨 등 기라성 같은 선배 틈에서 춘향 역을 맡았던 감격 때문이다. 대선배였지만 오라버니처럼 따르며 호흡이 잘 맞던 고수 김득수(金得洙, 작고)선생은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찡해온다. 최근에 와 비로소 제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국악인의 위상이 먼저 간 분들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밀려오기 때문이다. “글쎄, 작년에도 혼인말이 들어왔어요. 내 나이 쉰 일곱인데 기가 막힙니다. 꿈에조차 생각 안해 흘려보내긴 했지만 이 설움 저 생각에 착잡했었습니다.” 최근 한씨는 중앙대(국악과)와 국악고등학교에 나가 후진들을 위해 강의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한 시대를 멸시받고 천대받으며 명맥 이어온 국악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까지 바뀌고 있나를 확인하며 사제간이 모두 놀란다는 것이다. 한씨는 제자들을 대하면서 스승 박녹주선생의 당부를 그대로 전해 준다. “소리가 뭔지 알 만할 때 재량껏 목은 넣을 수 있으나 골격은 변형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박, 한소리제 전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무자무녀의 신세지만 아무런 미련도 없다. 예인으로 천추 만대 명성을 남겨야겠다는 욕심뿐 잡다한 인간사엔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응수한다. 다만 자신이 젊어질 수 있다면 세상이 떠들썩한 사랑을 단 한번 해 보고 싶다고 했다. 가슴의 생채기가 아무리 깊이 파여도…… <세계일보>, 이규원,1990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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