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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본명:김순옥, 1917.12.1~1995.4.18)

예술가
김소희 (본명:김순옥, 1917.12.1~1995.4.18)
출생지
전라북도 고창군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64.12.24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보유자 인정 1965.4.18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보유자 사망해제
리뷰
재인-전통 예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39 예인 외길 60여년, 국악계 마지막 자존심 1979년 5월 전북 고창 청년회의소는 이 고장 출신 여류 명창 ‘만정(晩汀) 김소희여사 명창 기념비’를 그의 고향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 세웠다. 김소희씨는 인물 많기로 유명한 고창에서 이곳 사람들이 선뜻 내세우는 ‘자존심’ 중의 하나. 고창 출신 미당 서정주 시인은 명창 기념비 뒷면에 다음과 같이 읊어 새겼다. 만정 그대의 노래 소리에는 고창 흥덕의 옛날 못물에 몇 만 년 이어 핀 연꽃이 들어 있도다. 학같이 훤출하고 거북이처럼 질기던 이 겨레의 바른 숨결이 잠겨 있도다……. 만정은 김소희(金素姬, 1917년 10월 17일생)씨의 아호. 국악계에선 ‘만정 선생’으로 통한다. 5척 단구의 여자 몸이지만 그만큼 처신이 당당하고 매사를 맺고 끊는 맛이 분명하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소리꾼으로 인간문화재(제5호, 1964년 1월)로 지정되었다. 유명세도 높아 그녀의 일생에 관한 부분도 웬만한 사람은 알만큼 알고 있다. 그러나 국악계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통하는 만정의 가슴 속 쇳덩이 같은 응어리는 아직도 녹을 줄 모르고 오히려 커가고 있다. 소리를 한답시고 배움을 뒤로 미뤄 놓은 평생의 철부지 회한, 여자의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대중 인기인의 길, 창은 ‘상것’들이나 하는 소리로 알며 하시당하고 살아 온 세월……. 이 모든 것들이 예인의 길에 새로 입문하려는 후학들에겐 금과옥조 같은 스승의 가르침으로 남는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평범한 아낙으로 요조숙녀의 길을 가지, 가시밭길 같은 국악인의 길은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50여 평 대지의 2층 한옥이 김씨의 집이다. 평생 모은 재산을 국악계에 희사한다는 ‘낭보’에 접할 때마다 김씨의 가슴은 뜨끔하다고 했다. 재복이 안 따라서인지 자신은 60여 년의 국악 일생에 남은 거라곤 집 한채 뿐이기 때문이다. 광주고등보통학교 시절(13세) 당대 여류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소리를 가설 무대서 듣고 공부를 작파해 버린 김씨는 광주에 내려와 소리를 가르치던 동편제 소리 대가 송만갑(宋萬甲) 선생 문하에 들어가 <심청가>를 전수받으며 평생 명창의 길에 들어선다. 고창은 창악계 여류 명창의 비조(鼻祖)로 꼽히는 진채선(陳彩仙, 동리 신재효 제자), 허금파(許錦波, 1920년 원각사 시절 월매 역)를 배출시킨 곳이다. 김씨 또한 전라도 풍류 대가였던 부친(피리·단소의 대가)의 ‘끼’를 받아 언뜻 듣기만 해도 훌륭히 모창해 냈다. 6개월 학습 결과는 ‘남원명창대회’(14세) 1등으로 나타났다. 그 때 특상은 군산의 나이 많은 손채옥(孫菜玉), 2등은 이름도 낯익은 신숙씨였다. 이후 전주의 정성린(鄭成麟)씨를 찾아가 <승무>, <살풀이>를 배운 뒤(14세) 이듬해 겨울 ‘영신환’ 가방 하나 들고 상경 길에 오른다. 당시 연극 배우였던 복혜숙(卜惠淑, 작고)씨와 친구였던 이모 김남수(金南洙)씨가 명고수, 명무 한성준(韓成俊)씨를 소개해 주며 ‘오늘의 김소희’로 일어서게 된다. 김씨 눈을 보며 “사목(뱀눈)이라 재주 있겠구먼.”하던 감격과 충격을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이 때부터 조선성악연구회를 드나들며 창악계를 주름잡던 송만갑, 정정렬(丁貞烈, 춘향가) 선생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만난 인연치고 스승 복이 많다고 지금껏 자랑하고 있다. 이 때 이모는 아명 옥희(玉姬), 호적명 순옥(順玉)을 버리고 ‘소희’라 지어 주며 “기왕 들어선 길, 오기로 버텨 내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22세에는 명창 박동실(朴東實, 납북)씨를 화순 동복으로 찾아가 수궁가와 적벽가를 보탠 이후 김계문(金桂文, 향제 가곡), 유순석(양금), 이승환(거문고), 강태홍(姜太弘)·김윤덕(金允德, 가야금)씨 등 그야말로 스승 복이 줄줄이 이어진다. 김씨가 아껴 사용하는 아호 만정(晩汀)은 19세 때 김종익(金種益, 우석대 설립자)선생이 즐겨 찾던 ‘관상장이’한테 부탁해 지어 준 것이다. 그때 관상장이는 “싫으나 좋으나 80까지는 소리를 해야 되겠다.”고 ‘악담’을 했다며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한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의 춘향가 취입, 빅터·오케이 레코드 양사의 김소희 쟁탈전, 쌀 한 가마 3원 50전할 때 2백원씩 받던 월급, 창극단 조선 창극좌에서 민족의식 고취시킨다며 왜경에게 쫓기고 유치장에서 밤새우던 일 등이 해방 전 교차된 만정의 영욕이다. 여성국악동호회(이사장 박녹주) 해님달님의 인기, 혈육보다 더 애정이 진한 박귀희(朴貴姬, 가야금 병창)와 피난 시절 부산에서 하던 식당, 국악예술고등학교 전신인 민속예술학원 설립, 대만과 공산권만 빼놓고 거의 다닌 세계 순회 공연, 그의 후반의 일생은 이렇게 요약된다. <심청가> 5장 전집, <춘향가> 6장 전집 취입, ‘국민훈장 동백장’(1973),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음악 부문상’(1984) 수상 등의 행적이 빛나건만 사는 게 고달프고 여인의 길이 서러워 수차례 죽을 결심도 굳혔었다고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우전 신호열(雨田 辛鎬烈)선생한테 배운 안진경(顔眞卿) 체로 1967~1970년 내리 3년을 국전 서예에 입선했다. 병든 어머니를 입원시키고 아들 교복 사줄 돈이 없어 가락지 빼어 팔 때 만정은 붓을 들어 고약한 팔자에 대한 분노를 삭였다고 했다. 붓끝에 떨어지는 묵정(墨精)의 흔적 속에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체휼하고 삼계(三界)잡념을 떨쳐 버린단다. 최근엔 월하(月荷, 여창 가곡)의 권유로 3년 전 입교했던 원불교에 새삼 애착을 갖고 있다. 이렇게 살아 온 만정의 예술속은 장영찬(張永瓚, 명창, 장판개의 아들)·안향연·김동애(이상 작고)씨와 딸 박윤초(朴倫初, 판소리·기악·춤)씨를 비롯 성창순(成昌順, 인간문화재 제5호)·남해성(南海星, 준문화재)·박양덕(朴良德, 국악인 김무길씨 부인)·신영희(申英姬, 조교)·유수정(劉秀正, 국립창극단)·한정하(韓正廈, 전수생)·이명희(李明姬, 1990년 전주대사습 대통령상)씨 등이 잇고 있다. 주부로는 박정숙(朴貞淑)·한인환(韓仁煥)·김경애(金敬愛)씨 등이 마음이 가고, 민속예술학원, 국악고 등을 통해 그녀의 창맥을 잇는 제자는 1000명도 족히 넘는다. 가성을 안 쓰며 상·중·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아직도 정동편(正東便) 소리를 한배 채워 부르는 김소희 여사. 그런 그녀가 살풀이 덧뵈기춤(즉흥춤)을 출 때는 소리꾼인지 춤꾼인지 구별 못 한다는 전문가들의 탄성이다.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때 ‘떠나가는 배’의 뒤풀이 소리로 세계를 숙연케 하고 전율시켰던 김소희. 그에게 첫 결혼은 언제 했느냐고 물으니 “그런 건 왜 묻느냐.”고 정색을 했다. <세계일보>, 이규원, 1991년 5월 22일 국창의 맥이어 김소희바디 이룩 춤과 가야금·서예에서도 일가견 만정 김소희 여사, 그는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순옥이며, 14세의 어린 나이로 남경명창대회에 나갈 때부터 옥희라는 예명을 써오다가 서울로 올라온 이후 소희라는 지금의 예명으로 써오고 있다. 만정이라는 호는 그를 당대의 관상가가 소리로 대성하여 국창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하면서 지어준 것이다. 그는 1907년 12월 1일 전북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서 부친 김상호씨와 모친 김정수씨 사이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여덟 살에 흥덕보통학교에 들어가 열두 살에 졸업한 그는 전남 광주에 사는 언니 집에서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이 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언니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 어느 날 포장으로 가설극장이 설치되더니 그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화중선의 심청가 중 추월만강대목인데 그렇게 처량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그 소리에 매료되어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설극장 뒤에서 포장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배우고 집에 돌아와서는 복습 겸 흥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형부가 그 때 마침 광주에 와 있던 송만갑씨에게 소개했다. 그의 소리를 들은 송씨는 '천성이 소리꾼으로 태어났다'며 그의 문하생으로 받아주었다. 그에게 판소리를 깨쳐준 사람이 이화중선이라면 그에게 판소리의 첫길을 잡아준 사람은 송만갑인 셈이다. 송만갑의 문하생들은 그 당시 5원의 월사금을 내고 있었는데 그는 1원만을 내고 공부하였다. 말하자면 장학생으로 특별 취급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반년 남짓 소리공부를 했을 때에 남원에서 열녀각 준공기념으로 춘향제가 열리고 김해서 명창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그는 송만갑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던 여러 명과 함께 이 명창대회에 나가 당당히 일등을 했다.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장원을 땄다해서 애기 명창이라고들 했다. 송만갑을 찾아온 이화중선이 이곳에서 애기명창을 소개받고 그를 남원으로 데려간 춘향전의 이도령 역을 맡겼다. 이때 광주를 비롯하여 목포, 보성, 벌교 순천을 거쳐 부산 등지에까지 순회공연을 다녔다. 애기 명창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입 초에 3원(당시 쌀 1가마가 1원50전)이던 보수가 한달 후에는 5원, 3개월 후에는 7원으로 껑충 뛰었다. 열 네 살의 어린 나이에 전국에서 모여든 8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남원명창대회에서 당당 l등을 하고, 이화중선 일행을 따라다니며 명성을 떨쳤던 그는 광주여자보통학교를 2년 중퇴하고 소리와 춤을 연마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먼저 전주에서 승무와 검무, 남무받이의 춤을 익히고 열 여섯 살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그 당시 국악계의 대부격인 한성준에게 발탁되었다. 한성준은 북의 대가이며 살풀이, 승무, 학춤 등 우리 민속춤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으로 방송, 레코드, 무대 등에 사람을 알선해 주는 요즈음말로 국악계의 매니저 격이었다. 그 해에 어린 소희는 한성준의 추천으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프로 중 가장 인기 있던 국악프로에 출연하여 30분 생방송을 무사히 치러 서울 국악계에 혜성처럼 데뷔했으며 이어 그해 가을 일본에 건너가서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춘향가와 심청가를 취입하였다. 열일곱 되던 해에는 다시 국창 정정열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 수업을 계속하는 한편 김종기로부터 가야금과 거문고를 수업하는 등 춤·기악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였으며 이해에 다시 일본에 건너가 OK레코드사에서 진도아리랑·뱃노래·춘향가 등을 취입했다. 여러 선생으로부터 소리와 춤 그리고 기악을 마친 그는 열아홉 되던 해에 빅터레코드사에 전속되어 정정열, 임방울, 이화중선, 박녹주 등과 분창형식으로 춘향 역을 맡아 한국 최초로 완창을 취입한 것을 비롯, 심청가·수궁가·적벽가·흥보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취입했으며 그 해에 조선성악연구회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는 창극운동의 전개와 후진양성이라는 2대 목표를 갖고 출범한 단체였다. 산하에 창극단을 조직해서 춘향전을 비롯하여 심청전·숙영낭자전·배비장전·흥보전 등을 갖고 경향각지를 순회공연 하였으며 멀리 만주에까지 공연하여 국악의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국이 해방되자 조선성악연구회 맴버들을 주축으로 국악원을 창설하여 다시 국악의 보급에 힘쓰는 한편 박귀희씨와 함께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햇님달님을 공연,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하였다. 6·25동란으로 한때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다가 환도하여 국악계의 후진양성을 위하여 학원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는 낙원동의 집을 처분하고 패물까지 팔아 돈암동에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에 취임하였다. 김여사의 국악공연은 1962년부터 해외로 뻗어 나갔다. 1962년 5월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국제민속예술제의 한국대표단원으로 참석하고 귀로에 이태리·터키·그리스·인도·이란 등을 2개월간 순회 공연한 것을 비롯하여 1964년에는 미국 30개 주의 28개 대학을 4개월간 순회공연하고 동경올림픽 때에는 일본각지를 순회 공연하였으며 다시 미국의 18개주 35개 대학과 카네기홀에서 순회공연을 갖는 등 아홉 차례의 해외공연을 가져 만방에 우리 전통예술의 우수성을 선양하기도 하였다. 김여사는 판소리는 물론 가야금과 거문고, 승무와 검무 등 민속춤에도 정통하지만 서예에도 능하여 국전에 세 번이나 입선할 정도로 일가를 이루고 있다. 그 동안 김소희여사는 송만갑과 정정열 등 당대 국창들의 맥을 이어받아 ‘김소희 바디’를 이룩한 공로로 1964년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김여사는 그의 재능을 전수하기 위하여 김소희창악전수소를 설립 운영하는 한편 이화여대와 한양대의 강사로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왔으며 지금도 중앙대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金여사는 국악의 보급 선양과 국악교육의 진흥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을 비롯하여 대한민국문화 예술상·문화예술대상·문화예술진흥공로상·한국국악대상 등 수많은 상을 타기도 하였으며 유네스코 주최 제2회 아세아음악제 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김여사는 성창순, 오정숙, 안숙선 등 백여 명의 후진들을 양성하였지만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서울 종로구 그의 집에서 후진양성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판소리를 전공하는 젊은 유망주를 발굴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 후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소리를 잘한다고 훌륭한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됨됨이가 우선 되야지요.” - 이제 소망이 있다면 무어냐고 물었더니. “판소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고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기를 바랄 뿐”이라면서, 외국공연에서는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고 있는 판소리가 정작 제 나라에서는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려는 기자에게 김여사는 하고픈 말이 있다며 “정부도 인간문화재나 전수자들이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생계보조비나 장려금을 대폭 인상해주고, 국위를 선양한 체육인에게 연금을 지급하듯이 국악인에게도 연금제도를 마련하여 국악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월간 문화재>, 1990년 4월,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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