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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극의 비약적 발전의 시기: 1987년~1992년

작품명
마당극의 비약적 발전의 시기: 1987년~1992년
구분
1987년~1992년
개요
장 두레’는 농촌문제와 노동문제를 다룬 <황소울음>, <월급도둑> 등을 발표하면서 지역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 시기의 활발한 공연활동에 비해 기성연극계 안의 극장공간에서의 공연은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이미 마당극의 중심적 활동의 중심이 마당극다운 마당극이 가능한 노동현장과 농촌현장, 혹은 지역의 활동공간으로 옮겨졌고, 극장 공간에서의 공연은 민족극 계열 마당극의 고정 관객을 위한 배려로 이루어지는 짧은 기간의 공연과, 이들 공연의 공식화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전국적인 연극제 <민족극한마당>(1988년 이래 매해 계속되었다)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1985년 이후 ‘연우무대’가 마당극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성연극계의 중심지라 할 만한 서울 동숭동 극장가에서의 마당극을 공연할 수 있는 민족극 계열 집단은 극단 ‘아리랑’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갑오세 가보세>, <불감증>, <점아 점아 콩점아>, <격정만리>로 이어지는 양식혼합적 작품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기성연극계의 공간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민족극 계열의 마당극은, 노동현장과 농민현장을 중심으로 한 마당극다운 마당극을 발전시키고 기존의 연극시장 이외의 유통구조를 확보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마당극의 성과를 기성연극계와 공유하고 상호영향을 주고받을 기회를 만들지 못했고, 기존 연극시장 바깥의 현장중심적인 유통 방식이 취약해지는 시기에 이러한 성과를 지속시킬 수 없었다는 문제점을 남겼다. 한편 이 시기의 고조된 마당극의 성과는, 1989년 말부터 대규모의 총체공연물인 ‘노래판굿’을 가능하게 하였다. <꽃다지>라는 이름으로 1989년 말부터 1995년까지 매해 한두 차례씩 공연된 이 대형총체공연물은, 관중 집단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진행된다는 점에서 마당극과 그 기본원리를 공유하되 연극적 장면뿐 아니라 노래와 춤, 풍물 등이 편집되듯 구성된 작품이다. 공연의 규모는 대학의 노천극장이나 대강당에서, 실내 공연의 경우는 회당 1천 내지 3천명, 야외 공연의 경우는 5천에서 1만명 정도의 관중을 놓고 진행될 정도로 매우 큰 규모이다. 또한 이 시기는 1970년대 말부터 시도되었던 비전문인들에 대한 연극교육 내지는 교육연극 지도가 활발하게 진행된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연극교육은, 정돈된 교안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였고, 전문창작과의 상호관련성이 제시됨으로써 예술발전에 있어서의 의의가 강조되기도 하였다. 연극계 내의 마당극은, 1980년대 말에도 여전히 MBC 마당놀이가(김시라 작·연출의 <품바>를 제외한다면) 그 정통의 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마당극은 관중 집단과 대화를 나누듯 하는 연기 방법과 장면 조직 등에서 다른 연극에 스며들듯 영향을 주었다. 극단 ‘미추’를 창단함으로써 ‘민예’로부터 독립한 손진책은 한편으로 매해 마당놀이를 계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당극 양식이 아닌 다른 작품에서 마당극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는 질감을 창출해 내었다. 또한 1990년 이후부터는, 서양 번역극투의 연기법과는 다른, 1980년대 ‘연우무대’와 ‘아리랑’ 등에서 시도했던 한국 보통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질감을 지닌 연기가 크게 확산되었으며, 희극이나 희극적 장면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마당극이 지닌 한국적 질감의 희극적 장면과 그 연기법 등이 다른 연극에 영향을 주었다. - 이영미(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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