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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재성 (1919.6.13~)

예술가명
여재성 (1919.6.13~)
구분
전통연극
문화재관련정보
1970.7.18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사자놀음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22.3. 여권숙에게 북, 징, 사자춤 사사
생애(약력)
1961.~1983. 전국민속경연대회 참가 1968.10. 제9회 전국민속경연대회 개인상 수상 1985.5. 공로패 수상 1986.10. 제27회 전국민속경연대회 개인상 수상 1991.10.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우수상 수상 1992.9. 통일원장관 도민유공자 표창장 수여 1993.10. 제34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우수상 수상
리뷰
재인-전통 예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23 사자탈 쓸 때마다 실향의 한 솟구쳐 우수경칩에 대동강이 풀리고 정든님 말씀에 요내가슴 풀린다 에-에- 해는요 오늘보면 내일도 보는 것 임자는 오늘보면 언제나 볼까 에-에- 태산에 붙는 불은 만백성이나 끄고 요내가슴에 붙는 불은 어느누가 끌꼬 에-에- 중모리로 넘어가는 북청사자놀음의 ‘애원성’은 특히 고향을 북에 두고 온 실향민들의 가슴을 뒤흔든다. 낯익은 얼굴들에 듣던 목소리 그대로지만 지금 그곳은 마음대로 넘나들 수 없는 곳이다. 해가 바뀌거나 정월 대보름 등 큰 명절이 닥치면 이들의 마음은 더욱 처연해지고 만다. 여재성(呂在成72)옹은 북청사자놀음의 음악 중 기본 악기인 북징퉁소를 번갈아 두드리고 불어대며 어렸을 적 고향(함경남도 북청군 성대면 양평리)의 8촌 형(여권숙)한테 배운 그 장단 그 가락을 빠짐없이 재현해 낸다. “14후퇴 때 남하하여 풍로 장수, 함석쟁이를 거쳐 인간문화재까지 지정되었습니다만 생각하면 기가 맥히오. 어려서 눈여겨 익혀 둔 동네놀음이 민속보존 차원이 될 줄도 몰랐고 사자탈을 뒤집어 쓸 때마다 왠지 더욱 한스럽소.” 여옹은 날이 갈수록 구수한 함경도 사투리의 억양에 친근감이 더해지며 모였다하면 불붙듯 일어나던 북청인들의 기질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예로부터 북청 고을은 정배지여서 유배 온 ‘똑똑한 사람’들과 교유했고 그들의 영향을 크게 받아 왔다는 것. 헤이그 밀사 사건의 이준 열사는 속후면 출생이다. 북청에서는 동네마다 사자놀이를 해 왔고 정월대보름이면 한 곳에 모여 경연을 가졌는데 이것이 유명한 정초놀이이다. 백수의 왕인 사자는 사악한 것을 능히 물리치는 잡귀를 쫓을 수 있다고 믿어, 안녕과 태평을 비는 잔치로 변해 버렸다. 여옹은 14때부터 8촌 형인 여권숙(呂權淑)씨한테 퉁소북징 등 놀이 음악과, 앞뒤채 사자 역을 배워 뒀다. 이 때 연상의 조카인 병룡(秉龍, 양반역)씨와 병필(秉珌, 종손, 뒷사자)도 같이 배우며 서로 역을 바꿔 가르쳐 주기도 했다. 당시 북청에서는 마을 대항은 물론 씨족간 경쟁도 심해 “어느 성씨네 사자가 좋다니 구경가자.”해서 자기 마을 내 집안 것이 그만 못하면 그 후 그 사자는 여지없이 죽어 버렸다고 한다. 명절 때마다 사자놀이로 흥겨워했던 여옹은 뼛심드는 농사일을 걷어치우고 북간도, 만주 등을 유랑했다. 일인들의 토목 공사장과 함경도 공장 지대를 다니며 발동기도 만지고 삼수갑산에서 과일행상도 했지만 명절에는 꼭 돌아와 사자놀음에 끼었다고 한다. 그의 기구한 팔자는 625로 다시 한 번 뒤집어진다. 14후퇴 때 함흥에서 철수선을 탄 이후 40년. 부산에서는 ‘만년풍로’를 만들어 생계를 연명했고 1954년 서울에 와서는 ‘함남철공소’를 차려 중앙대의 함석일을 도맡으며 살았다. “인간사 누구도 장담 못 한다고 만주 유랑 시절 배워 둔 기계일이 직업으로 굳어졌고 집안 내력이어서 몸에 익힌 사자놀음으로 ‘대우’까지 받으며 삽니다. 그러나 북청사자놀이만은 어렸을 때 보고 배운 그대로 보존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여옹의 기능은 12명이 이어가고 있다. 이들 중 동선백(董善白35, 회사원)선봉(善奉33, 악사)씨는 형제간이며 이수자다. 거의 북청인 2세들이며 동영범(董英範33), 고장욱(高將旭25), 전경욱(田京旭25), 어용준(魚龍俊23)씨도 물론 북청이 고향이다. 정명한, 최홍길씨는 남쪽 출신. 서울 동작구 흑석1동의 한 삼간모옥에서 25년째 살고 있는 여씨는 부인 유송승(66)씨와 함께 피난오게 된 걸 더없이 다행으로 여긴다. 북청군 하거서면 맹경재 출신인 유씨는 어려서 부터 보아 온 북청사자놀이 중 넋두리춤의 기능이 인정돼 중요무형문화재 15호 이수자(1989)로 지정되었다. 여씨는 1956년 함경도민회 강윤성 사무국장 권유로 함석일을 하며 사자탈을 다시 쓴 후 제9회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1968) 사자부문 개인상, 제27회(1986) 음악부문(북) 개인상을 타 사자놀이 중 사자 앞뒤채와 음악에 능함을 인정받았다. “저는 크게 배운 학문도 없고 해서 고향 북청에서 놀던 그대로를 기억해 내고 재현할 따름이지 변형 같은 건 생각도 못 합니다. 지난 12월 북한 민속예술단이 와 공연한 것 중 악기음악 형태의 변형 얘기를 듣고 만감이 교차했지요. 옛산 옛모습 그대로여서 고향이 좋다는 건데 정나미가 뚝 떨어집니다.” 북청사자놀음은 퉁소북징의 반주와 애원성을 맞춰 ‘애원성’ 춤을 추며 마당놀이 하인인 꼭쇠가 양반을 끌고 나오며 시작된다. 사자춤 중 사자가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다가 기진하여 쓰러지면 양반이 대사를 불러 독경을 하고 의원이 침을 놓아 소생시킨다. 사자가 소생하면 신이 나서 좌중과 한데 어우러지고 호주머니를 털어 흥을 돋운다. 특히 꼭쇠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지며 사자춤 사위와 함께 교묘하고 힘찬 동작으로 구경꾼의 마음을 뒤흔든다. 음악은 초장을 4분의 4박자로 시작해 말장으로 넘겨 중모리로 엇받아 넘기는 애원성이 못다 푼 인생의 매듭을 담아 한을 녹여 낸다. 사단법인 함남북청민속예술보존회 단체장을 맡아 사자털과 가면을 제대로 만들어 내기 위해 부심하고 있는 여옹은 “그게 쉽지 않다.”고 한다. 원래 사자털은 북청 야생 삼을 1년 동안 비 맞혀 도리깨로 곤죽을 되게 내려 팬 후 청홍흑적황 등 오색으로 물들여 사용해 왔다는 것. 일본에 두 차례(1986, 1989)가 한중일 사자놀이를 겨뤄 보았지만 북청사자놀이가 기교와 음악면에서도 단연 앞서 있다면서 양반과 하인인 꼭쇠가 대등하게 나서는 평등성 등은 북청인 기질을 반영한 것임을 다시 한번 내세운다. 2남 2녀를 두었지만 놀이란 제 신명에 겨워야 배울 수 있는 법이라며 제 갈길 가는 것을 탓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계일보>, 이규원, 1991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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