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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구경가자

작품/자료명
동물원 구경가자
초연장소
삼일로 창고극장
작/연출
유진규 / 김재연
장르구분
마임
출연
유진규
내용
1. 동물이름 알아 맞추기 놀이 2. 동물원 3. 나와서 함께 걷자 스웨덴의 劇作家 을로프·하르트만은 自己作品이 非合理的인 構造로 짜여진 것에 대하여 질문을 받고 現代의 時代的 특징을 들어 설명하였다. "現代의 劇作家는 예언자와 같다. 예언적 음성은 예술의 옷을 입지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합리적인 구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默示時代는 觀客에게는 예술적으로 녹슬지 않는 바람과 요구가 있다. 비록 그들이 상징을 외면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의식속에는 그것이 타고 있다. 마치 이사야가 이스라엘인들을 향하여 했던 것처럼 표현형식을 파괴하거나 언어를 깨는 일이 이 時代에 합당한 일인지도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유진규의 무언극공연 <동물원 구경가자>(유진규 作·김재연 演出)를 보고 필자는 歷史속에 간간히 자신들의 미약한 몸짓이나마 흔적을 남겨 두었던 無言劇 演技者들을 생각했다. 그 무언극 연기자들의 몸짓은 때로는 확대되고 때로는 위축당하면서 歷史의 그늘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것은 그 歷史를 사는 많은 서민들의 典型이기도 했다. 할레퀀이나 크라운, 콜럼바인, 판타룬, 삐에로 등은 희랍시대에 아테네의 거리를 활보하면서 神의 使者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면서 신화와 역사 속에서 무한히 자유를 누리면서 人間的 몸짓을 구사했다. 中世의 무거운 몸짓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포장마차에 휴머니즘을 싣고 프로렌스나 나폴리의 골목으로 돌아다니며 소멸되어 가는 人間性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두운 中世의 골목으로 휴머니즘을 싣고 다니던 그들은 르네상스의 원동력 구실을 하였다. 유진규는 연극의 <現性 회복>과 언어 조명 무대장치 분장 소도구 등을 거부하고 人間의 <肉만으로의 연극>, 행위자와 보는자가 현장에서의 <우연성과 우발성의 교류>이 세 개의 명제를 내걸고 세 개의 小品을 公作했다. <동물이름 알아맞추기 놀이>와 <동물원>, <나와서 함께 걷자> 등이다. <동물이름 알아맞추기>에서는 행위자와 보는 자의 필연성을 거부한 우연성과 우발성에 의한 교류를 의도했고, <동물원>에서는 人間의 肉體만으로의 표현을, 그리고 <나와서 함께 걷자>에서는 연기자의 노력에 의해 現 에 모인 관객의 상상력에 활력소를 넣는 작업을 의도했다. 이 세 개의 小品이 동시에 갖고 있는 특징은 그 상황이 갇혀진 곳이라는 점이다. <동물원>도 갇혀 있는 곳이고 <동물이름 알아맞추기>도 조그만 극장이라는 공간 속에 행위자와 보는자가 갇혀 있다. 그뿐 아니라 <나와서 함께 걷자>에서도 연기자가 걷는 공간은 그가 행위하기에는 너무나 좁고 왜소한 곳이었다. 세 개의 小品中 <나와서 함께 걷자>는 이번에 발표한 作品中 우리 無言劇 장래를 위해 몇 가지 점에서 문제를 제시한 것이었다. ……중략…… 유진규는 1977年에 公演한 무언극중 <억울한 도둑>에서 예리한 관찰력과 성실한 훈련을 통해 관객에게 웃음을 던져 주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단순한 웃음일 뿐 조용한 의미있는 諧謔美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했다. <억울한 도둑>이 해학으로까지 가지 못한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가 표현하려고 한 것이 억울한 도둑의 이야기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유진규의 肉體言語은 約束(Sign)의 세계에서 象微(Symbol)의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가지의 조건을 서로 분리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문제의 여지가 있다. <동물원 구경가자>에서 유진규는 이 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그는 <동물이름 알아 맞추기>나 <나와서 함께 걷자> 등의 作品을 보여 주었다. 철장 속에 갇힌 사자나 곰 그리고 독수리의 안타까운 몸짓을 통해 現代人이 처한 정신적 상황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에서 멈추고 말았다. 왜냐하면 유진규의 몸짓 언어는 아직 동물의 흉내내기에 멈춰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自然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유진규의 이 자연을 극복하려고 하는 안타까운 노력은 <나와서 함께 걷자>는 作品속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가 발표한 어떠한 작품 보다도 의식을 부여하여 상징성을 내포하려고 한 이 작품은 무언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요소적 요소가 많았다. 바위에 결박된 새, 꽁꽁 묶인 사람, 손수건위의 미꾸라지, 깨어진 계란등은 인간의 육체가 주제인 무언극에서 그 외적인 요소에서 더 많은 것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결과를 낳았다. 그 같은 사실적(자연적) 보조 수단이 없어도 의식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유진규는 무언극 배우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현대는 默示시대이다. 현대인에게는 예술에 대한 기대가 있다. 무언극은 이방의 언어와 생소한 입술로 우리에게 말을 한다.관객은 무언극 속에서 새로운 소리와 멜로디를 요구한다. 유진규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현대인들의 그 같은 바람 때문이다.
유진규 (1952 ~ )
현 연극배우, 마임의집 대표, 한국마임협의회 회장 1969년 세계적인 마임배우 롤프 샤레의 공연을 처음 접한 후, 건국대 수의학과에 입학, 연극부에 빠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본격적으로 연극판에 뛰어들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나섰다. 전위극단 ‘에저또’에서 연극에 입문하여 마임을 배웠다. 그 후 홀로 독학하고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 나름대로의 마임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1972년 <첫 야행>을 시작으로 하여 1976년 <유진규 무언극> 공연에서 비로소 그는 극본과 연출, 연기 모두를 자기가 소화해내는 독립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한국 마임의 틀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서울에서 몇몇 마임하는 친구들과 함께 열었던 제1회 `89 한국마임페스티벌을 시작으로 지금의 춘천국제마임축제는 국내 유일의 마임축제로서 마임을 국내외에 알리는 활로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대표작품 <첫야행>(1972), <아름다운 사람>(1979), <사람>(1988), <머리카락>(1989), <허재비굿>
리뷰
우리는 끊임없이 남과 같아지려 한다. 그런가하면 끊임없이 남과 달라지려는 욕구를 발견하곤 한다, 이 이율배반적인 두 가지 욕구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유진규의 경우는 후자의 욕구가 대단히 강한 편이다. 그는 아주 일찌감치 이 욕구에 눈떴고 지금까지도 줄곧 그 욕구의 연장선상을 달리고 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리반 미화부장이었던 저는 대청소를 마친 후 혼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이 검사를 하러 오셨죠. 그런데 한 선생님이 교실 뒤에 붙여 놓은 그림 중에 제 그림을 가리키며 '애 그림을 보세요. 애는 남들이 그린 것처럼 그림을 안그려요. 그림을 이렇게 그려야 하는데요' 하시는 것이었어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제 귀에 들어와 박혔던 것 같아요." 유진규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이 때의 상황은 그의 남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그 때부터 '남과 다르게 사는 것이 사는 거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가 선택한 마임, 무언극이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쉬게 이해 할 수 있다. 유진규는 마임을 전위연극·실험연극의 한 형태로 시작했다. 70년대 초 그는 당시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라 할 수 있는 극단인 에저또에 들어가 연극을 시작했고 1972년 <억울한 도둑>으로 첫마임 무대에 섰다. 연극에서 마임으로 돌아선 이유도 물론 그의 '남다른' 욕구 때문이었다. 연극이란 역시 단체예술이어서 앙상블을 중시하며 조직적이고 개인의 표현 영역이 적었다. 그래서 재미가 없었다. 반대로 마임이란 완전히 혼자 몸으로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대단히 흥미로운 장르였다. "내 나름대로 내 식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그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그는 이 꿈을 위해 그의 또 다른 오랜 한 가지를 포기해야만 했다. 어려서부터 바라던 수의사의 꿈을. 어려서 창경원 앞에 살았던 그에게 창경원은 놀이터였고 그는 자연스럽게 동물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물들을 돌봐주는 수의사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그의 꿈대로 그는 건국대 수의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학이란 사회는 그리 재미있지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또하나의 유혹이었던 연극반에 들어갔다. 천성이 두 가지를 못하는 성격인 그는 연극에 빠져들면서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극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임이라는 장르를 붙들면서 그는 마임의 선두자가 되었다. 그의 마임을 애기할 때 '서양마임의 첫 세대'로 규정하는 것은 우리 전통연희에도 마임의 전통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전통을 찾아보게 되는 판토마임, 광대와 삐에로, 분칠한 배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무언극· 흔히 우리가 판토마임 하면 떠올리게 되는 마임· 유진규도 물론 처음에는 그와 비슷한 판토마임으로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그의 마임이 이제 20주년을 맞게 되었고 한국마임 20주년 기념행사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르셀 마르소 류의 스타일 마임이 체질에 안 맞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는 서양의 전통마임을 배운 것이 아니고 말없는 세계, 몸짓으로 심리 상태나 상황을 묘사할 수 있는 독특한 연극의 세계가 그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그는 자기 나름의 무언극 세계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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