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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별산대놀이

작품/자료명
양주별산대놀이
지정여부
노재영, 김순희
구분
탈춤
흐름
양주별산대놀이가 처음 시작된 연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양주에서는 200여 년 전부터 해마다 주로 4월 초파일과 5월 단오에 한양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산대놀이를 했으나 딱딱이패가 자신들의 지방공연 관계로 공연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관아의 아전들이 사직골 딱딱이패를 본 떠서 탈을 만들고 연희를 시작했으며 이것이 큰 호응을 얻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때 중심이 되었던 인물은 이을축(李乙丑)으로 그가 양주 최초의 탈 제작자이다. 과거 양주는 교통의 요지이자, 양주목사(楊洲牧使)가 주재하던 곳으로 한강 이북의 매우 큰 고을이었다. 이러한 기반 아래서 민간화한 양주별산대놀이는 목사가 주재하던 '객문동'을 중심으로 소위 ‘본바닥’ 사람들만 출 수 있던 독특한 탈춤으로 전승되었다. 산대놀이는 일명 산디놀이, 산지놀이, 산두놀이 등으로 불리며, 나례나 중국 사신의 영접 등의 행사에서 공연되던 산대잡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주로 서울,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애오개(현 아현동), 만리재, 가믄돌(현 흑석동), 송파, 녹번, 사직골, 구파발, 노들(현 노량진), 퇴계원, 의정부 등에 산대놀이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사직골 딱딱이패에게 배워서 시작했다는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의 산대놀이만이 주요무형문화재로 지정, 전승되고 있으며, 1990년부터 복원이 추진되어 1995년에 보존회가 결성된 퇴계원산대놀이가 전승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에 별산대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애오개, 사직골, 녹번 등지에 있던 산대놀이를 지칭하는 본산대와 대별되는 말로 본산대에서 배워와서 새로이 정착, 속화(俗化)시킨 놀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탈춤 가운데 가장 먼저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으며, 1964년 12월에 기능보유자를 중심으로 보존회가 조직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 전수회관에서는 별산대놀이의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상설공연도 갖고 있다.
내용
양주별산대놀이는 4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 8월 추석에 주로 연행되었으며, 간혹 기우제를 지낼 때에 행해지기도 하였다. 놀이 전에 하는 고사(告祀)에서 조라(祭酒)와 떡, 삼색 과일 이에 쇠머리, 돼지다리 등의 제물을 푸짐하게 올린다. 이 제물과 조라를 음복하여 취기가 돌면 놀이가 시작되었다. 대개 놀이비용은 마을 유지들과 부잣집, 상인들이 추렴하여 충당하는데 연희자는 원칙적으로 무보수였다고 한다. 놀이가 연행된 공간은 주로 마을 북서쪽 불곡산(佛曲山) 아래의 사직골이었고 이 곳에 당집이 있어 놀이의 가면과 도구들을 보관하였다. 현재는 당이 없어지고 놀이터도 경작지로 변화한 관계로 전수회관에서 연행된다. 공연시간은 제한되어 있지 않았는데, 보통 저녁 무렵에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3~4시간으로 줄이기도 하였다. 양주별산대탈놀이에서 사용되는 악기는 피리 2, 젓대 1, 해금 1, 장구 1, 북 1로 구성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경우에 따라 꽹과리가 추가되거나 피리와 장구만으로 춤을 추기도 하였다. 염불가락인, 타령, 굿거리곡 등을 사용하였으며, 춤사위는 봉산탈춤이나 오광대놀이의 덧배기춤에 비하여 비교적 우아한 맛이 있고 형식미를 갖춘 편이다. 크게 거드름식 춤과 깨끼식 춤으로 나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다른 여타의 탈놀이들과 같이 음악에 춤을 추는 것이 주가 되며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거기에 무언극적 몸짓,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인 부분으로 구성된다. 등장 인물 가운데 상좌, 연잎과 눈끔쩍이, 왜장녀, 애사당, 소무, 노장, 원숭이, 해산모, 포도부장, 미얄할미 역은 대사없이 춤과 몸짓과 동작으로 연기하지만 그 밖이 역할들은 대사와 함께 춤, 몸짓, 동작이 곁들여진다. 봉산탈춤의 대사가 비교적 운문투인데 비하여 양주별산대놀이는 일상 회화체 대사인 것이 특징이다. 별산대 놀이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극과 공통된 점을 보이는데,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寺堂), 하인 및 기타 늙고 젊은 민중들의 등장을 통하여 현실을 폭로하고 풍자하며 호색(好色), 웃음과 탄식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는 1) 벽사의 의식무(儀式舞)와 굿 2) 파계승에 대한 풍자 3) 양반에 대한 모욕 4) 남녀간의 대립과 갈등 5) 민중생활의 실상 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각 마당별 내용 및 등장인물
양주별산대탈놀이에 등장하는 배역은 모두 32명이다. 그러나 겸용으로 사용하는 탈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보통 22개(상좌 2개, 옴, 목중 4개, 연잎, 눈끔쩍이, 완보, 신주부, 왜장녀, 노장, 소무 2개, 말뚝이, 원숭이, 취발이, 샌님, 포도부장, 신할아비, 미얄할미 등)가 사용된다. * 길놀이 가면과 의상을 갖추어 입고 꽹과리, 징, 장구, 북 등의 풍물을 치면서 공연하는 것을 알리며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장소까지 행렬한다. * 고사 놀이을 시작하기에 앞서 탈을 배열하고 그 앞에 젯상을 마련하여 연희자 중에서 제관과 집사가 나와 고사를 지낸다. 이것은 연희자와 관중들의 무사를 빌고 소지를 올려 이미 고인이 된 연희자들의 이름을 부른다. 이것은 탈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 신령과 고인이 된 연희자들의 영혼이 공연과 연희자, 관중들의 무사함을 비는 것이라고 한다. * 제1과장 : 상좌춤마당 상좌들이 염불장단에 맞춰 거드름춤으로 사방에 고하는 벽사의 의식무 * 제2과장 : 옴중, 상좌마당 옴중이 어린 상좌에게 희롱당함 * 제3과장 : 옴중, 목중마당 자기 지체를 높이려 하나 옴이 오른 중으로 탄로가 나는 파계승을 풍자함. 또 목중들이 놀이판에서 옴중에게 매를 맞고 수선을 피움 * 제4과장 : 연잎, 눈끔쩍이마당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고승이 파계승을 벌하는 내용. 얼굴의 홈으로 과거보러 가지 못하는 연잎과 눈끔쩍이가 놀이판에 나왔다나 춤을 춤 * 제5과장 : 팔목중놀이마당 민중생활의 실상과 파계승을 풍자함 첫째거리-염불놀이, 둘째거리-침놀이, 셋째거리-애사당법고놀이 * 제6과장 : 노장마당 노장에 대해 풍자적 공격을 하는 내용 첫째거리-파계승놀이, 둘째거리-신장수놀이, 셋째거리-취발이놀이 * 제7과장 : 샌님마당 양반에 대한 풍자와 민중의 승리를 표현하는 내용. 첫째거리-의막사령놀이, 둘째거리-포도부장놀이 * 제8과장 : 신할아비, 미얄할미마당 남성과 여성의 갈등과 서민의 생활상을 표현하는 내용. * 뒷풀이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진행되며, 출연자와 관객들이 한데 어울리는 마당이다.
전승자 정보
양주별산대탈놀이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1964년에 기능보유자 인정을 받은 사람은 상쇠잡이의 신순봉(申順奉), 노장 눈꿈적이의 고명달(高明達), 피리 및 먹중의 석거억(石巨億), 가면제작의 유경성(柳敬成), 소무의 박교응(朴敎應), 먹중과 원숭이의 김상용(金相容), 옴중과 취발이의 노재영(盧載永), 가면제작의 김성대(金成大), 젓대의 지명천(池命千), 지휘의 공재웅(孔在雄), 상좌와 소무의 박상환(朴湘桓), 해금의 김완손(金完孫), 옴중의 박재문(朴載文), 피리의 김영수(金永洙), 장고의 함춘길(咸春吉), 취발이의 서정주(徐貞柱) 등이며, 1976년 6월에 2차로 이병권(李秉權)이 상좌로 보유자 인정을 받았다. 한편, 1971년에 나이가 너무 젊고 기량 차이가 많이 나는 보유자로 판단되어 옴중의 박재문과 피리의 김영수가 보유자 인정에서 해제되었다. 현재 양주별산대탈놀이의 전승자는 노재영(1932년생, 옴중/취발이)과 김순희(소무, 해산모)이다. 1) 김성태(金星泰, 1893∼1962) 양주별산대탈놀이의 연희자로 노장, 왜장녀, 취발이 역에 능하였다.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산대 놀이의 명수였던 아버지 김성운에게서 산대춤을 배웠다. 1951년에 6·25 전쟁으로 인해 전승이 중단될 위기에 있던 양주별산대탈놀이를 신순봉 등과 함께 다시 일으켰다. 1958년 장춘단에서 열린 제1회 전국 민속 경연 대회 때 공로상을 받았으며 양주별산대탈놀이가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자 예능보유자 인정을 받았다. 2) 김상용(金相容, 1926~2001) 양주별산대탈놀이의 명인의 가계(家系)를 이은 사람으로 할아버지 김성운(金盛運)과 아버지 김성태(金星泰)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1964년에 먹중 및 원숭이로 양주별산대탈놀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김상용은 말뚝이역에서 취발이, 먹중, 원숭이 등의 역할까지 두루 소화해 냈으며 특히 그가 자지러지듯이 추던 깨끼춤은 춤사위의 백미로 통한다. 장삼자락을 허공에 휘날리며 뒷걸음질치는 곱사위, 이쪽 저쪽 깡충깡충 앙감질하면서 팔다릿짓을 해대는 까치걸음 등의 춤사위 등은 후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3) 김순희(金順姬) 경기도 양주군 양주읍 유양리 출생으로 함춘길과 유경성의 권유로 양주별산대탈놀이에 입문하였다. 1977년에 이수자로 선정되었으며, 1984년에 양주별산대탈놀이 보유자 후보로 지정된 뒤 2002년 2월에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유경성에게서 소무(小巫)를, 김상용에게서 해산모(산파)를 이수받았다. 현 양주별산대탈놀이 보존회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정기적인 공연과 발표회를 통해 탈놀이의 보존과 전승에 힘쓰고 있다.
대사본
양주별산대탈놀이의 채록본은 조종순 구술 김지연의 필사본(1930)과 임석재 채록본(1966), 김성대 기록 이보라 정리본(1958~1959), 임석재/이두현 채록본(1964), 최상수 채록본(1965), 이두현 채록본(1969), 김성대 기록 심우성 정리본(1975) 등이 있다.
연계정보
· 재구성 <한국전통연희의 이해와 실제 Ⅰ>, 유영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1998 <한국예술사전(연극/무용/영화 편)>, 대한민국예술원, 1985 <구비문학개설>, 장덕순 외, 일조각, 1971 <봉천놀이마당>, 민속교육자료집, 우리교육, 1994
참고도서
<양주별산대놀이>, 정형호 글, 서현강 사진, 화산문화, 2000. <한국전통연희의 이해와 실제 Ⅰ>, 유영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1998 <한국예술사전(연극/무용/영화 편)>, 대한민국예술원, 1985 <구비문학개설>, 장덕순 외, 일조각, 1971 <봉천놀이마당>, 민속교육자료집, 우리교육, 1994
용어해설
산대놀이 :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성행한 탈놀이를 말한다. 산디극, 산디도감극이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나례(儺禮)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려 초에 전해진 듯 하다. 처음에는 제석(除夕)에 궁중에서 행하다가 고려 제16대 예종(睿宗) 때부터 연극적 요소가 가미되어 ‘산대잡극(山臺雜劇)’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연극으로 연행되었는데, 주로 중국 사신의 영접시에 공연되었다. 차차 민간에도 전파되었다. 보통 12마당으로 구성되며, 바가지나 종이, 나무 등으로 만든 탈을 쓰고 소매가 긴 옷을 입은 광대들이 추는 춤이 주가 된다. 묵극적(默劇的)인 몸짓과 노래 ·재담 등이 곁들여진다. 양주별산대탈놀이와 봉산(鳳山)탈춤, 경남지방의 오광대(五廣大)은 모두 산대놀이가 민간에 전파된 뒤 발생한 분파로 짐작된다.
관련사이트
양주별산대놀이 홈페이지
관련사이트
탈춤 풍물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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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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