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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음악 2

정부 수립 후 70년대까지의 시기에 창작계는 현대음악에 눈뜸을 계기로 현대기법을 작곡의 사전조건으로 확고히 수용했고, 연주계는 경제발전에 힘입어 유래없는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한편 70년대 말 음악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적 진전이 양악계에서 일기 시작했다. 80년대의 음악 문화는 광주항쟁 이후 한국의 사회전반이 겪은 소용돌이를 호흡하면서 전환기를 맞는다. 즉 ‘음악의 심미성과 윤리성이 새로운 시대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가 주요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창작동인 ‘제 3세대’의 탄생은 80년대의 큰 사건이었다. 80년대 이후 한국음악계의 흐름은 창작계, 학계, 그리고 학계와의 깊은 관련 속에서 사회적 쟁점을 주도해 간 평론계가 만들어 갔다. 물론 제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고 있었던 현대음악 창작계와 서양 음악 연주계, 그리고 국악학계 등의 활동은 여전히 확대일로에 있었고 또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새로운 시대의 담론은 생산되지 않았다 80년대 이후 달라진 음악현장의 변화는 음악관련 전문잡지들이 창간되었다는 사실이다. <피아노 음악>이 1982년 4월에 창간되었고, <객석>이 1984년 3월, 그리고 <음악동아>가 1984년 4월에 만들어졌다. 그 동안 문예연감에서 대략 한 해의 연주계와 음악계 대소사를 총정리하던 때와는 달리 그때 그때 음악계의 중요한 일들이 이 잡지들을 통해서 기록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음악계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80년대 연주계의 변화로 기록될만한 것은 몇몇 대표적인 연주가들이 한 작가나 작품을 전문적이고 지속적으로 완주하는 도약을 들 수 있고, 본격적인 실내악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예음클럽, 한국페스티발앙상블을 비롯해 크고 작은 단체와 악기별 앙상블 결성이 눈에 띄었으며, 이들은 음악 만듦의 질적 향상을 꾀했을 뿐 아니라 좀 더 청중에게 다가가는 음악문화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콘서트홀이 아닌 작은 홀에서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실내악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실내악은 일반 사람들의 생활공간에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그런가 하면 80년대에는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과 직접 만나는 교류의 장을 열었다. 특히 KBS로 주관 부서를 옮겨 진행된 서울국제음악제가 이런 변화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80년대는 한국음악극연구소처럼 오페라를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도 있었지만, 오페라계 자체에서도 예산의 절감은 물론 음악적 문제도 실험하고 풀어볼 수 있는 소극장 오페라가 활성화되어 다양한 소재와 현실적 문제들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때 클래식 음악계가 아닌 외곽에서는 한편 노래운동이 활발하게 일고 있었는데, 소극장 오페라에 그러한 소재와 노래 양식이 삽입되기도 했지만, 노래극이 또 다른 갈래로 확대되어 가는 경향도 볼 수 있었다. 연주계의 변화와 학계의 문제의식이 만나면서 80년대는 그 어느 때보다 비평이 전문화되고 영향을 미치는 계기를 마련했는데, 이미 별도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음악 논쟁을 주도한 이강숙을 비롯한 30여 명의 음악평론가가 주요 일간지는 물론 전문 잡지와 및 학술지에 무게있는 글들을 실어 음악계 변화를 이끌어갔다. 80년대의 음악계는 마치 80년대의 정치,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갈등과 논쟁이 양산된 시대였다고 보여진다. 반면에 90년대는 80년대 갈등의 접점들이 상호 문제점들을 재점검하면서 이를 다시 정리하는 시대였다고 하겠다. 외래와 전통의 무조건적 수용과 무조건적 배격의 양극점에 있던 입장들이 그 끈을 느슨히 놓았고, 어떻게 다시 80년대를 바탕으로 새로운 창조의 길을 모색하느냐가 문제의 초점으로 부각되는 때가 90년대라고 하겠다. 국악과 양악이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작업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 음악계의 90년대이다. 이런 흐름은 연주계, 창작계, 학술계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첫째로 90년대가 2000년대를 바라보며 10년 단위의 시각보다 세기적 단위의 회고와 극복의 문제에 눈을 돌리는 시기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세계 경제가 전지구적으로 재편되면서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한 국가 내에서 각자의 차별화에 힘을 기울이기보다 나와 밖이라는 차원에서 우리의 통합된 정체성을 생각해 봐야 했기 때문이다. 90년대에는 한편으로 연주, 창작, 학계 등 영역별 내 분화된 구조를 극복하는 활동이 수평적으로 활발해졌고, 수직적으로는 모든 분야의 대중화가 활발히 일어났다고 하겠다. 정보와 지식의 공유가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예술 전반에 대한 대중의 소유의지도 그 폭이 현저히 넓어져 공급도 다양해지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의 남북 분단구조가 가지고 있는 지형적 특성이 초래한 음악적 문제들에 있어서도, 90년대에 일어난 남북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이질감을 해소하고 통합을 모색하는 것이 가능한 과제로 떠올랐다. 나뉘어지지 않은 한반도적 시각의 확보를 90년대가 가능케 만들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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