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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음악 1

1953년 휴전과 함께 한국은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였다. 음악도 여기에 맞추어 재정립되었고 또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전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식민지, 좌우익 대립,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음악의 역사가 전개 되었지만, 이 시대에 들어 비로소 비교적 안정된 체제 속에서 진행되었고 또 경제의 발달 등으로 인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체제는 분단상황이라는 구조적인 요인을 안고 있었다. 즉, 한편으로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추구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를 배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양 날개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 날개만으로 구조화된 조건 속에서 새로운 음악의 역사가 전개가 되었다. 그런 한편 이 시기의 음악은, 이분화된 대립과 갈등의 구조 속에서 팽창 일변도로 진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립과 갈등은 자극적인 요소로써 기능하여, 때에 따라서는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생산성을 향상시켜 주어 다양하고 풍부한 장르의 음악문화를 창출시켜 주기도 하였다. 즉, 동양음악과 서양 음악, 고전음악과 현대음악, 이문화(異文化)음악과 전통음악, 고급음악과 저급음악,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국악과 양악이라는 이분화된 대립구조는, 경쟁원리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각 장르의 독자적인 발전을 촉진시켜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 영역의 확장과 생산에만 관심을 둔 장르 이기주의를 낳게 하는 역기능적인 면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의 음악문화는 생산자 중심이었고, 예술가 중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음악 활동도 민간 중심으로 재개되었다. 음악인들은 우선 자신의 활동 근거지가 될 단체 설립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개인적으로 음악활동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점에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음악단체로는 ‘대한음악가협회’가 있었다. 그러나 동 단체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명목상의 조직에 불과하였다. 이에 실망을 느낀 음악인들은 각각 전문분야별로 음악단체를 결성하였다(전정임, “음악”, <한국협대예술사대계 II>(한국예술연구소 편, 시공사, 2000), 249쪽). 한국작곡가협회(회장 김세형)를 비롯하여, 한국연주가협회(회장 김인수), 한국음악평론가협회(회장 계정식), 한국교육음악협회(회장 이흥렬), 한국관악연맹(회장 박태현), 고려오페라단(회장 서영모), 한국교향악협회(회장 김생려) 등 7개 단체가 조직되었고, 1956년 5월에는 이를 하나로 묶은 ‘한국음악단체연합회’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한국문화단체총연맹에 가맹하였다. 이에 따라 음악단체는 기존의 대한음악가협회와 한국음악단체연합회로 이원화되었고, 마침내는 주도권 싸움 등 대립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음악계의 발전에 저해 요인이 된다 하여 한국음악단체연합회는 한국문화단체총연맹에서 탈퇴하고, 1958년에 그 통합작업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양 음악단체가 통합운동을 벌인 끝에 1961년에야 비로소 통합된 유일한 음악단체인 ‘한국음악협회’가 창립되었다(김형주, “한국음악협회 40년사”, <한국음악협회40년사>(한국음악협회 편, 수문당, 1985), 9쪽). 그러니까 한국음악협회는 대한음악가협회와 한국음악단체연합회가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만든 것으로, 민족음악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국제적인 음악문화 교류를 통하여 음악가의 지휘 향상과 권익 신장을 목적으로 출범하였다. 초대 이사장에는 이유선(李宥善), 부이사장에는 조상현(曺祥鉉), 한규동(韓圭東)이 선출되었으며, 1962년에는 사단법인이 되어 사회문화단체로 공인된 기반을 닦게 되었고, 같은 해 유네스코 산하의 국제기구인 국제음악협의회(International Music Council, IMC)에 가입하여 국제사회에서 한국음악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음악협회는 음악계의 대변인으로서 또한 음악정책의 대행이나 협의기구의 역할을 겸한 음악계의 행정기능을 갖는 사회단체로 기구를 갖추게 되었다(김형주, “한국음악협회 40년사”, 윗 책, 10쪽). 이후, 회원의 연주회를 주최하기도 하고 음악가들의 권익과 활동여건의 보장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으며, 음악인구의 저변 확대와 우수 음악인의 해외파견을 위한 콩쿠르 등을 개최하였고, 음악을 통한 국제교류의 창구와 집행기관으로써의 활동도 하였다. 그리고 창작계의 진흥을 위해 1969년부터 매년 서울음악제를 주최하고 있다. 2001년 현재 전국적으로 7,000여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고, 69개의 산하단체와 80개의 지부를 두고 있는 등 명실공히 한국음악인을 대표하고 있는 단체이자 실제 음악을 직업으로 하는, 음악 분야에 종사하는 음악인들의 집결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음악가들의 개인적 역량이 점차 확대되고, 협회를 배경으로 하는 음악활동의 비율도 점차 낮아짐에 따라 그 역할과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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