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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한국전쟁기의 한국의 양악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광복이 되었지만, ‘광복의 주체가 누구냐’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겨 놓았다. 즉, ‘광복을 우리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냐, 아니면 남의 도움으로 얻은 것이냐’라는 문제는, 향후에 전개될 모든 사회적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역사는 후자에 가까웠다. 조국은 비록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또 다른 외세의 도움과 간섭을 받아야만 했고, 갑자기 찾아 온 해방정국을 능동적으로 주도할 만한 정치 권력의 형태가 마련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광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질서는 새롭게 개편이 되었지만, 그것은 분열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분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단이라는 조건과 외세의 도움과 간섭을 받는 배경 아래에서의 새로운 질서의 모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광복과 함께 음악계도 역시 개편이 되었다. 그러나 그 개편도 분열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또다시 새로운 체제로 재편성을 해야만 했다. 광복 직전의 음악단체로는 ‘조선음악가협회’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음악단체였고, 회장은 조선총독부의 아부달일(阿部達一)이었고, 조선인 이사로는 현제명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와 함께 김순남, 강장일, 신막, 이범준 등을 중심으로 한 ‘성연회(聲硏會)’라는 지하 음악서클이 있었다. 광복이 되자마자 8월 16일 성연회의 김순남과 강장일이 발의하여 ‘음악가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결성하였고, 연이어 조직된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미술건설본부’ 등과 함께 연합하여 8월 18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다. 그러니까 ‘조선음악건설본부는 광복 후 조직된 최초의 음악단체였으며, 임원진은, 중앙위원장 박경호, 작곡부 위원장 김성태, 기악부 위원장 안병소, 성악부 위원장 안기영, 국악위원장 함화진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음악가대회’ 발의자였던 김순남을 비롯하여 젊고 진보적인 음악가들은 이 단체를 탈퇴하고 9월 28일 보다 이념적인 색채가 뚜렷한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9월 30일에 결성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연맹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의 위원은, 위원장 신막, 서기장 이범준, 작곡부장 김순남, 기악부장 윤기선, 성악부장 정종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음악건설’과 ‘반동적 음악에 대한 적극적 투쟁’의 기치를 내걸고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12월 좌익예술단체의 통합과정에서 발전적 해산을 하고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재출범하였다. 강령으로는, 1) 일본제국주의 잔재음악의 소탕을 기함, 2) 봉건주의적 유물음악의 청소를 기함, 3) 음악의 국수주의적 경향을 배격함, 4) 악단의 반민주주의적 세력의 구축(驅逐)을 기함, 5) 음악의 민족적 유산을 정당히 계승하고 외래음악의 비판적 섭취를 기함, 6) 진보적 민주주의 민족문화의 건설을 기함, 7) 국제음악과의 교류 협조를 기함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주요행사로는 1946년 5월 4일과 5일에 ‘해방가요 발표 대연주회’를 개최하였고, 1946년 9월 7일과 8일 ‘해방 1주년 기념 음악회’, 1946년 10월 18일 ‘예술의 밤’ 등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행사로는 공장과 농촌 방문연주회를 수십 차례 개최하였다. 동 단체는 1947년 7월까지 음악계를 주도하다시피 하였지만, 미군정(美軍政)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지하로 숨거나 월북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음악인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음악가동맹에 참가했던 대다수의 음악인들은 월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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