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가(黃鳥歌)
- 작품소개
- <황조가(黃鳥歌)>는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지었다는 시가로 원가(原歌)는 전하지 않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유리왕조에 4언 4구의 한역시(漢譯詩)와 창작동기가 전한다. 현전하는 고구려 최고(最古)의 서정시이며, 집단가요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넘어가는 단계의 가요이다.
- 저자
- 유리왕(瑠璃王, ?~A.D18) 고구려 제2대 왕으로,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禮)씨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자 기원전 19년(동명왕 19)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 태자로 책봉되고 동명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기원전 17년 계비인 치희(雉姬)를 그리는 <황조가(黃鳥歌)>를 지었으며, 기원전 9년 선비(鮮卑)를 공략하여 항복받았다. 3년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3년 부여(扶餘)가 침공해 오자 이를 격퇴하였고, 14년에는 군사 2만으로 양맥(梁貊, 小水貊)을 쳤으며, 한나라 고구려현(高句麗縣: 현도군의 속현)을 빼앗았다. 두곡동원(豆谷東原)에 묻혔다.
- 원문
-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 현대어풀이
- 펄펄 나니는 저 꾀꼴새는 수놈과 암놈이 저리 정다운데 나의 외로움을 생각함이여 그 뉘와곰 함께 갈거나
- 어휘풀이
- - 꾀꼴새 : 작자와 대비되는 자연물로 고독과 슬픔이라는 시정(詩情)을 불러일으키는 제재 - 외로움[獨] : 작가의 심정을 집약적으로 대변하는 시어
- 배경설화
- 유리왕은 왕비 송씨(松氏)가 죽자, 골천(結川) 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인(漢人)의 딸 치희(雉姬)를 계실(繼室)로 얻었다. 이들이 서로 총애를 다투어 불화하므로, 왕이 양곡(涼谷)이란 곳에 동서(東西) 양 궁(宮)을 짓고 그들을 각각 두었다. 그후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궁을 비운 사이에 둘이 다투게 되었다.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婢妾)일 뿐인데, 무례함이 어찌 이리 심한가?”라고 꾸짖으니, 치희가 부끄러워 원한을 품고 도망쳐 돌아갔다. 왕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쫓아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일찍이 나무 밑에 쉬면서 꾀꼬리가 날아 모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이에 느껴 <황조가>를 지었다. 내용은 ‘펄펄 나니는 저 꾀꼴새는 수놈과 암놈이 저리 정다운데 나의 외로움을 생각함이여 그 뉘와곰 함께 갈거나(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1 유리왕(瑠璃王)
- 해설
- <황조가>의 창작동기를 해석하는 태도에 따라 창작연대, 작자, 내용, 문학사적 위치 등에 대한 이견이 나타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유리왕이 임을 잃은 실연(失戀)의 아픔을 꾀꼬리라는 자연물에 의탁하여 우의적으로 표현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가로 보는 것이 현재 가장 일반적이다. 집단적인 서사시에서 개인적인 서정시로 넘어오는 단계의 서정시이며, 우리 문학의 전통인 ‘이별의 정한(情恨)’ 계보 중, 맨 처음을 차지하는 작품이라고 본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으로 유리왕 당시의 사회현실을 반영한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즉 화희·치희의 싸움을 두 종족 간의 대립으로 본다면, <황조가>는 유리왕이 이 대립을 화해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부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서사시가로 취급하여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유리왕 3년의 사적(史蹟) 기록에 왕비 송씨의 죽음이 없고 그 당시 왕 내지 지배층의 혼인도 권력구조의 편성과 결부되어 동시처제도(同時妻制度)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화희와 치희의 이름글자 ‘화(禾: 벼)’와 ‘치(雉: 꿩)’가 수렵경제생활 상태에서 농업경제생활 상태로 전이되어가던 과정임을 보인 설화라는 견해를 펴기도 한다. 작자문제에 있어서도 유리왕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민요를 가창했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전하는 제례의식(祭禮儀式) 중에서 남녀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부른 사랑가의 한 토막이며, 또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오던 민요로서 유리왕 설화에 삽입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