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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교시 한국영화의 역사

    수업개요
    최초의 한국영화는 1919년 <의리적 구투>였지만, 한국영화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중흥기를 맞이했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기록된다. 제작편수와 관객이 증가하면서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수준높은 작품들이 다량 생산되었다. 1970년대에는 TV가 대중화되고 유신시대의 가혹한 검열과 통제의 그늘 아래서 한국영화는 불황의 늪에 빠져들었다. 한국영화가 최근의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었던 변화들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영화법 개정으로 제작자유화 조치가 실현되고 영화시장을 개방하게 됨에 따라 한국영화는 경쟁 구조로 재편되면서 젊고 유능한 인력의 유입이 가능해졌다. 1990년대 이후 대기업과 금융자본 등 새로운 제작자본이 형성되면서 한국영화는 전근대적인 제작구조를 개선하고 관객 변화에 맞춰 장르화되기 시작했다. 5교시에는 이와같은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계기들을 중심으로 각 시기의 특성과 주요한 영화적 흐름을 살펴보고 한국영화의 나아갈 방향을 살펴본다.
    초창기와 일제시대의 한국영화
    한국에서 처음으로 활동사진이 상영된 지 16년만인 1919년, 최초의 한국영화인 <의리적 구투>가 만들어졌다. <의리적 구투>가 연극과 영화가 접목된 형태의 ‘연쇄극’이었던 것과 달리, 윤백남 감독의 1923년작 <월하의 맹서>는 한국 최초의 극영화였다. 나운규 감독의 1926년작 <아리랑>은 조선영화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국가를 잃은 민족의 상실감을 담아내어 전무후무한 흥행을 했다. 이때부터 한국영화계는 일제시대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영화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만주사변이 일어나서 경기가 급격히 침체하고 1940년대에 조선영화령이 공포되어 일제가 영화를 가혹하게 통제함으로써 한국영화는 해방이 될 때까지 암흑기를 보내야했다.
    과도기의 한국영화: 해방~1950년대
    1945년, 8·15 해방이후 잠시 활력을 띄었던 한국영화계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했다. <춘향전>(이규환, 1955),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 등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는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영화제작회사와 제작편수가 증가했고, 신인감독들이 등장하고 영화스타들이 출현하면서 한국영화는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한형모감독의 <자유부인>(1956)을 비롯한 시대풍조를 담은 멜로드라마들이 유행했고, 6·.25의 경험을 담은 전쟁영화가 만들어졌다.
    한국영화의 전성시대: 1960년대
    1960년대는 4·19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남으로써 한국사회는 강압적인 근대화 프로젝트의 격랑에 휘말리게 되었다. 영화계에서 이 여파는 1962년에 제정된 영화법으로 나타났다. 영화법은 국산영화 시장의 보호와 육성과 기업화정책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인 지원정책은 없었고 대신 영화법을 통해 영화시장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한국영화는 제작편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예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여주면서 황금기를 보냈다. 강대진 감독의 <박서방>(1960), <마부>(1961) 등의 가족멜로드라마가 근대화과정에 놓인 한국사회의 변화를 가족관계를 통해 보여주었다면,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과 같은 청춘영화는 일제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한글세대인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대변했다. 또 1960, 70년대의 대표적인 장르가 된 액션영화가 유행하는 등 1960년대는 장르적으로 풍성한 양상을 보였다.
    한국영화의 암흑기: 1970년대
    1970년대에 한국영화계는 TV의 대중화로 관객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유신시대에 가혹한 통제를 받으면서 관객과 점점 멀어져 갔다. 한국영화계는 불황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몇몇 영화들은 문화적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영화들을 제작하여 관객과의 만남에 성공했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과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영화관객의 세대교체에 맞춰 중고생 관객을 겨냥한 <진짜진짜 잊지마>(문여송, 1976) 등의 시리즈와 <고교 얄개>(석래명, 1976) 시리즈 같은 하이틴 영화들, TV와의 차별화 전략에서 나온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1975) 등의 호스테스 영화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980년대의 한국영화
    1980년대는 민주화투쟁과 광주민중항쟁으로 시작되었지만, 제5공화국은 이중적인 검열의 잣대를 사용했다. 자유화의 분위기는 성적표현의 영역에서 나타났지만 정치 부문은 여전히 억압적이었고, 적나라한 성적표현은 허용하면서도 사회비판적인 영화에 대한 검열은 계속되고 있었다.<애마부인>(정인엽, 1982)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여성의 성적 방황을 소재로 한 일련의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영화의 에로화’라고 부를 만한 이러한 현상은 5공화국의 이중적 검열체계 속에서 가능했다. 1980년대의 영화법 개정은 한국영화 산업의 위기를 가중시키기도 했지만, 한국영화 제작구조가 치열한 경쟁 구조로 재편되면서 과거의 산업구조가 붕괴되고 새로운 산업구조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84년에 5차로 개정된 영화법은 제작자유화 조치를 통해 젊은 영화인력이 충무로에 들어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1986년, 6차 개정 영화법은 한국영화 시장 개방을 위한 조치를 마련하여 외국인이 국내에서 영화업을 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로써 할리우드 직배사들은 1988년 UIP를 시작으로 국내 지사를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
    <결혼이야기>(김의석, 1992)는 충무로의 젊은 영화인력이 영화를 만들고 대기업인 삼성이 돈을 대서 흥행에 성공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1990년대 중반 대기업의 참여는 한국영화산업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대기업은 영화사들이 제작비를 합리적으로 운영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통해 한국영화의 체질 개선이 시작되었다. IMF를 전후로 대기업이 영화산업에서 거의 빠져나가고, 이 빈 자리를 금융자본이 대신했다. 금융자본은 리스크 관리를 철저히 하기로 유명한데, 영화사들이 프로덕션 시스템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것을 대기업보다 더 강하게 요구했다. 1980년대까지 영세한 자본은 한국영화 산업구조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대기업과 금융자본, 투자조합의 투자를 통해 안정적인 제작자본을 확보하게 됨에 따라, 한국영화의 질은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장르화 경향이 강해졌으며 흥행에도 성공하게 되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는 이와같은 안정적인 자본을 배경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쉬리>(강제규, 1999)로 본격화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전략을 한국 영화산업에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성공하긴 했지만, 그전까지 여러 편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영화들이 실패를 거듭했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가장’ 산업화된 형태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실패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대부분 합리적인 제작관리를 하지 못했다. 한편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2001) 이후 한국 영화를 산업적으로 지탱해온 데에는 코미디 영화의 역할이 컸다. 조폭코미디에서 <색즉시공>(윤제균, 2002) <몽정기>(정초신, 2002)등의 섹스코미디, <동갑내기 과외하기>(김경형, 2003) 이후의 로맨틱코미디에 이르기까지 코미디영화는 변화하는 관객과 관객의 취향을 정확하게 공략했다. 또한 한국에서 비주류 장르였던 공포영화가 장르화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여고괴담>(박기형, 1998)이 흥행한 이후 거의 매년 여름을 장식했던 공포영화는<장화홍련>(김지운, 2003), <4인용 식탁>(이수연, 2003)에 이르러 장르적 성숙을 보여주었다. 지금 한국영화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자국영화 시장점유율 50%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안정적인 흐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산업구조 합리화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연계정보
    -1교시 영화의 탄생과 초기 영화의 형성
    -2교시 고전 영화의 확립
    -4교시 1980년대 이후 영화의 흐름
    -3교시 영화의 새로운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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