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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교시 영화의 새로운 물결

    수업개요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 영화의 구도를 크게 흔들어 놓았다. 2차 세계대전의 주축 세력이었던 이탈리아는 전쟁의 상처 속에서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영화 사조를 탄생시킨다. 네오리얼리즘은 기존의 허구적인 영화제작에 다른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어 영화의 소재나 형식, 제작 방식을 크게 변화시킨다. 프랑스에서도 전쟁이 가져온 외적인 변화와 전통적인 영화에 대한 내부적 비판이 함께 작용하여 누벨바그라는 새로운 영화 운동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주도한 이들은 영화가 감독의 예술임을 주장한 일단의 비평가들이었다. 특히 장 뤽 고다르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만한 다양한 시도들로 영화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기록영화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전쟁을 소재로 한 필름 자료들을 편집한 편찬 다큐들이 전쟁 후 많이 등장하였다. 또한 드류 그룹의 무선 마이크 개발은 다큐멘터리의 소재와 형식을 다양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으며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테 같은 새로운 다큐멘터리 양식을 등장시켰다.
    네오리얼리즘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의 주축세력이었던 이탈리아는 충격적인 전쟁의 체험,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한 굴욕과 좌절, 현실에 대한 뼈아픈 자각을 바탕으로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영화 사조를 탄생시키게 된다. 실제로 경험한 사건을 최대한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네오리얼리즘은 그다지 독창적이거나 통일된 운동은 아니었으나 기존의 허구적인 영화제작에 새로운 접근과 실험적인 시도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들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주요 감독들
    네오리얼리즘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1945)였다. 로셀리니는 실제 생존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실제 사건들이 일어났던 장소에서 기억을 재현하듯 영화를 찍었다. 장소의 현실감과 일상언어 같은 대사, 무명이지만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은 현실과 허구의 절묘한 조합을 가능하게 했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1948)도 네오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특히 영화의 제재와 제작방식이란 측면에서, 즉 가난한 어부의 생활을 비직업 배우와 현지 촬영을 통해 그려냈다는 점에서 네오리얼리즘적이다. 비토리오 데 시카는 네오리얼리즘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영화 <자전거 도둑>(1948)을 만들었는데, 이 영화 역시 가난한 실업자 가정을 중심으로 당시 이탈리아 상황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특징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은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어떤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설명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사회적인 문제들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찰한다. 그런데 네오리얼리스트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전개하는 방식은 매우 새로웠다. 치밀하게 동기화된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고전 영화들과 달리 네오리얼리즘 영화에서는 사건의 중요한 원인들이 생략되기 일쑤이고 이야기 구조가 전체적으로 느슨할 뿐 아니라 결말도 모호하다. 사건들은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식으로 구성되곤 한다. 그리고 비직업 배우를 선호하며 조명, 의상, 분장 같은 요소들은 원래 있는 대로 사용하거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한다. 실제의 소리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인위적인 음악의 사용이 자제되는 것 역시 이 영화들의 특징이다.
    네오리얼리즘의 쇠퇴
    1950년대 초반 네오리얼리즘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의 상황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한계에 대한 영화인들의 자각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제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비토리오 데 시카의 <움베르토 D>(1952)를 기점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되는데, 네오리얼리즘의 양식과 이야기 방식은 이후 모더니스트 영화의 등장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네오리얼리즘 이후 이탈리아 영화
    경제 회복을 바탕으로 1950년대 이탈리아 영화는 화려한 영상이 돋보이는 희극 영화들이 주도하게 된다. <율리시즈>(1954)나 <검투사들의 반란>(1958) 같은 무용담이나 <의혹자>(1956), <이탈리아식 결혼>(1962) 같은 전통적인 희극 영화가 이 시기에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산층이나 상류층 인물들을 탐구하거나 현대의 삶이 미치는 심리적인 영향들을 탐구하는 예술영화들이 빛을 발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있는 감독이 페데리코 펠리니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다. 특히 <정사>(1960), <붉은 사막>(1964) 등을 만든 안토니오니는 이후 펼쳐지는 유럽 모더니즘 영화의 부활과 가장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감독 중 한 사람으로, <제7의 봉인>(1956), <산딸기>(1957) 등을 만든 잉그마르 베리만과 <히로시마 내사랑>(1959), <지난해 마리앵바드>(1961) 등을 만든 알랭 레네 등과 함께 전통적인 시공간의 해체와 파편적인 이야기 구조, 개인의 주관적인 심리 탐구에 치중하는 탁월한 모더니즘 영화들을 만들어나간다.
    프랑스 누벨바그
    <프랑스 누벨바그의 특징> 누벨바그(Nouvelle Vague)란 프랑스어는 영어로 뉴웨이브(New Wave), 즉 새로운 물결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누벨바그는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를, 좁게는 그 시기에 나온 영화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임을 주장한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 프랑소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 끌로드 샤브롤, 쟈끄 리베트, 에릭 로메르 등은 직접 영화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어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이끄는 주축이 된다.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 이야기 구조가 느슨하고 열려있다는 점, 영화와 영화제작에 관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영화는 매우 다양한 모습들을 띠고 있다. <누벨바그 영화감독들> <400번의 구타>(1959), <쥘과 짐>(1961) 등을 만든 프랑소와 트뤼포는 누벨바그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감독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인용하거나 삽입하고 고전적인 장르영화의 관습을 패러디하며 고전적인 영화 기법을 재도입하는 등의 그의 작업은 누벨바그 감독들이 공유했던 방식이다. 트뤼포는 전통적인 영화를 파괴하기보다는 새롭게 만들기를 원했고 감독의 개인적인 표현과 관객의 관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상업영화를 보다 풍부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네멋대로 해라>(1959)를 비롯해 영화사에 가장 큰 ‘사건’들을 기록한 장 뤽 고다르는 다양한 형식적 실험에 끊임없이 매진한 부지런한 감독이었다. 점프 컷과 들고 찍기 같은 획기적인 시도, 미국 B급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 각 분야 예술 작품들에 대한 끊임없는 언급과 인용 등은 고다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들이다. “고다르 이전의 영화와 고다르 이후의 영화가 존재한다.”라는 트뤼포의 말은 영화사에 있어서 고다르의 영향력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일 것이다. <아름다운 세르주>(1959), <사촌들>(1959) 같은 영화를 만든 끌로드 샤브롤은 고다르를 능가할 만큼 많은 영화를 만들면서 일관성있게 부르조아 도덕성의 어두운 밑바닥을 그려냈다. 그는 환경이 사람의 감정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리고 감정이 사람들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들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삶 자체의 무한성을 포착하고자 노력했던 쟈크 리베트는 누벨바그 감독들 중 영화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성격을 보인 감독이다. 이례적으로 긴 상영시간을 가진 그의 영화들, 예컨대 4시간짜리 영화 <미친 사랑>(1968), 12시간짜리 <아웃 원>(1971) 같은 영화들은 그의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준다. 누벨바그는 일종의 문화 운동으로서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불과 몇 년간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누벨바그는 프랑스 영화를 부흥시켰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누벨바그는 작가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재평가를 하면서 개인적인 영화에 대해 강조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예술로서의 영화, 작품을 지배하는 예술가로서의 감독을 생각하는 것은 이 시기의 유산이다.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향을 받은 이웃 나라 독일의 일단의 영화감독들은 1962년 ‘오버하우젠’ 선언을 통해 구세대 전통과의 단절과 새로운 출발을 선언한다. 뉴 저먼 시네마로 불리는 이들의 영화는 정치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모더니즘적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새로운 감독들은 기존의 영화 제작 방식을 거부하고 보다 독립적인 제작과 배급 방식을 추구했고 자주적인 배급을 위해 서로 연대했다. 그러나 스타일적인 면에서는 전혀 유사성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정치관이나 역사의식, 영화작업에 대한 태도 등이 유사했을 뿐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3)를 만든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파리, 텍사스>(1984), <베를린 천사의 시>(1987) 등을 만든 빔 벤더스 등이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 주자들이다. 1970년대 후반 퇴조하기 시작한 뉴 저먼 시네마는 국제적으로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후세대 독일 영화에는 미학적으로, 그리고 제작방식과 관련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운동이었다.
    기록영화의 시작
    최초의 영화 이후 약 10년간은 대부분의 영화가 우리 주변의 일상과 세계 곳곳의 이국적인 풍물들을 그대로 기록하여 보여주는 것이었다. 극영화의 시대가 열리자 우리의 일상을 기록한 영화는 점차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기록영화가 대중의 주목을 새롭게 받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로버트 플래허티에 의해서였다. 플래허티는 에스키모의 생생한 생활상을 담은 <북극의 나누크>(1922)를 크게 성공시키면서 이후 다큐멘터리의 제작 경향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현실보다는 전통을 재현하는 것에 더 치중한 플래허티류의 다큐멘터리는 낭만주의라는 비판과 함께 사회적 상황의 변화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사회 참여적 다큐멘터리의 대두
    플래허티의 제자였던 존 그리어슨은 조국인 영국의 현실을 반영하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는데, 그 첫 시도가 <유망선>(1929)이었다. 영국의 청어잡이 산업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장기간 흥행에 성공하면서 침체되어 있던 영국 영화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영화에서는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였고 영국의 현실을 노동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새로운 노동자상을 정립하고자 했다.
    전후 기록영화의 새로운 경향
    2차 세계대전 이후 다큐멘터리에 일어난 새로운 경향은 전쟁 중의 처참한 역사적 상황들을 기록한 뉴스 필름들을 모아 그것들을 편집하는 연대기 형식의 편찬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 중 대표적인 것으로 로사의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1961)를 들 수 있다.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테
    1950년대까지도 동시 녹음 장비인 마이크와 카메라, 녹음기가 모두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동성이 떨어지고 즉흥적 상황에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로버트 드류를 중심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던 드류 그룹에서는 이러한 불편함을 개선하고자 연구한 끝에 무선 마이크를 사용하는 무선 녹음 방식을 개발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다큐멘터리의 시선과 음향을 변화시킨 중요한 영화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프라이머리>(1960)이다. 카메라가 대상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에서 대상을 관찰하는 이 영화는 실제 상황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담아내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다이렉트 시네마라고 불리는 이러한 양식은 이후 미국 다큐멘터리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경향의 작품으로는 <돌아보지마>(1966), <몬터리 팝>(1968), <세일즈맨>(1969) 등이 있다. 카메라가 그 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반대하고 카메라의 개입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다이렉트 시네마의 철학이었다면 카메라를 촉매같은 존재로, 나아가서 진실의 폭로자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시네마 베리테라고 불리는 새로운 다큐멘터리들을 만든다. <어느 여름의 기록>(1961)에서 카메라는 이제 수동적인 관찰자의 위치에서 해방되어 적극적으로 행위를 유발하는 존재가 된다. 카메라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철학의 변화는 다큐멘터리의 소재와 표현 방식을 다양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전에는 다큐멘터리에서 다룰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보다 분석적인 접근이 가능해진 것이다.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테는 이전의 다큐멘터리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않았던 인터뷰의 위상을 다큐멘터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격상시켰다. 살아숨쉬는 생생한 인류의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는 이전의 다큐멘터리를 지배하던 나레이터의 목소리에 비해 다양한 관점을 포괄할 수 있었으며 보다 민주적인 영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연계정보
    -1교시 영화의 탄생과 초기 영화의 형성
    -2교시 고전 영화의 확립
    -5교시 한국영화의 역사
    -4교시 1980년대 이후 영화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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