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환 (호:소남, 1909.4.10~1972.12.1)
- 문화재관련정보
- 1969.11.10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보유자 인정 1970.12.14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보유자 인정 1972.12.1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보유자 사망해제 1972.12.1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곡보유자 사망해제
- 학력(계보)
- 1926.4.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3기생 입소 1927.~1937. 하규일에게 가곡, 가사, 시조 사사 1931.3.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졸업 1938. 임기준에게 가사, 사설지름시조 이수
- 생애(약력)
- 1928. 아악복고를 위해 전악회(展樂會) 결성 1931.4. 이왕직아악부 아악수 1933. 정간보에 율자 대신 약자로 기보하는 방법 건의 1935.7. 남창 가곡 채보 완성 1937.11. 아악수장(雅樂手長) 1937.12. 여창 가곡 채보 완성 1942. 종로권번 가곡사범, 무용사범 1945.8.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 아악사(雅樂師) 교양부장 1948.8. 아악부(雅樂部) 국가경영 국회청원(대표 이주환) 1958.5. 제7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62.4.1~1972.9.1 국악사양성소(현 국악고등학교) 강사 1969.10. 제7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출연(가곡) 1971.2. 가곡, 가사전수소 개설 1971.7. 예술원상 수상 1971.10. 제8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출연(가사) 1972.11. 마포구 동교동 5번지(현 서대문구 동교동 31-3) 자택에서 운명
- 리뷰
- 소남(韶南) 이주환(李珠煥) 선가(善歌) 上 이주환((李珠煥) 본적 : 서울종로구 관수동 30 출생지 : 서울 주소 : 서울 종로구 당주동 128 생년월일 : 1909년 5월 24일생(당 53세) 결혼관계 : 기혼 학력 :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졸업 전공 : 성악 장기 : 가곡ㆍ시조 수업처 : 이왕직아악부 은사명 : 함화진ㆍ김영제ㆍ하규일 저서 : 고금시조선ㆍ가곡집ㆍ속가곡집ㆍ가사집 수상 : 서울시문화상 연구년수 : 40년 양력 : 국립국악원장 역임 (1951.4.9~1961.12.25) 취미 : 음악감상ㆍ위기(바둑) 소남(韶南) 이주환 님은 1909년 음력 5월 24일 이직상(李稷相) 씨 최감녀(崔柑女) 여사와의 사이에 2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관향은 초산(楚山), 초명은 복길(福吉)이었다. 1926년 3월 소학교를 마치고 그 해 4월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 제3기생으로 선발되어 들어갔는데 제1학년ㆍ제2학년은 전원 보통 교양 필수과목으로 문묘제례악ㆍ종묘제례악ㆍ기타로 되고, 정작 전공은 제3학년 초에 별러졌다. 모두해야 18명 학생인데 전공 악기의 배정은 거문고ㆍ가야금ㆍ비파ㆍ해금 각 2명, 피리 4명, 대금 6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복길은 피리에 배정되었는데 어느 악기 보다도 재능 있고 총준한 자제가 피리에 배속된 듯 김보남ㆍ이재천(석재)ㆍ이점룡 등이 그들이다. 예로부터 거문고를 일러 백악지장이라고 하였으나 기실 거문고가 좌정하는 이른바 중풍류에 있어서는 단연 거문고가 주도하고 있으나 그 밖에 관악이요 대합주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피리잽이의 역량, 중에도 그 목피리의 세련되고 우수한 연주요 영도라야 완비한 합주를 이루는 것이었다. 제3학년 전공이 갈리진 뒤 뜻을 같이 하고 잽이가 다른 6인이 ‘전악회(展樂會)’라는 조직을 가졌다. 성경린(거문고), 김강본(가야금), 이복길, 김보남(피리), 임장길(대금), 왕종진(해금). 피리에 한해서만 2인이 되고 있는데 이것은 인적구성으로 부득이할 뿐만 아니라 연주ㆍ연습 등에 있어서도 장구잽이가 필요했기 때문에 참으로 묘를 얻은 구성이었던 것이다. 이복길ㆍ김복남 중 꼭 누가 장구라고 못을 박지 않고 또 박을 필요도 없이 때와 장소와 잽이의 형편에 따라 하나는 피리를 불고, 하나는 장구를 치면 되게 그런 구상이요 마련이었던 것이다. ‘전악회’는 회람잡지 <전악>을 2호까지 내고 그 뒤 졸업후가 되는데 ‘율려회(律呂會)’로 발전 통합되었다. 지금에 돌이키면 스스로도 대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 분별에 아악복고를 의식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실제로 작은 사업이라도 추진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싹수 있는 일로 칭양될만 하다. 나와 소남과의 교분도 ‘전악회’ 결사 이후 자별하여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31년 졸업 후 나와 이복길ㆍ김복남ㆍ김강본ㆍ이재천 5인은 우등 졸업으로 대뜸 아악수에 임명되고 나머지 13명은 아악수보에 각각 임명되었다. 소남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었다. 기량을 연마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므로 상사의 주목을 끌게 하였던 것이다. 아악부에는 이습회라는 부원의 기술향상을 위한 월례연주회가 있었다. 여기 그는 양금탄주에 쌍채질을 시도하여 동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양금은 지금도 오른손으로 외채질이 행해지고 있으나 원래는 양손에 채를 들고 두드리는 쌍채질이 원식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소남 자신의 창안이던가, 아니면 오당 함화진 선생의 종용이던가는 미심하지만 양금에 있어 쌍채질을 복원한 일은 실로 획기적인 실험이었다. 그는 또 이와 병행하여 기보법에 있어 약자보(略字譜)를 쓰도록 건의하여 보기좋게 채택이 된 것이다. 이제까지 아악부에서는 정간보(井間譜)에 율명(律名)으로 고저를 표시하는 율자보(律字譜)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율보를 버리고 약자보로 바꾼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음악사적 혁명으로도 간주할 수 있는 중대한 결정에 속하였다. 이유인즉 기보에 편하고 빠르다는 것이었는데 참으로 경솔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오류를 소남 아닌 오당(梧堂)선생이 범한 것이다. 이후 교재의 악보를 모두 약자보로 고치어 등사하는 등 한 때 법석을 피웠으나 대다수의 부원은 맹종하지 않고 율보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여러가지 공로이던가는 몰라도 1937년 11월 소남은 동배로서는 단연 수위로 아악수장에 발탁되는 영광을 안았던 것이다. 그는 그때도 그렇고 그 뒤의 행장도 목적 의식적인 두뇌와 추진으로 일보일보 착실하게 지반을 구축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사리에 부딪쳐 즉결로 판단하는 명석형은 아니지만 하룻밤을 숙고하여 결정하는 분별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정확하였다. 재기가 아닌 신중 지구력에 아무도 그의 적수가 아니었다. 소남과의 이 대결에서의 순위는 그와 나의 행로를 가히 결정지운 숙명이기까지 하였다. 그 무렵 소남의 아악에 대한 관심이랄까 열의를 파악하는 것이 실로 중요할 듯하다. 이미 학생시절에 금하(琴下) 하규일 선생에게 가곡과 가사와 시조를 함께 배웠다. 그 뒤 졸업 후에도 계속 금하선생 교도하에 그 곡목을 확대하고 이미 배운 곡목을 다듬고 다져가는 그런 연습이 이어 나갔다. 무슨 선발된 아악수만의 전공이 아니고 전원의 필수 교양강좌이었든 바 특히 소남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금하선생 돌아가고 가객(歌客) 임기준 선생이 임시 촉탁으로 아악부에 취임하였는데 임선생은 가곡은 못하고 가사와 시조 그리고 그 잡가를 통효하여 비록 단기간이나마 전통가악을 전수하는데 공이 컸던 것이다. 가사는 12가사로 알려있듯 열 두 곡조가 전창되었는데 금하 하규일 선생은 그 중 여덟 곡조를 이회하고 나머지 네 곡조는 전수치 못했던 것이다. 12가사중 <처사가>, <양양가>, <수양산가>, <매화타령> 4곡이 그것인데 그 곡을 능히 부르는 이가 그 때 임기준 선생을 빼고는 없었던 것이다. 1939년 6월 1일 그가 아악부 촉탁으로 고빙되어 네 곡의 가사를 전수하므로 12가사를 완전히 부르고 또 남길 수 있게 한 것이다. 그 때 소남은 선배인 이병성, 후배인 김기수ㆍ김철영ㆍ장사훈 등과 열심히 채보를 하던 그런 축의 하나인 것을 기억하고 있다. 특히 그런 노래에 뛰어난 것 같지는 않았고, 그저 뒷날 비망을 위해서 그래두는 것이려니 그렇게 보아 넘기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전공인 피리를 버리고 가곡으로 전향한 일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는 박성재ㆍ김천홍 선배와 동학인 김보남이 경운동 ‘한성준무용연구소’에 다니며 승무를 배울 때는 끼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종로권번에서 여창가곡을 전수하는 기회에 한성준 씨에게 승무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그는 한선생에게서 승무를 배우면서 그것을 무보를 만들어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말고도 민속무용을 건져 무보화한다는 일은 도무지 쉽지가 않고 누구에게 별로 선례도 없는 터에 그런 것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노력이 그의 장처라면 바로 그것이었다. 소남은 남을 가르치게 된 뒤로부터 노래가 비로소 상달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누적되어 가곡의 대사장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국악예술인 명감>, 국악계사, 1961년 이주환의 삶과 음악 초대 ‘국립국악원’ 원장으로 12가사의 정통 맥을 이은 가곡, 가사의 명인. 1926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에서 국악과 인연을 맺은 후 1972년 타계하기까지 50여년의 일생동안 민족 음악의 보존과 계승,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특히 광복 이후 한국동란의 와중에서 명맥이 끊길 뻔한 참담한 현실의 국악을 유지 보존해온 공로가 크다. ‘국립국악원’을 열고 초대원장으로 10년 동안 재직하면서 국악의 맥을 잇고 전통문화를 널리 알리는 오늘날의 ‘국립국악원’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국악계에서 해방 전과 후를 잇는 중시조적인 인물. 누구나 이주환 씨를 마주 대할 때는 그의 온후하고 고전적인 풍모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또한 시종 나즉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얘기하는 품은 옛 선비의 모습 그대로라 하겠다. …(중략)... 30여 년간을 국악과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 한 명실공히 국악의 재보인 이주환, 춘하추동 풍우를 가리지 않고 후계를 위하여 애쓰는 모습은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고독의 빛이 감도는 눈매며 좀체 열리지 않을 듯 굳게 닫힌 입, 별로 크다고는 할 수 없는 체구도 이주환 씨가 한번 시조를 읊을 적에는 정열의 화신으로 보이기도 한다. <음악신문>, 1960년 12월 1일, '반생을 국악에 바치고'
- 연계정보
- 관련사이트
- 개요
- 관련가치정보
- 관련사이트
- 조순자의홈페이지 영송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