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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기 (1958.1.15~)

    문화재관련정보
    1973.~1980.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전수 장학생 선정 1980.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 선정 1984.1.4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조교 선정 2001.11.30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77.2.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 1981.2. 서울대학교 음악대 국악과 졸업
    생애(약력)
    1976.9. 제1회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전국 가곡가사경연대회 1등 수상 1976.10. 소남상 전국가곡경연대회 1등 수상 1976.10. W.D.R 한국고전음악 특별취재반 내한 취입 1977.10. 제2회 일본 <동아시아의 금> 공연 1980.9.~1985.4. 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 1982.10. 제10회 명창명인대공연 참가 1982.11. 소남 이주환 10주기 추모음악제 참가 1982.11. 제1회 KBS 국악대상 가악부문 신인상 수상 1983.3. 국악예술고등학교 강사 1983.9. 시립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회 거문고 협연 1985.5.~2003. KBS 국악관현악단 단원 1991.~2003. 월하문화재단 이사 1992.11. 제11회 KBS 국악대상 가악부문 본상 수상 1995.~1997. 국악고등학교 가곡 강사 1996.~현재 원광대학교 국악과 강사 1999.11. 국립국악원 화요상설 공연-김영기 여창가곡 발표회 1999.12. 제18회 KBS 국악대상 가악부문 본상 수상 2000.12. 공개행사 발표공연(풍류극장) 2001.10. 공개행사 발표공연(풍류극장) 2002.11. 김영기 여창가곡 발표회(국립국악원 우면당) 2002.11. 제14회 월하문화재단 정기연주회-시따라 노래따라(국립국악원 우면당) 2003.5. 월하 여창가곡 발표회(국립국악원 우면당)
    리뷰
    거문고 부수석 김영기씨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보유자로 지정 “기쁘기도 하지만 부담감이 큽니다. 보다 잘하라는 격려와 채찍으로 생각합니다.” 지난해 말 ‘KBS국악관현악단’은 오랜만에 큰 경사를 맞았다. 거문고 부수석 김영기씨가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보유자로 인정서를 받은 것이다. ‘KBS국악관현악단’의 단원들 개개인은 자기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연주자로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김영기씨의 경우는 아주 특이하다. 거문고의 부수석으로 악기 연주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지만, 국악 가곡에도 국내 최고의 수준을 보유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남다른 노력 때문일게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김영기씨가 오늘날 국악인으로 올곧은 길을 가고 있는 데는 그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김영기씨의 아버지 김용씨는 청년시절 국악이 좋아 국립국악원에서 근무했다. 이를 계기로 그 역시 중요무형문화재 <처용무> 보유자가 될 정도로 국악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국악을 위해 앞날을 예비하고 싶었다. 결국 자신의 어린 딸 김영기를 통해서 새로운 꿈을 키우게 된다. 딸 ‘김영기’가 ‘김용’이라는 개인의 딸이기보다는 국악의 미래를 이끄는 국악의 딸이기를 바랬다. 김영기는 아버지의 깊은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기대에 어긋나지도 않았다. 어려서부터 단소, 가야금, 민요 등을 익히며 국악인의 길로 착실하게 들어섰다. ‘국악사양성소’를 거쳐 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정통 국악연주자로 정통성을 잃지 않은 과정을 밟았다. “1973년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김월하 선생님께 데리고 갔어요. 가타부타 설명 없이 제자로 맡아주시도록 부탁했습니다. 선생님도 그 즉시 가곡 전수를 시작하셨지요. 정말 운명적인 만남이었다고나 할까요?” 김영기는 이렇게 가곡의 정통성을 독보적으로 잇고 있는 김월하 선생의 수제자가 되고 그의 문하에서 28년 간을 공부하면서 16곡의 여창가곡과 26곡의 남창가곡 한바탕을 전수하게 된다. 가곡이란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노래라고 설명되어 있다. 말 그대로 국악의 가곡도 국악의 노래라는 말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초장, 중장, 종장으로 이루어진 시에 곡조를 넣으면 시조가 되는 거다. 음악형식을 중요시하는 가곡의 경우는 가락을 통해서 노랫말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나 시조에 오장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곡의 형식은 주로 조선말엽에 성행했는데 소급해서 올라가 보면 고려가요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렇더라도 창이나 판소리와는 다르게 발전되어 온 것으로 부드럽고 고운 소리를 특징으로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의 고유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해 우리 가곡 고유의 소리는 점차 쇠퇴하고 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김월하 선생의 재능과 노력으로 그 정통성이 유지되었고 이것은 다시 김영기씨로 이어진 것이다. 사실 이러한 가곡은 전국 각지의 몇몇 노인들에 의해서 구전으로 이어지기도 하였지만 김월하 선생처럼 정식으로 배운 경우는 없다. “이번 문화재 지정 전까지만 해도 전수자의 스승이 세상을 떠나야 문화재로 지정 받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목소리를 위주로 하는 무형문화재일 경우, 지정자가 너무 연로하게 되면 목소리의 퇴색으로 진정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잃기 쉬웠습니다. 단지 원로로서의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한 것이었죠. 그래서 ‘문화재지정위원회’는 관념을 바꾸게 된거죠. 기존의 보유자가 생존해 있더라도 다음 세대를 이을 재목이 있다면 전수자로 지정해서 인정받을 수 있게 했죠.” 생각의 전환은 무형문화재로서의 진정한 가치와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었으며 김영기씨는 43살의 나이로 중요무형문화재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젊은 무형문화재로서 김영기씨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다. “가곡이란 장르를 문자로서 체계화를 시키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김월하 선생님께서 정통성을 이어주시긴 했지만 우리의 많은 음악문화가 그랬듯이 가곡 역시 구전으로 이어진 장르입니다. 현재는 악보만 모아놓은 상태로 보다 많은 발굴과 이에 따른 정리작업이 필요하죠. 또 미래의 가곡 전수자들을 위해서 보다 쉽고 재미있게 다듬어야겠지요.” 김영기씨의 최대 고민은 미래에 있다. 빠른 속도와 경쾌한 리듬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신세대들에게 과연 어떤 방법으로 보다 즐겁게 접근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과거의 음악이라고 해서 과거의 모양 그대로를 생전 처음 접하는 아이들에게 들으라고 강요한다면 그들이 과연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 김영기씨는 세대와 나이에 맞게 문자로서 이해시키고 음악으로 확인시키는 작업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광스럽게도 제게 커다란 기회를 주신 분들께 감사 드리며 필생의 일로 알고 미래 세대들에게 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좋은 음악이라는 것을 알려야 할 것이구요. 그러기 위해서는 매년 가곡발표회를 해야 하겠고 음반작업을 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김월하 선생의 제자는 전국에 14명에 불과하다. 더욱이 대학에 가곡과 라고 따로 정해져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또 있다 손치더라도 한 두 명에서 두 세 명 정도이다. 그만큼 가곡은 희귀한 음악에 속한다. 하지만 직접 들어보게 되면 창이나 판소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된다. 뭔지 모를 호소력과 애정이 묻어나는 음악이다. 2002년 새해는 가곡이 보다 넓게 한국 음악의 대표주자로 앞장서기를 바라며, 또 김영기씨의 목소리로 그 빛을 발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 김정희, 1/2월호 여창가곡 예맥을 이어.. “여창가곡의 묘미는 속칭 숙소리 또는 알운성 이라고 이르는 뒷덜미를 거쳐서 나오는 소리죠. 가늘고 아름답고 깨끗하게 줄러야 제맛이 납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의 젊은 재주인 김영기(金英基·32)씨는 말한다. 그의 스승은 여창가곡으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소리인 김월하(金月荷·72)씨다. ”제가 첫 전수생이죠. 선생님께서 연로하신데 제자가 너무 어려서 선생님 모시는 일에 빈틈이 많습니다.” 그의 스승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는 본격적인 제자 양성에 마음을 쓰지 않으셨고 그래서 그가 맏제자가 된 것이다. 그는 1958년 경주에서 태어나 5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다. 국악원의 국악가양성소 중학과정에 입학해서 국악고교, 서울음대 국악과를 나왔으니 젊은 국악인으로서는 정통적인 경로로 성장한 셈이다. “아버님 영향이었죠. 아버님이 국악쪽에 뜻이 크셔서 딸을 그 방향으로 결심하고 키우신 거고 나는 그것을 잘 받아들인 거죠.” 그의 아버지 김용(金龍·58)씨는 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인간문화재(1971년 지정)로 현재 문화재보호협회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계시다. “아버님은 원래 행정학 전공으로 국악과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으셨던 분은 아니었죠. 한데 국악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국악원주변에서 배우고 듣고, 여러가지 일로 참여를 하시다가. 결국 국악원에서 일을 하시게 됐죠. 국악원 장악과에서 일하셨어요.” 그의 아버지는 4남매 맏딸인 그를 국악인으로 키우실 결심을 하고 그 결심대로 정통적으로 교육을 시킨 것이다. “국악분야 성악으로는 중학교 때부터 판소리를 배우기조 했고 일찍부터 듣기도 많이 들었습니다만 가곡은 잘 몰랐었죠. 가곡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때 김월하 선생님의 테이프를 통해서 였어요. 처음 들었을 때 굉장히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묘하고 깨끗한 소리에 홀리는 듯 끌렸어요.” 그러나 국악학교에서도 가곡에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김월하 선생을 직접 찾아 배우는 수 밖에 없었다. 1974년 그가 첫 전수생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나이는 16세, 10년후 이수자가 됐을 때는 26세였다. 이제 그는 가곡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지 17년이 된다. 그러나 대학에서 그는 거문고를 전공했다. “그때만해도 대학에 가곡 전공과정이 없었어요. 개설과 전공 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가야금이었죠. 그러나 그 쪽엔 너무 지원자가 많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장해성 같은 걸 생각해서 거문고를 택했죠.” 1980년~198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원으로 시작해서 1985년 KBS국악관현악단 창단멤버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연주생활을 하는 그의 악기는 그러므로 거문고다. “관현악단에서는 성악쪽에 별도로 단원을 두지 않아요. 그래서 거문고 연주가 주고 필요 할때만 성악쪽 일을 하게 됐죠.” 그러나 가곡의 젊은 재주로서 그는 성악부문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지금까지 전수 받은 가곡 한바탕 15곡 외에도 다른 바탕도 찾아낼 수가 있거든요. 악보가 남아있는 것을 연구해서 살려낼 수가 있으니까요. 김기수 선생님도 책에서 여창가곡88잎이라는 말씀을 하셨듯이 지금 전하는 것보다 찾아낼 것이 더 많죠.” 받아서 지니고 지키는 것으로만 일관해온 스승세대의 할 일이었다면 그는 이런 묻힌 것을 찾아 정리해 내는 것이 젊은 세대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일간스포츠>, 구히서, 1990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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