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월하 (본명:김덕순, 1918.2.8~1996.1.1)
- 문화재관련정보
- 1973.11.11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보유자 인정 1996.1.1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보유자 사망해제
- 학력(계보)
- 1950. 두봉 이병성에게 사사 1958. 이주환, 임석윤, 이창배, 정운산에게 시조, 가곡, 가사 사사
- 생애(약력)
- 1955.7. 부산 동래시우회 사범 1955.9. 경남고등학교(성악) 강사 1955.~1958. 부산교육위원회(성악) 강사 1956. 부산시 원예고등학교(성악) 강사 1961.~1967. 한국정악원 이사장, 사범 1965.12. 공보부장관 공로표창장 수여 1968. 한국국악협회 이사 겸 정악분과위원장 1968.10. 서울신문사 제정 문화대상 수상 1970.1. 한국국악협회 시조분과위원장 1970. 전국시우단체연합회 최초 대회장 1971.4. 공보부장관 공로표창장 1974.4. 국립국악원 연구원 시조창 담당 1980.1. 국립국악원 연구원 가곡 담당 1984.9. 문예진흥원 주최 가곡발표회(문예회관 대극장) 1984.10. 가곡보존회 주최 가곡발표회(세종문화회관 대극장) 1987.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국립국악원) 매년 참가 1988. 국민훈장 목련장 서훈 1989.5. 김월하 여창가곡발표회(국악당 소극장) 1990. 월하예술단 창단 1990. 남북교류음악회 출연 1991. (재)월하문화재단 설립 및 초대 이사장 취임 1992. 한국정가악연구(구 한국전통문화원)창립 1992. 문화훈장 보관장 서훈 1994.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 수상 1995. KBS 국악대상 특별공로상 수상
- 리뷰
- 예술(藝術)과 인생(人生)을 구분할 수 없듯이 시(時)를 음미하면서 세상사를 새겼다 예술(藝術)과 인생(人生)을 따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 제30호 여창(女唱) 가곡(歌曲)의 김월하(金月荷, 71) 여사는 확실히 그의 음악세계도 그녀가 걸어온 옹골찬 삶의 역정과 밀접하게 교직(交織)되어 있음이 분명타고 하겠다. 고희(古稀)를 넘긴 사람치고 고생 안하고 지낸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김월하(金月荷)여사의 과거처럼 풍찬노숙의 모진세월 보낸 사람이 또 있을까 할 정도다. 그는 1917년 2월 8일 경기도 고양군 한진면 보광리,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 이태원 언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난 인생항로는 일찍 시작됐다. 겨우 두살박이 때 당시 창궐했던 호열자 콜레라가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두 오빠의 목숨을 하루 아침에 앗아갔다. 졸지에 넷의 생명을 잃은 그의 아버지는 실성하다시피 하여 집을 나가버렸고 고아가 아닌 고아가 된 그는 이모집으로 가서 살게 됐다. 2년 후 다시 종로구 사간동에 살던 유씨 부인의 수양딸로 들어갔다. “그 때 저의 이름은 유정환이었지요. 나 스스로 그 이름에 어떤 저항감이나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어요.” 김월하 여사는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말했다. 그러다가 십 몇년이 지난 어느날 수원 언니가 좀 내려와 달라는 전보를 쳤다. 거기에 아버지가 와계셨다. 아버지는 그의 과거지사를 들려 주었고 그의 이름은 ‘김덕순’이라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그는 열 여섯살에 혼례를 올렸는데 남편은 양주 군청에 다녔다. 남편의 자전거 뒤에 실려 서울 묘동 교회부설 묘동학원 야간부 고등과에 다녔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또 비극이 찾아들었다. 6ㆍ25가 터지면서 남편은 퇴각하는 공산군 잔당에 붙들려 끌려간 뒤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1ㆍ4 후퇴로 부산에 가게 된 그는 피난살이를 하면서 바느질 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식음을 전폐할 만큼 일에만 매달려 위궤양이란 중병을 앓게 됐다. 부산에 와 있던 시집식구의 도움으로 사경을 헤매던 그는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란 말과 같이 그의 위궤양병 때문에 뒷날 여창 가곡으로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것이다. 즉 그는 몸 회복기에 아침산책을 다녔는데 부산 동대신동 구덕 수원지에서 시조하는 분들을 만나 매일 시조 몇 수는 귀동냥했다. 새벽 산책이 잦아지면서 수원지에서 모이는 사람들과 면식이 익어가게 돼 시조창을 더욱 익히게 된 것이다. 김월하 여사는 “어느 날 저는 귀동냥으로 익힌 시조를 한 수 뽑았지요. 그런데 좌중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라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그 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달을 지고 있다’는 뜻의 아호 월하(月荷)도 그 모임에서 얻었다. 뜻 밖의 ‘데뷔’를 한 그는 이제 명창의 길로 들어섰다. 수원지에 모인 사람들의 주선으로 두봉 이병성씨를 만났다. 이병성씨는 ‘이왕직 아악부’에서 하규일의 지도를 받은 성악의 큰 봉우리였다. 김월하 여사는 이병성씨 밑에서 3년쯤 배우는 동안 시조 12가사를 완창해 버리는 놀라운 학습속도를 보였다. 그 후 김월하 여사는 배우는 학생에서 가르치는 선생 위치가 됐다. 그의 나이 41세 때, 서울 중앙방송국이 이승만 대통령 탄신기념 명창대회를 열었는데 대회에 나가 시조부문의 1등을 차지했다. 그 명창대회를 계기로 당대 최고의 율객으로 꼽히던 이주환씨의 부름을 받았다. “가곡은 하면 할수록 어렵고 두려워요. 자신이 지닌 음성을 다 써야 하는데다가 길게 뽑으면서도 잡스러운 목소리가 들어가면 되지 않으니까 그게 좀 어려워요. 그래서 가곡을 높은 산 꼭대기에서 우람한 통나무를 베어 끌어내리는 소리라고들 그러지요. 스님네들이 범패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학습 영역은 일취월장이었다. 시조의 모든 갈래를 두루 꿰뚫을 뿐 아니라 거문고, 양금과 같은 기악에도 손을 댔다. 그는 한 달이 모자라는 십 년을 채우고 1961년 11월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1969년에 ‘국악협회’ 시조분과위원장에 선입됐고, 1970년에는 ‘전국시우단체총연합회’ 회장에 추대됐다. 그리고 1973년에는 드디어 전통예능인 최고 영예인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여창가곡 예능보유자로 지정됨으로써 그의 입신가도를 달렸다. 1974년부터 ‘국립국악원’ 강사 및 연주원으로 또 국악예술고등학교 강사로 나가면서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으며 서울대, 한양대, 추계예술학교에 출강했다. 한편 그는 치산(治産)에도 솜씨를 보임으로써 재력을 지니게 됐다. 그의 치산술은 근검 절약일 뿐 다른 비방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든 할 수 있는 담배, 음주 등 일체 소비적 생활을 하지 않고 근면 검소한 생활로 벽돌 싸 올리듯 한 단계 두 단계 치산(治産)을 해왔다. 그는 1968년부터 남몰래 육영사업을 해 왔으며 서울대 국악과 학생과 국악고등학교 학생 중에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탐문, 학비를 대주기 시작 16명에게 고등학교 과정 및 대학교 과정 등록금을 전액 내놓는 선행을 했다. 김월하 여사는 “저의 평생 소원이 있다면 학교를 세우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작은 빌딩(싯가 3~4억원)을 국악인들의 회관을 위해 희사하려고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다. 어떤 사람은 김월하 여사를 가리켜 “그는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서도 청정한 하늘을 우러러 맑게 피어나는 청련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그만큼 그녀의 삶이 늘 적극적이고 활동적으로 생기가 넘치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가곡은 우리 전통음악의 예술적 가치 외 보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대중화되기는 어렵다. 이에 비해 시조는 훨씬 서민적이고 다감한 냄새를 풍긴다. 일개 농부에서 위로는 상감에 이르기까지 특히 풍류객들의 애호물이 될 수 있다. 우리 전통음악자산 중 목소리로 울려내는 성악(聲樂)은 기악에서 정악(正樂)과 속악(俗樂)을 구별하듯 정가(正歌)와 속가(俗歌)로 나뉜다. 초ㆍ중ㆍ종 3장의 정형시조에 가락을 붙여 임금 앞이나 양반 상류사회에서 노래하던 가곡과 가사 또 시조창이 정가다. 속가는 뭇 백성들이 자유롭게 지어 즐기던 판소리와 민요ㆍ잡가를 가리킨다. ‘바람은 지동(地動)치듯 불고 궂은 비는 붓듯이 온다. 눈 정(精)에 거른님을 오늘밤 서로 만나자하고 판절처서 맹세받았더니 이 풍우중(風雨中)에 제 어이오리. 진실로 오기곳 오량이면 연분인가 하노라’(가곡) 님 보기 고대하는데 비 바람이 몰아치니 아낙의 속마음이 얼마나 방망이질을 하고 애달프지만, 단정하게 두 손 모으고 앉아 청청한 음색 느지막한 10박 16박 장단에 마음을 다독여낸다. 그 단아함에서 쉽사리 꺼지지도 않고 금방 달아오르지도 않을, 그래서 더 속 깊은 여인의 애정을 듣는다. 흥이 나면 그대로 서러운 대로 정취를 직접 드러내는 속가와 다른 정가만의 독특한 맛이다. “시(詩)를 음미하면서 인생을 다시 새기듯 그렇게 노래를 해요. 고갯짓, 몸짓 하나 까딱 못하고 가만 앉아서 부르는 게 법도니 자연 속 맛으로 걸어갈 밖에. 친 혈육 하나 없는 내게 가곡은 벗이자 생명 그 자체예요.” 노래와 함께 살아온 명창 김월하(金月荷) 여사의 새김이다. <월간 문화재>, 1989년 9월, 제62호 여창가곡 김월하 선가(女唱歌曲 金月荷 善歌) 성명 : 김덕순(金德順) 본관 : 경주(慶州) 생년월일 : 1981년 2월 8일 본적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41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88-2 가족상황 : 자(子) 김혜령(金惠鈴) 1964.7.3 출생 임금순(林今順) 1960.9.16 출생 학력 1936.3. 묘동학원 속성고 졸업 1951.~1954. 현포 김태영 선생에게 거문고, 가야금, 양금, 시조 배움 1953.~1955. 두봉 이병성 선생에게 가사 배움 전력 1955.7. 부산 동래시우회 사범 1955.9 . 경남고등학교(성악) 강사 1955.~1958. 부산교육위원회(성악) 강사 1956. 부산시 원예고등학교(성악) 강사 1961.~1967. 한국정악원 이사장, 사범 1968. 한국국악협회 이사 겸 정악분과위원장 1970.1. 한국국악협회 시조분과위원장 1970.7.17 전국시우단체연합회 최초 대회장 1971.11.15 충무회 문화부 부위원장 취임 1973.11.11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여창(가곡)기예능보유자 인정 경력 1974.4.8 국립국악원 연구원 시조창 담당 1980.1.1 국립국악원 연구원 가곡 담당 1981.12.31 의원면직 기타 외국공연, 시찰 및 수학의 날에는 1976년 11월 1주간 홍콩 아시아예술제 및 1977년 1월(WDR) 초청 서독 공연 참가를 기록하고 있다. 국립국악원 공무원 기록카드 위 ‘국립국악원’ 생활기록부에도 자명하듯 월하 김덕순 여사는 1973년 11월 1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여창가곡 기ㆍ예능보유자에 인정되었다. 이제 그 시말에 관한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95호(1972. 12) 조사자 장사훈ㆍ강한영의 ‘여창가곡’ 지정에 관한 이유서를 초록하면 다음과 같다. “여창가곡은 하순일(河順一), 명완벽, 이승환, 하규일 등 명창의 지침을 받아 이병성, 이주환, 박창진 등이 이어 받아오던 바 이들은 이미 작고하였고 현재로는 오직 김월하 여사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김월하 여사는 두봉 이병성으로부터 가사를 사사하였고, 소남 이주환으로부터 여창가곡을 정확하게 사사하여 이를 계승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현역 창곡가다. 따라서 전통이 깊은 이 여창가곡은 그 예술성과 특성 및 가치로 보아 꼭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 보존되어야 한다고 사료하는 바이다.” 조사보고서 말미에 기재된 김덕순(월하)의 이력서는 ‘국립국악원’ 보존의 이력서와 거의 동일한대로, 다만 말미 상벌의 날에 수상이요 표창의 일을 기록하여 있어 생광이었다. 1965.12.17 공보부장관 공로표창장 1968.10.9 서울신문사 제정 문화대상 수상(성악) 1970. 11.2 예총 회장 감사장 1971.4.10 공보부장관 공로표창장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 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 그(김월하)는 1917년에 경기도 고양군 한진면 보광리,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 이태원 언저리에서 태어났다. 무슨 기구한 팔자를 타고났는지 애달픈 그의 인생 행로는 너무 일찍 시작되었다. 1910년대 말에 창궐했던 호열자 콜레라가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두 오빠의 목숨을 하루 아침에 앗아갔기 때문이다. 염까지 한 어미의 차가운 시신을 더듬으며 젖을 먹겠다 울던 김월하는 그 때 겨우 두살박이에 지나지 않았다. 졸지에 식구 넷을 한꺼번에 잃은 그의 아버지는 거의 실성하다시피 하여 집을 나가 소식 없이 떠돌아다녔고 고아가 아닌 고아가 된 그의 세 자매는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니 큰 언니는 외가로 둘째 언니는 수원 어느 집의 민며느리로 그리고 자신은 이모 집으로 가게 되었다. 이모 집에서 이태쯤을 보낸 그는 종로구 사간동에 살던 유씨 부인의 수양딸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유씨 부인 역시 유일한 피붙이인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수양 딸인 그가 합세하여 모녀 3대만 모여 사는 집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이녁의 피붙이처럼 돌봐주면서도 엄했던 두 모녀 밑에서 지체 있는 집안의 아녀자가 알아야 할 법도와 지켜야 할 행실을 익히며 성장했다. <음악동아>, 1985년 12월호 그러다가 십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수원언니가 좀 내려와 달라는 전보를 쳤다. 거기에는 아버지께서 와 계셨다. 아버지는 그의 과거사를 들려 주었고 그의 이름은 ‘김순덕’이라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그는 열 여섯살에 혼례를 올렸는데 남편은 양주 군청에 다녔다. 남편의 자전거 뒤에 실려 서울 종묘 묘동교회 부설 묘동학원 야간부 고등과에 다녔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또 비극이 찾아 들었다. 6·25가 터지면서 남편은 퇴각하는 공산군 잔당에 붙들려 끌려간 뒤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1·4 후퇴로 부산에 가게 된 그는 피난살이를 하면서 바느질 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식음을 전폐할 만큼 일에만 매달려 위궤양이란 중병을 앓게 됐다. 부산에 와 있던 시집식구의 도움으로 사경을 헤매던 그는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란 말과 같이 그의 위궤양병 때문에 뒷날 여창가곡으로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것이다. 즉 그는 몸 회복기에 아침 산책을 다녔는데 부산 동대신동 구덕 수원지에서 시조하는 분들을 만나 매일 시조 몇 수를 귀동냥했다. 김월하 여사는 어느 날 “저는 귀동냥으로 익힌 시조를 한 수 뽑았지요. 그런데 좌중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라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그 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달을 지고 있다’는 뜻의 아호 월하(月荷)도 그 모임에서 얻었다. 수원지에 모인 사람들의 주선으로 두봉 이병성씨를 만났다. 이병성씨는 ‘이왕직 아악부’에서 하규일의 지도를 받은 성악의 큰 봉우리였다. 김월하 여사는 이병성씨 밑에서 3년쯤 배우는 동안 시조와 12가사를 완창해버리는 놀라운 학습 속도를 보였다. 그 후 김월하 여사는 배우는 학생에서 가르치는 선생 위치가 됐다. 그의 나이 41세 때 서울 중앙방송국이 ‘이승만 대통령 탄신기념 명창대회’를 열었는데 대회에 나가 시조부문 1등을 차지했다. 그 명창대회를 계기로 당대 최고의 율객으로 꼽히던 이주환씨의 부름을 받았다. “가곡은 하면 할수록 어렵고 두려워요. 자신이 지닌 음성을 다 써야 하는데다가 길게 뽑으면서도 잡스러운 목소리가 들어가면 되지 않으니까 그게 좀 어려워요. 그래서 가곡을 높은 산꼭대기에서 우람한 통나무를 베어 끌어내리는 소리라고들 그러지요. 스님네들이 범패를 부르짖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학습 영역은 일취월장이었다. 시조의 모든 갈래를 두루 꿰뚫을 뿐 아니라 거문고, 양금과 같은 기악에도 손을 댔다. 그는 한 달이 모자라는 10년을 채우고 1961년 11월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1969년에 ‘국악협회’ 시조분과위원장에 선입됐고 1970년에는 ‘전국시우단체총연합회’ 회장에 추대됐다. 그리고 1973년에는 드디어 전통예능인 최고 영예인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여창가곡 예능보유자로 지정됨으로써 그의 입신가도를 달렸다. <월간문화재>, 성경린(대한민국 예술원회원), 1989년 9월, 제62호/<계간 국악소식>, 국립국악원제공 여창가곡 김월하 선가(女唱歌曲 金月荷 善歌) Ⅱ 월하(月荷)의 약력은 이 글(여창가곡 김월하 선가) 모두에 국립국악원 공무원 기록카드를 빌려 1970년 후기까지 수록되어 있으나 그 이후 특히 원불교에 귀의하고 평생 근검절약으로 모은 거액의 정재로 ‘월하 문화재단’ 설립 등의 일을 다음에 간추려 소개한다. 원기 68년(1983) 원불교 종로교당 좌산 이광정 교감(현 종법사) 만남 원기 73년(1988)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원기 75년(1990)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께서 구도하셨던 삼밭재 기도원 단독 불사, 월하예술단 창단 원기 76년(1991) 재단법인 월하문화재단 설립 및 월하문화재단 이사장 취임 원기 77년(1992) 문화훈장 보관장 수상 원기 79년(1994)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수상 원기 80년(1995) 12월 27일 대한민국 KBS 국악대상 특별공로상 수상(KBS홀) 인간문화재시대(人間文化財時代)를 연다 가곡 김월하(歌曲 金月荷) 여사 오랫동안 살던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정식으로 국악원의 일원이 된 김여사는 지난 1973년 전효준, 홍원기와 함께 가곡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가 부문의 유일한 여자 보유자다. “비록 늦게 시작했지만 시조와 함께 평생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가는 곳마다 시조가 한 수씩 떠오르니 참 이상하지요. 다 적어보라면 못 적어 내면서도 언제 배웠는지도 기억에 희미한 시조들이 생각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흥얼거리게 돼요. 예를 들어 누가 이사한 새 집에 초대를 하면 즉석에서 그 집에 대한 시조가 떠 오르는 거예요. 한시 백일장 심사를 가서도 주위의 풍경이 마음에 들면 그 자리에서 시조가 술술 풀리고, 그 멋있는 시조나 가곡을 잘 이해 못하는 요즘 세대가 아쉬울 뿐입니다……. 시를 음미하면서 인생을 다시 새기듯 그렇게 노래를 해요. 고개짓 몸짓 하나 까딱 못하고 가만 앉아서 부르는 법도의 자연 속맛으로 걸어갈 밖에. 친 혈육하나 없는 내게 가곡은 벗이자, 생명 그 자체에요.” <이사람 그후>, 박성희, 도서출판 월드북, 1991 월하 김덕순선생이 그 누구 보다도 애중하고 촉망하고, 한 집에서 동거하기도 했고, 더욱 중환으로 입원 중인 쌔 실로 오랫동안 병상을 떠나지 않고 임종성업을 지킨 애재자 조일하의 스승에 대한 회고는 순수하고 애절하다. ‘월하 선생님은 겉으로의 모습은 몹시 까다롭고 어렵고 무섭고 단호한 듯 보이셨으나 늘 외로움을 안은 듯한 깊은 눈동자 속엔 따스함이 가득한 분이셨다. 나는 1985년 중 반년을 선생님 댁에서 산 적이 있다. 선생님은 늘 새벽에 일어나서 집 밖 골목에서 나가 쓰레기를 치우시고 쓸만한 것이 있으면 챙겨 오셨다. 선생님은 아침 쌀을 씻으시며 낮은 목으로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여창가곡 이수대엽을 부르시고 나도 조용히 따라 부르면 “크게 브르거라”하셨다. 저녁에도 움직이시는 동안 나도 따라서 부르거나 조용히 듣곤 하였다. 그것이 선생님께서 주신 산 공부였다는 걸 나는 늦게야 깨달았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 의식을 잃으시고 이리에 있는 원불교 병원으로 옮기셔서 몇 달동안 찾아뵙지 못하였다. 이러면 안되지 싶어 3일 후에 문병을 가야겠다 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꿈에 월하선생님이라고 하는 할머니가 오시어 ‘내가 조일하가 오질 않아 눈을 못 감는다’고 우시더라는 거였다. 그 친구도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병원에 동행 중환자실에 드니 그 친구가 바로 이분이라고 해서 내가 더놀래고 황당했다. ‘선생님 사랑해요 어서 떠나세요 제발’하며 마음 속으로 빌었다. 선생님의 눈동자는 한없이 허공을 바라고 숨소리는 거칠었으나 내 말을 들으셨는지 눈에서 눈물 두줄기가 주르르 떨어졌다. 선가 김월하여사는 원광대학교 부속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가료증 약석의 보람없이 1996년 1월 1일 오후 5시 열반(운명)하였다. 영결식은 1월 5일 오전 9시 흑석동 원불교 서울회관 대법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식순은 이성천(장의위원장)의 개식사, 윤미용(국립국악고등학교장)의 약력보고 조사에 국악인 대표 성경린, 원불교 교단 대표 이선종 교무, 이어 심고 및 일동 경례와 성주 1편이 있고, 독경 및 축원문을 박원석교무가 읽었다. 설법은 좌산 이광정 종법사, 다음 한명희 교수 작시의 시조 <학 떠난 빈터에는>는 제자 일동이 불렀고 끝으로 고인(월하님)의 육성 유음을 듣고 일반 분향이 있은 후 효산 손정윤 교무 작사의 조가 <영겁을 허공같이>가 전체의 합창을 끝으로 폐식되었다. 이날 김영삼 대통령은 ‘일평생을 국악발전과 후진 양성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영면하신 고인의 예술적 혼에 새삼 옷깃을 여미며 우리 국악계의 큰 별이 떨어진 것을 진심으로 애도합니다.’라는 조문을 보내와 학처럼 고고하고 연꽃처럼 맑았던 고인의 그리운 정을 더하게하였다. 조사 사가 머리숙여 참으로 비통한 마음으로 월하 김덕순 여사 영전에 아룁니다. 지난 1995년 한 해를 그렇게 신고를 겪으셨으면서 새해 초하루 그리도 훌훌히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생각하면 그토록 오랫동안 병상에서의 극한 투병이 아무나 가능했을가를 헤아리면 선생은 종생에서까지 너무나 강인했음을 일컬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솔직히 선생의 성장이며 청춘시절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6ㆍ25동란시절 여인의 몸으로 단신 부산에 내려가 그것도 감내하기 어려운 중환으로 있다가 겨우 소강을 얻어 구덕 수원지에 산책 중 이름난 금객이며 시조창에도 능한 현포 김태영을 만나 그에게서 시조를 배우게 된 것이 여자 가객으로의 첫발이었습니다. 그 뒤 국립국악원이 환도하자 그 자리에 부산국악원이 개설되고 두봉 이병성이 정가 사범으로 있게되자 그에게 나아가 시조창의 재수며 새로이 가곡ㆍ가사의 입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으로 하여금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범사는 소남 이주환이었습니다. 1973년 11월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여창가곡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스승의 발을 이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의 행장이야 세인이 익히 아는 바로 이 바닥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창으로 가위 일세를 풍미하였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은 근검ㆍ절약ㆍ저축에 모범을 보이면서 이웃을 돕고 문화산업 등에 재물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좋은 보기가 70평생 악의악식으로 살면서 알뜰히 모은 정재 50억원을 “월하문화재단”설립을 위해 쾌척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선생의 공적에 국가나 사회에서의 보답 또한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종문화대상(1984)’, ‘국민훈장 목련장(1988)’, ‘보관문화훈장(1992)’, ‘자랑스런 서울시민상(1994)’, 그리고 ‘KBS 국악대상 특별공로상’ 수상은 선생도 능히 아실줄 믿습니다. 선생은 타고난 미성과 음악적 재질, 거기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 실로 정명한 학습과 부단한 정진으로 여창가곡의 거장으로 부상하신 것이었습니다. 월하는 타고난 미성이다. 고음에서의 속청은 젖대와 같은 음색을 띠는데 본청과 속청의 음량이 다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한만영- 명주실을 풀 듯 끊이지 않는 성조 금쟁반에 옥을 구리는 듯한 맑고 단아한 성색 -성경린- 여기 시대가 낳은 명창 김월하의 음악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서도 청정한 하늘을 우러러 맑게 피어있는 한떨기 청련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명희- 지음의 논평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말로 화사하기만 합니다. 선생이 종교를 가진 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일찍이 원불교에 입도하여 법호를 명타원 법명을 만주화로 받아 열심한 불심인 걸로 듣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한 마음 선생의 쾌유를 빌고 바랐으나 그예 타계하시니 하늘을 우러러 오열할 따름입니다. 선생께서 뜻하고 이르고자 하신 많은 일 이제 어질고 착한 제자요 후학들이 반드시 성취할 것을 굳게 믿고 의심치 않습니다. 부디 가시는 길 평안하시고 고이 명복하소서 (제공 : 국립국악원, <계간 국악소식>, 1996년 1월5일) 여창가곡 명창 김월하 -달을 지고 세월을 노래하니- “가곡은 하면 할수록 어렵고 두려워요. 자신이 지닌 음성을 다 써야 하는데다가 길게 뽑으면서도 잡스러운 소리를 넣으면 되지 않으니까 그게 좀 어려워요? 그래서 가곡을 높은 산꼭대기에서 우람한 통나무를 베어 끌고 내려오는 소리라고들 그러지요. 스님네들이 범패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지요.” 이제는 환갑을 넘긴 세대 치고 고생 한번 안 하고 지낸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김월하한테서 그의 과거지사를 처음 듣는 사람은 적어도 몇 차례 긴 한숨을 몰아쉬지 않을 수가 없다. 고희의 나이가 얼마 남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가벼운 화장 아래에 숨어 있는 자태는 아직 오십대 여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가 어쩌다가 그토록 모진 세월을 감내해야 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1917년에 경기도 고양군 한진면 보광리,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 이태원 언저리에서 태어났다. 무슨 기구한 팔자를 타고났는지 애달픈 그의 인생행로는 너무 일찍 시작되었다. 1910년대 말에 창궐했던 호열자(콜레라)가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두 오빠의 목숨을 하루아침에 앗아갔기 때문이다. 염까지 한 어미의 차가운 시신을 더듬으며 젖을 먹겠다 울던 김월하는 그때 겨우 두살배기에 지나지 않았다. 졸지에 식구 넷을 한꺼번에 잃은 그의 아버지는 실성하다시피 하여 집을 나가 소식없이 떠돌아 다녔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된 그의 세 자매는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니, 큰언니는 외가로, 둘째는 수원 어느 집 민며느리로, 그리고 자신은 이모집으로 가게 되었다. 이모집에서 이태쯤을 보낸그는 지금의 종로구 사간동에 살던 유씨부인의 수양딸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유씨부인 역시 유일한 피붙이인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수양딸인 그가 합세하여 모녀 3대만 모여 사는 집이 되고 말았다. “수양어머니와 할머니는 첫 인상부터 점잖은 분으로서 보통 여염집의 막 되어먹은 아낙네와는 다른 데가 많았어요. 말씀도 흔치 않으셨고, 또 함부로 물을 수도 없어서 어찌해서 두 분만 사시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요. 두 분은 바느질 일로 살림을 꾸리는 듯했는데, 보통 바느질이 아니라 대가집에서 부탁하는 중한 일감들이었어요. 워낙 맵시가 곱고 야무졌기 때문에 일감은 퍽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는 이녁의 피붙이처럼 돌봐주면서도 엄했던 두 모녀 밑에서 지체 있는 집안의 아녀자가 알아야 할 법도와 지켜야 할 행실을 익히며 성장했다. 물론 그때 그의 이름은 유정환이었고, 스스로도 그 이름에 어떤 저항감이나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제 피붙이들과는 연락도 왕래도 전혀 없었으니까, 제 뿌리가 무엇인지 알 길도 없었고 알고 싶을 턱도 없었지요. 그런데 시집간 이듬해인가 수원에 있던 언니가 찾아와서 아버지가 와 기다리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만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십 몇 년을 잊고 지냈는데다가 행여라도 시집에서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서 그랬지요.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한참 뒤에 수원언니가 급히 좀 내려와달라는 전보를 쳤기에 영문도 모르고 수원에 내려가니 거기에 아버님이 계시던군요.” 거기에서까지 아버지를 외면할 수가 없어서 자식된 예를 차렸다. 오랜 방랑생활에 절어서 초췌한 모습의 아버지는 이제는 다 자라서 혼례까지 올린 여식에게 차마 다시 되뇌이고 싶지 않은 과거지사를 들려주었고, 그의 이름은 유정환이 아니라 김덕순이라는 사실도 일러주었다. 그는 그때까지 까마득하게 몰랐던 그 충격스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었노라고 말했다. 자신의 기구한 과거에 대한 일말의 회한이야 어찌 없을까마는, 그때에 이미 그는 희로애락을 쉽사리 드러내 보이는 법이 없는 아녀자들이 거쳤던 ‘극기훈련’을 이미 끝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위궤양이 열어준 창악 인생 그가 혼례를 올리고 모녀 3대 집에서 나온 것은 열 여섯살 때였다. 남편은 양주군청에 다녔다. 살림살이 어느 구석에도 빈틈이 없고 조신한 아내를 남편은 끔찍이 사랑했으며, 아내의 영특함을 아까워해서 서울묘동교회 부설 묘동학원 야간부 고등과에 진학시킬 만큼 깬 사람이었다. 남편의 자전거 뒤에 실려 묘동학원 야간부에 다니던 시절이 아마도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땅에서 벌어진 비극은 그에게도 예외 없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남편은 사업에 손을 대어 치산(治産)에 힘을 쏟은 한편, 한민당에 관계하는 등으로 사회적 지위를 다졌다. 그러나 그런 부푼 희망도 6ㆍ25가 터지면서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미처 멀리 피난을 떠나지 못한 남편은 용케 서울을 빠져나가 양주에 있던 본가에 피해 있었으나 서울시가 수복된 뒤에 퇴각하는 공산국 잔당에 붙들려 끌려간 뒤로 생사를 알지 못한다. 난리통에 남편과 재산을 잃은 데다가 적 치하에서 부역을 했다는 애매한 누명까지 뒤집어 쓰게 되자, 그는 남편 친구한테서 한민당 당원증 하나를 얻어서 뒤늦게 홀로 피난길에 올랐다. 손재봉틀과 침구 등 남은 가재 도구를 되는 대로 챙겨서 집을 나선 그의 행선지가 당초에는 해인사였는데 정작 발을 디딘 곳은 부산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부산에는 그의 새로운 탄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뿌리도 모른 채 유씨부인의 수양딸 노릇을 한 ‘유정환시대’와 자상하고 듬직한 남편과 함께 꿈 같은 생활을 보낸 ‘김덕순시대’는 막을 내리고, 시조ㆍ가사ㆍ가곡에 걸쳐 여류 창악인으로 이름을 드날리는 ‘김월하시대’가 열린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초기의 피난살이는 여느 피난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낙동강 하구인 하단에서 푸성귀를 해다가 동대신동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고, 고추장장수ㆍ콩나물장수에 하동 김장수까지 하기도 했다. 그런 장사치 생활의 재미도 짭짤했지만 그의 피난 보따리에서 나온 손재봉틀이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서울댁’은 알아주는 기술자로 부상했다. 일찍이 수양어머니 밑에서 조선옷 맵시를 익혔고, 또한 양재학원에 다니면서 양복 만드는 기술까지 배운 터라 무슨 일감이든지 막힐 게 없었다. 때마침 나일론 섬유류가 쏟아져나올 무렵이어서 서울댁의 솜씨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런데 바느질 일이 큰 일을 벌이고 말았다. 먹는 것마저 귀찮을 만큼 일에만 매달려 열 달쯤을 보낸 뒤에야 그의 몸이 크게 상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며칠 시름시름 앓던 병은 급기야 꼼짝 못하고 드러눕는 지경에이르렀건만, 객지에 홀로 떨어진 그를 돌봐줄 손길이 있을 턱이 없었다. 시집에 기별을 전할까 했다가도 남편마저 잃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만 할 따름이었다.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크게 비관한 나머지, 그는 마침내 죽기로 작정하고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다행하게도 마침 그 즈음에 군의관으로 부산에 와 있던 시집의 일가가 그의 소식을 듣고 그를 병원에 옮김으로써 위궤양으로 사경을 헤매던 그를 구원해냈다. 국악으로 입신한 명창의 경우를 보면, 대대로 무업에 종사해온 재인 집안의 내력을 가졌거나, 순회극단의 공연에 반해서 가출을 했거나, 아니면 국악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 집안에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에 견주면 김월하의 경우는 거의 유일한 유형에 속한다. 그가 뒷날 여창가곡으로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것은 바로 그 위궤양 ‘덕택’이기 때문이다. “서너 달 동안 통원 치료를 하면서 차츰 생기를 찾을 무렵이었는데, 동대신동에서 술 도가를 경영하던 어르신 한 분이 저더러 아침 산책을 같이 가는 게 어떠냐고 그래요. 외간 남자하고 새벽 산책을 한다는 게 워낙 망측해서 딱 잘라서 거절했는데, 그 집 아주머님까지 나서서 자꾸 권하는 바람에 새벽 산책을 나섰어요. 산책 가는 곳은, 지금은 없어진 동대신동 구덕수원지였는데 경치가 아주 굉장해요. 그래 그 양반을 따라 수원지에 들어가면, 그 분은 거기서 모이는 분들과 말씀을 나누고 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거기 모이는 분들이 매일 시조 몇 수를 부르고 헤어지더군요. 저는 이만치서 귀동냥만 했지요.” 이병성·이주환에게 사사해 새벽에 수원지에 모인 사람들은 이름을 꼽으면 다 알 만한 법관과 고급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거기 모여서 난리 중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전직이 경찰서장이었던 최아무개한테서 시조를 배우던 시우 동호인들이었다. 새벽 산책이 잦아지면서 수원지에 모이는 사람들과 면식이 익어갈 무렵이었다. 시조창이 무척 어렵다는 술도가집 주인의 말에 슬쩍 면박을 준 일이 있었고, 그 이후 그는 그들 앞에서 귀동냥으로 익힌 시조를 한 수 뽑았다. 좌중이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그때가 그의 나이 서른 여섯 되던 해였다. ‘달은 지고 있다’는 뜻의 고아하고 그윽한 아호 월하(月荷)도 그 모임에서 얻었다. 뜻밖의 ‘데뷔’에 성공한 그는 이제 피난민도 환자도 아니었다. 수원지에 모인 사람들의 주선으로 두봉 이병성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병성은 ‘이왕직 아악부’에서 하규일의 지도를 받은 성악의 큰 봉우리였는데, ‘국립국악원’이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신병 때문에 남아서 그때 설립된 부산국악원에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김월하는 이병성 밑에서 3년쯤 배우는 동안 시조와 12가사를 완창해버리는 놀라운 학습 속도를 보였다. “이병성 선생님 밑에서 몇 년 배우고 나니 일자리가 슬슬 생깁디다. 동래에 사는 유지들이 서른 명쯤 모여 시조창을 배우겠다고 해서 거기 가서 시조를 가르쳤지요. 거기에서도 여러분을 알게 되었고, 아무튼 시조가 대단한 인기를 모으던 시절이었어요. 여기 가서 가르치고 저기 불려가서 부르고…….” 지금으로서는 격세지감마저 자아내는 일이지만 그때의 시조붐은 대단했다고 한다. 웬만한 모임이나 잔치는 물론이거니와 혼례식의 축가도 시조창으로, 심지어는 장례식 만가도 시조창이었다. 그는 동래에서 시조를 가르쳤던 원예고등학교 교장 김홍순의 영결식에서 시조로 만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럴 즈음에, 그러니까 그의 나이 마흔 한 살이었을 때, 그의 이름을 더욱 드날릴 기회가 그를 찾아왔다. 서울중앙방송국이 ‘이승만 대통령 탄신기념 명창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는 부산 시우 동호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 대회에 나갔다가 시조부문의 1등을 차지함으로써 시우 동호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오아시스레코드회사에서 취입을 하고 방송에 출연하는가 하면, 서울 시조객들의 모임에 불려가는 등 그는 갑자기 바쁜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 명창대회를 계기로 하여 당대 최고의 율객으로 꼽히던 이주환의 부름을 받은 것이 무엇보다도 뜻깊은 일이었다. 국립국악원에서 이주환으로부터 가곡 수업을 받는 한편으로, 이병성에게서 시조와 가곡 수업을 계속하는 ‘서울 반, 부산 반’ 생활이었지만 그의 이름은 여기저기서 회자되었고, 그의 창악세계는 이제 탄탄하게 구축되었다. “가곡은 하면 할수록 어렵고 두려워요. 자신이 지닌 음성을 다 써야 하는 데다가 길게 뽑으면서도 잡스러운 목소리가 들어가면 되지 않으니까 그게 좀 어려워요? 그래서 가곡을 높은 산꼭대기에서 우람한 통나무를 베어 끌어내리는 소리라고들 그러지요. 스님네들이 범패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학습 영역은 일취월장이었다. 시조모든 갈래를 두루 꿰뚫었는가 하면, 한시(漢詩) 세갈래도 섭렵했다. 또한 거문고, 양금과 같은 기악에도 숨은 재주를 지니고 있는 그는 곧잘 자신의 스승은 ‘모두 열 세 분’이라고 말한다. 자료제공 : (재)월하문화재단 / <음악동아>, 김명곤, 198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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