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 전통문양 용도별문양
덕수궁 함녕전 입구 수막새(60540) 크게보기 덕수궁 함녕전 입구 수막새(60540) 크게보기
덕수궁 함녕전 입구 수막새(60540)
문양설명
덕수궁은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리다가,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곳에 살면서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는 원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경내가 협소하여 근처의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포함하였으며,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삼았다.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였으며, 당시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불렀다.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즉조당(卽祚堂)과 석어당(昔御堂)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아관파천이후 고종이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1910년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 등이 건립되었다. 또한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동쪽에 있던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덕수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으며,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하였기 때문에 전각 배치도 정연하지 못하다.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함녕전(咸寧殿)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생활공간(침전)으로 잠시 수옥헌(漱玉軒)으 옮겨서 거처하였으나,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긴 후 다시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여기에서 승하하였다. 함녕전은 광무 1년(1897)에 지었는데 광무 8년(1904) 수리공사 중 화재로 불탔고 지금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붙여 평면은 ㄱ자형이다. 지붕 모서리 부분에 잡상을 나열한 점은 침전 건축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특이한 구성이다. 함녕전(咸寧殿)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생활공간(침전)으로 잠시 수옥헌(漱玉軒)으로 옮겨서 거처하였으나,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긴 후 다시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여기에서 승하하였다. 함녕전은 광무 1년(1897)에 지었는데 광무 8년(1904) 수리공사 중 화재로 불탔고 지금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붙여 평면은 ㄱ자형이다. 지붕 모서리 부분에 잡상을 나열한 점은 침전 건축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특이한 구성이다.
함녕전 입구 건물의 수막새로 마구리부분에 봉황을 나타내었다. 봉황은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으며 머리는 바닥을 향하고 있다. 꼬리부분의 깃털은 화려한 편이다.
공공누리 제 1유형 마크 - 출처 표시

한국문화정보원이 창작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예) 본 저작물은 "문화포털" 에서 서비스 되는 전통문양을 활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