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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PD]<독립운동가, 그들의 발걸음 서울에서 만나다> 세 번째 이야기 '백범 김구'

제작
박도윤
재생시간
03:04
등록일
2022-11-23
[대본]
김구 선생의 발자취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의 호 ‘백범’에서도 그의 조국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백범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곧 우리의 민중이고, 민중은 곧 애국심을 가지고 조국독립의 필요성을 깨쳐야 한다는 의미이다. 
1896년 3월, 황해도 치하포의 주막에서 김구는 일본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를 발견하였다.
김구는 그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범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명성황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고 나라의 수치를 씻는다는 우국의 일념으로 그를 처단하였다.
1910년, 김구는 대표적인 항일민족단체인 신민회에서, 조국의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비밀회합에 황해도 지역 자금모금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1919년, 김구는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하고 만세운동을 통해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1930년, 김구는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통치기구의 파괴를 위한 특무대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그는 무장 투쟁을 이어가며 강한 독립 의지를 내비쳤다.
1940년, 김구는 임시정부의 국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광복군이 대일항전을 전개하고 국내진입작전을 시도한 것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는 한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45년,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 직전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이 광복을 맞았지만, 진정한 ‘대한독립’을 이루지 못해 마냥 기뻐하지 못한 김구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백범 김구 선생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김구 선생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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