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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외국인들이 바라본 한양도성

문화포털 기자단 2015-12-10
20세기 초 외국인들이 바라본 한양도성

20세기 초 외국인들이 바라본 한양도성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은 서울을 방문한 관광객들의 관광 필수 코스입니다. 파리의 에펠탑,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처럼 한 나라를 상징하는 건축물 앞에 서면 우리들 대부분은 사진을 찍어 현장을 기록하려했고, 타인의 그런 모습도 많이 봐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풍경이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도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19세기 말, 한국(당시 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은 조선의 다양한 풍경들을 사진과 글, 그림 등 여러 수단을 이용하여 남겼는데요. 한양도성의 옛 모습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산하 한양도성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도성일관(都城一觀)’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방문한 외국인들

 


 

20세기 초 한양도성 성벽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도성일관전시는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선 변화를 거듭한 근대 한양도성이라는 주제의 첫 장에서는, ‘구문팔자타령을 모티브로 한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습니다. 구문팔자타령은 1928년 동아일보에 실린 글로, 한양도성의 당시의 모습과 이후의 변화상을 담았습니다.

 

낯선 이들의 방문이라는 두 번째 장에서는 1890년대 서양 선교사와 여행가, 외교관 등이 한양도성을 보고 기록한 여행기, 사진, 그림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시 한양도성을 본 서양인들은 무척 흥미를 가졌습니다. 그 때 유럽은 산업화와 함께 도시의 팽창을 방해하는 성곽을 허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여전히 도시 전체를 둘러싼 성곽이 존재해 그 모습을 하나하나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왕은 성채를 확충하고, 인접한 언덕과 계곡에 이르는 대규모의 석성을 둘러쌓았다. 성 위에는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 있고 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둥글게 석축을 쌓았다

-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한국’ -

 

성곽과 함께 8개의 문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8개의 크고 작은 문을 통해 아름다운 한국의 건축물을 극찬했습니다. 조선의 수교사절단을 안내 역할을 맡았던 퍼시벌 로웰은 188312, 한국에서 왕의 귀빈으로 지내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성벽에는 일정치 않은 간격으로 여덟 개의 문이 나 있다. 이론상으로는 각각 중요한 방위 및 그 중간 위치를 나타내지만 실제로는 세우기 편리한 곳에 들여놓은 듯하다. 그들이 지닌 중요성만큼이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는 문들은 장안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성벽에 연결돼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문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웅장한 건축물로서 부족함이 없다.”

- 퍼시벌 로웰,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 -

 

 



퍼시벌 로웰의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조선을 소개한 외국인들 중, 독일 선교사 노르베르트 베버는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을 많이 표현한 사람입니다. 1911년과 1925, 두 차례 우리나라를 방문한 베버는 한국의 여러 곳들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한국의 문화, 생활상 등을 사진으로 담았고 심지어 영상으로까지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베버는 한양도성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습니다.

 

나무 사이로 성벽의 네모난 돌들이 어두운 빛깔로 돌출되어 있다. 환한 아침 하늘을 가르는 동소문(혜화문)의 검은 곡선 지붕이 눈길을 끈다. 오후에 성벽 앞을 잠시 산책했다. 초가집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그 뒤로 어두운 총알이 뚫린 오래된 화강암 성벽이 어른 키 높이로 지형을 따라 뻗어 있다. 무너진 성벽이 보수되어 시든 단풍나무의 불타는 갈색 사이로 푸르게 빛난다

- 노르베르트 베버, ‘고요한 아침의 나라’ -

 

 


 

노르베르트 베버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조선의 아이콘이 된 한양도성

 


 

1884년 당시 숭례문(가장 오래된 숭례문 사진)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관광명소가 된 한양도성이라는 세 번째 숭례문이 조선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이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찾은 이방인들이 증가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여러 곳들을 둘러보면서도 꼭 한양도성을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한양도성과 주변 풍경들을 자신의 생각과 함께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성벽은 그것이 서 있는 언덕만큼이나 견고하게 보이도록 설계되었는데, 영국 영사관의 무관인 폭스씨의 조사에 의하면 7.5~12m 이르는 높이에, 총연장 22.5km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 성문들은 무거운 빗장이 걸리고 겉에 쇠를 입혀 보강한 중국양식의 거대하고 무거운 나무문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굳게 닫혀 있다. 이 문들의 화려한 이름은 의로움을 돈독히 하는 문(돈의문)’, ‘예의를 숭상하는 문(숭례문)’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한양도성 정문으로서의 위용이 사라진 숭례문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특히,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은 서울의 상징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혔습니다. 외국인들은 항상 숭례문 근처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곤 했습니다. 수학여행으로 한국에 온 일본 학생들도 숭례문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등 숭례문은 조선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숭례문은 일제에 의해 양쪽 성벽이 허물어졌습니다. 그리고 문으로 오가는 통행이 금지되면서 원래 한양도성 정문으로서의 기능과 상징성을 동시에 잃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늠름한 자태를 뽐냈던 숭례문이 한순간에 도로 위의 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지고 만 것입니다. 관광명소라는 명목 아래 일제강점기 시절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대중문화 속 한양도성

 


 

20세기 초 한양도성이 주 배경이었던 운수 좋은 날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마지막 장에는 대중문화로 만나는 한양도성이라는 주제로, 근대시대로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언급된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영화, 음악 등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좋아하는 문화장르로 우리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설가 이태준이 매일 아침 양치질을 하며 바라봤던 성북동의 성벽, 소설가 박완서가 어린 시절 매동 학교를 다니기 위해 넘어 다녔던 인왕산, ‘운수 좋은 날주인공이 인력거를 끌며 숭례문 근처까지 가는 장면 등 여러 문학 작품들을 통해 서울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자유만세에서 주인공이 도망갈 때 등장하는 낙산 구간 성벽이 관객들에게 익숙함을 선사해주었습니다.

 

대중가요들은 도성을 장소적 배경으로 나타내거나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해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중에서 남대문 타령과 서울노래, 두 곡에서 등장한 한양도성은 서울의 상징이었고 우리나라 민족의 상징으로 나타내는 효과를 가집니다.

 

이번 전시는 시각자료가 많아서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뜻깊고 유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100년 전의 서울과 지금의 서울을 비교하며 관람해보세요.

 


* 전시 안내
- 전시 기간 : 2015.11.06.(금)~2016.02.14.(일)
- 개관 시간 ※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매주 월요일, 1월1일 휴관
1) 09:00~19:00 (평일)
2) 09:00~19:00 (토/일/공휴일, 3~10월)
3) 09:00~18:00 (토/일/공휴일, 11~2월)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283 한양도성박물관
- 홈페이지 : www.museum.seoul.kr
- 입장료 : 무료
- 문의전화 : 02) 724-0243
- 대중교통 :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

 

- 작성자 :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글) / 정미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