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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한국에 전하는 메시지

문화포털 기자단 2015-11-30
독일이 한국에 전하는 메시지

독일이 한국에 전하는 메시지

 

 

한 달 전, 20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렸습니다. 19차 이후, 18개월 만에 개최된 이번 행사에서는 6.25전쟁으로 헤어져 서로 생사를 알 수 없던 가족들이 극적으로 만나며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게 했습니다. 이산가족은 분단 역사의 아픔을 나타내는 상징이자 앞으로 통일을 이뤄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이런 아픔을 잘 아는 국가가 있으니, 바로 독일입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며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당했던 독일은 45년 동안 분단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에 극적인 통일을 이뤄내면서 지구 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 큰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전시 내부


전시 내부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독일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를 잘 알 수 있는 전시가 지난 20151013일부터 1231일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중입니다. 광복 70주년과 독일 통일 25년을 맞이해 <독일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다 - 자유와 평화, 그리고 통일>이라는 독일·한국 교류 특별전은 독일의 분단에서부터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았습니다. 통일의 기쁨을 누렸던 독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한 번 살펴보실까요?

  

 

 

분단’, 2차 세계대전 패전의 대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독일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다 의 작품 폐허가 된 독일을 기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입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폐허와 희생자들을 남긴 채 패전했습니다. 4대 연합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은 독일이 전쟁을 또다시 일으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19452, 얄타회담에서 독일을 4개로 분할하는 데 합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3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격화되면서 1949년 서방 국가들과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서 각각 독립국가를 창설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BRD, 독일연방공화국)과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DDR, 독일민주공화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브란덴부르크 궁전 앞 베를린 장벽


브란덴부르크 궁전 앞 베를린 장벽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독일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다 작품 베를린장벽과 브란덴부르크 궁전을 기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리고 수도 베를린 또한 동과 서로 구분 지었습니다. 베를린은 동독 내에 있었지만 서베를린 지역이 서독 영토가 됨으로써 공산주의 국가 안의 유일한 자본주의 지역으로 남게 됐습니다. 한 도시 내 두 나라가 공존한 베를린은 동쪽과 서쪽의 빈곤과 풍요의 차이가 심했습니다. 당시 서독의 GDP는 동독보다 4배 이상 많은 214달러를 기록했고 서베를린이 더욱 번영했습니다. 가난한 동베를린 지역의 사람들은 서베를린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해에만 30만 명 이상의 동독 이주자가 발생했고, 서독이 경제 부흥과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동독에 강경하게 대하면서 동독은 점점 수세에 몰렸습니다. 많은 사람의 탈출로 인구가 줄어들 위기에 처한 동독은 결국, 1961813일에 베를린 장벽(높이 3.6m, 1.2m, 두께 0.4m)을 세웠습니다. 자국 주민들의 이탈을 막고 감시, 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로써, 베를린 장벽은 독일 분단의 상징물로 남게 됐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는 실제 베를린 장벽의 조각이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도 막을 수 없었던 동서독의 교류

 

전시작품

정지! 국경! 통행금지! () &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 시도하는 주민 (아래)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독일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다 의 작품 베를린장벽에 붙여진 표지판과 당시 모형을 기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입니다)

 

 

동독은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주민들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체제 선전과 조작, 감시 처벌이 자행되면서 자유를 찾고자 하는 주민들의 탈출이 점점 심화됐습니다. 동독 주민들은 지하 터널, 로프, 열기구 등 다양한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독 군인들에 의해 잡혀 체포되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반면, 서독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베를린 장벽의 서쪽 면에 이산가족 상봉과 통일을 염원하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베를린 연설 중인 케네디 대통령


베를린 연설 중인 케네디 대통령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독일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다 의 작품 베를린에서 연설하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기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입니다)

 

서베를린 시민들은 큰 걱정이 앞섰습니다. 서독에 속한 서베를린이 동독 내 있어서 주변에 있는 공산군이 침략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더구나 베를린 장벽 건설에 더하여 1962년 소련의 쿠바 핵 미사일 배치로 동서 간의 긴장이 최고조로 달했습니다. 19636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서베를린을 방문해 자유의 최전선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시달리는 베를린 시민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의 수호 의지를 분명히 전했습니다.

 

Two thousand years ago the proudest boast was “civis Romanus sum”. Today in the world of freedom, the proudest boast is “Ich bin ein Berliner”.

- J.F.케네디, 1963-

 

번역해보면, 2000년 전, 가장 큰 자랑거리는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였습니다. 이제 자유세계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는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당시 발언은 베를린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줬고 독일인의 자긍심을 심어준 최고의 연설이었습니다.

 

 

 

동서독 기본조약을 맺은 양측 국가정상들


동서독 기본조약을 맺은 양측 국가정상들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독일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다 의 작품 동서독 기본조약을 맺는 양 국가 정상들을 기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 사이,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60년대 말 냉전의 해빙기(데탕트)가 되면서 미국과 소련의 이념 대립 갈등이 조금씩 완화되어 갔습니다. 그 사이, 서독과 동독의 교류 또한 활발히 진행됐습니다. 1972년 동서독 기본 조약을 맺으면서 독일 내 분단 상황은 또 다른 국면으로 흘렀습니다.

 

조약체결 쌍방은 유럽의 긴장완화와 안전보장에 기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모든 유럽 국가들의 국경불가침 및 그들의 영토보존과 주권존중, 양독은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사용을 마땅히 포기...서독과 동독 간의 협조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충족시키려는 의도로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 ‘동서독 기본조약’ 1972 -

 

동서독 기본 조약으로 동독과 서독은 이전보다 더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경제, 학술, 문화,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상호 교류가 이루어졌고 동서독인의 상호 방문, 동독인의 서독TV 시청, 전화와 편지 왕래 등 두 국가 간의 정보가 오갔습니다. 특히, 동독인의 서독 TV 시청은 독일통일 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습니다. 동독 정부가 서독 TV 청취를 허용한 이유는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공산체제가 붕괴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안도감에서 비롯됐습니다. 하지만 서독TV는 이를 계기로 동독 주민들의 자유의지를 불태우게 했고 동독 내 시위를 확산시켰으며 통일 열기를 부추기는 촉매 역할을 함으로써 독일의 통일에 이바지했습니다.

  

 

 

지혜로운 외교’ 45년 만에 찾아온 통일

 

시위하는 동독 주민


시위하는 동독 주민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독일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다 의 작품 시위하는 동독 주민을 기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독과 동독의 교류가 점점 가속화되면서 독일 내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여러 심사를 거쳐 허가증을 발급받으면 방문이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동독 주민들의 이주가 계속됐습니다. 1989년에는 13,000여 명의 동독 사람들이 공산국가였던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기도 했습니다. 동독 내에서는 자유의지와 민주화의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동독 정부에 대항하는 많은 청년들의 주도로 많은 데모가 이루어져 민주주의를 요구했습니다.

 

당시 공산주의 진영의 핵심이었던 소련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소련의 개혁에 나선 고르바초프가 동구 공산권에 대한 개입 정책을 폐기했고, 1980년대 말 헝가리와 폴란드를 자유화시켰습니다. 이와 함께 동독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고 언론의 자유와 여행 자유화까지 보장했습니다. 동독 사회에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국민을 감시하던 슈타지(동독 국가보안부)에까지 민중들이 저항했습니다. 이것은 동독 사회 전반적으로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통일에 합의한 서독과 동독 정상


통일에 합의한 서독과 동독 정상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독일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다 의 작품 통일에 합의한 서독과 동독 정상을 기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후, 서독과 동독은 경제, 통화, 사회의 통합을 협상했습니다. 1990831, ‘통일 조약에 조인했고 912일에는 4대 연합국들로부터 주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서독이 미국을 포함해 소련, 영국, 프랑스를 설득하며 통일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1990103, 동독의 다섯 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독일의 통일이 완성됐습니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형태의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유와 평화에 대한 국민의 뜨거운 염원과 관련 당사국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지혜로운 외교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이 통일된 독일을 보며 얻은 교훈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베를린 장벽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베를린 장벽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독일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다 의 작품 베를린 장벽 일부분을 기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입니다)

 

독일은 45년 만에 분단국가에서 통일국가를 이루었습니다. 독일 통일은 국내 사정과 국제 정세가 맞물려 급진적으로 진행돼 이에 대한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동서독 주민들 간의 빈부격차, 지역 간의 불균형 정책 등 지금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독일은 EU(유럽연합)에서 가장 중심 국가로 자리 잡는 등 옛 영광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 밑거름이 바로 통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번 전시에서 나타난 서독의 모습은 우리나라 국민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이주한 이유는 서독이 동독보다 안정되고 부강한 국가사회를 건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제 정세 속에서 주변 국가들과의 활발한 교류와 지혜로운 외교로 통일의 시간을 앞당겼습니다. 무엇보다 독일 국민들의 통일을 향한 염원이 상당했다는 점이 통일의 큰 배경이 됐습니다. 우리나라도 이 점들을 잘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확고한 의지와 적극적인 노력, 통일을 향한 국민의 관심과 염원이 곁들여진다면 한반도의 통일이 멀지 않은 미래에 올 것입니다.

 

통일에 대한 염원을 적는 학생들


통일에 대한 염원을 적는 학생들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독일 통일의 과정을 상세하게 전하는 이번 전시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유익한 시간을 전달합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갈 청소년들에게 독일의 통일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한반도의 통일을 꿈꾸고 그것을 준비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되짚어보는 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통일의 꿈을 이룬 독일, 그 나라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귀 기울여 보면 좋겠습니다.

 

 

* 전시 안내

<독일에서 한국의 통일을 보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통일>

- 전시 기간 : 2015.10.13.()~2015.12.13.()

- 개관 시간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매주 월요일 휴관

1) 09:00~18:00 (, , , )

2) 09:00~21:00 (, )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98

- 홈페이지 : www.much.go.kr

- 입장료 : 무료

- 문의전화 : 02) 3703-9200

- 대중교통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

 

* 참고 자료

-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평화문제연구소, 2011)

- 평화문제연구소 블로그

- ‘베를린 장벽위키미디어

 

- 작성자 :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 정미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