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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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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온조비류신화
내용 정의: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에 관한 건국신화.||역사:백제는 B.C. 18년에 국가를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건국 장소도 대방현, 하남위례성으로 다양하고, 시조 혹은 건국주에 관한 기록에도 온조(溫祚), 비류(沸流)가 등장한다. 백제의 건국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백제시조를 온조 혹은 비류로 들고 있으며, 『삼국사기』 「지리지」나 중국의 정사(正史), 『속일본기(續日本紀)』 등에서는 동명(東明), 우태(優台), 구태(仇台), 도모(都慕)를 언급한다.||줄거리:『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온조왕 즉위년 조에 의하면, 온조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으로,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와서 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였다. 얼마 뒤에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비류이고 둘째가 온조였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았던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온조와 비류는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 한산(漢山)에 이르렀고, 이곳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 18)이다. 비류는 십신의 [의견](/topic/의견)을 따르지 않고 미추홀(彌鄒忽)에 가서 거주하였는데,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살 수 없었으므로 위례성으로 돌아와 살다가 죽었다. 그 뒤 온조는 백성이 날로 즐겁게 따르므로 국호를 백제라고 하였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로써 성씨를 삼았다. 이어 기록된 비류설을 보면, 백제의 시조 비류왕은 그의 아버지가 우태로 북부여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는 졸본 사람 연타발(延陁勃)의 딸 소서노(召西奴)이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을 와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소서노는 우태가 죽은 뒤 북부여에서 온 주몽이 졸본에서 고구려를 세우는 것을 내조하였다. 이에 주몽은 소서노를 왕비로 삼아 특별히 후대하며, 비류와 온조를 자기 아들과 같이 대하였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에 비류는 아우 온조와 더불어 어머니를 모시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한편, 북사나 수서에 의하면,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는 어짊과 믿음이 돈독한 동명의 후손 구태에게 자신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비류국은 동이강국이 되었다고 하는데,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변이:『삼국사기』에 나타난 줄거리조차 위와 같이 차이가 있으며,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는 “시조 온조는 동명의 셋째 아들로서 신체가 크고 심성이 효우(孝友)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해동고승전』 권1 마라난타(摩羅難陀) 조에는 ‘은조(恩祖)’로 표기되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온조설과 비류설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공통점은 비류가 형이고 온조가 동생이며, 이들 형제의 생모와 주몽이 부부이고, 주몽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부여계 출자이고, 남쪽으로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점이다. 차이점을 보면 첫째, 아버지가 온조설에서는 주몽으로 비류설에서는 해부루의 후예인 우태로 나타난다. 둘째, 주몽의 왕위 계승에서 온조설에서는 장인에게 물려받았는데, 비류설에서는 비류 어머니의 도움으로 이룩 되었다. 셋째, 백제 건국에서 온조설에서는 온조가 역동적이지만, 비류설에서는 비류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온조는 단지 이름만 등장한다. 넷째, 온조설에서는 온조와 비류가 한강 유역과 미추홀에 정착하였다가 뒤에 두 영역이 병합됐지만, 비류설에는 비류와 온조가 함께 미추홀에 거주하였다. 이상에서 온조와 비류의 관계를 유추하면, 소서노가 먼저 우태에게 시집을 가서 비류를 낳고 뒤에®주몽에게서 온조를 낳았다고 해석할 수 있어 이들은 이부동모(二父同母)의 형제로 보이기도 한다. 또 각기 일파의 수장으로 미추홀과 위례 지역에 정착하였다가, 위례 지역이 미추홀을 아우른 후 국호를 백제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였으나, 『삼국사기』에서 “부여로써 성씨를 삼았다.”라고 한 것을 “해(解) 씨로 성씨를 삼았다.”라고 고쳐 놓아, 백제의 왕성(王姓)은 부여 씨가 아닌 해 씨가 되었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2 「기이」2 (남부여전백제) 조에 인용된 「소부리군전정주첩(所夫里郡田丁柱貼)」에는 백제왕의 성을 ‘扶(餘)氏’라고 하였으므로, 『삼국유사』에도 백제왕의 성씨로 부여 씨와 해 씨가 있었던 셈이 된다.||분석:백제의 건국신화는 수도가 옮겨질 때마다 전승설화가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온조와 비류는 건국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건국주로서의 의미만 있다. 그리고 한성백제시대에는 온조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고구려의 주몽신화와 다소 차이가 있는 부여계 (동명왕신화)를 차용하였다가, 웅진으로 천도하였을 때는 비류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공주 지역의 (곰나루전설)이나 비류설과 같은 지손계 건국신화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특징:『삼국사기』에 기록된 온조와 비류의 내용은 건국신화와 같이 신이성과 환상성을 가지지 못하고 역사적 기록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온조와 비류가 신화의 주인공이기보다 건국주로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조비류신화)는 초기 백제를 구성한 집단이 천손계인 온조 세력과 지손계인 비류 세력의 연합체임을 알려 준다. 따라서 이들 집단이 추구하는 신화를 보면, 온조계는 부여의 천손계인 (동명왕신화)를 차용하였고. 비류계는 지손계인 금와왕 계열의 신화를 차용하면서 두 족속 간에 협력과 갈등의 양상을 보여 준다.||의의:이 신화는 신화적 서사구조라기보다 역사적 기록에 가깝다. 이들 자료는 나름대로 신화적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백제의 건국신화를 재구성하는 데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 의미 또한 있다.||출처:三國史記, 三國遺事, 海東高僧傳.||참고문헌:민족신화와 건국영웅들(임재해, 천재교육사, 1995), [백제건국신화](/topic/백제건국신화)의 전승양상과 의미(강현모, 비교민속학24, 비교민속학회, 2003), 백제건국전설(현용준, 한국학보8, 일지사, 1977), 백제신화연구(서대석, 백제논총1, 1985),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 지문사, 1982), 현지조사를 통한 백제설화의 연구(최래옥, 동아시아문화연구2,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1982).
연계 기관명 한국민속대백과사전DB
부제
등록일 2017-06-20 00:00
갱신일 2017-06-20
분류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신화
정의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에 관한 건국신화.
집필자 강현모(姜賢模)
출처 민족신화와 건국영웅들(임재해, 천재교육사, 1995), [백제건국신화](/topic/백제건국신화)의 전승양상과 의미(강현모, 비교민속학24, 비교민속학회, 2003), 백제건국전설(현용준, 한국학보8, 일지사, 1977), 백제신화연구(서대석, 백제논총1, 1985),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 지문사, 1982), 현지조사를 통한 백제설화의 연구(최래옥, 동아시아문화연구2,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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