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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어당 석조물(100416) 크게보기 덕수궁 석어당 석조물(100416) 크게보기
덕수궁 석어당 석조물(100416)
문양설명
덕수궁은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리다가,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곳에 살면서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는 원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경내가 협소하여 근처의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포함하였으며,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삼았다.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였으며, 당시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불렀다.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즉조당(卽祚堂)과 석어당(昔御堂)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아관파천이후 고종이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1910년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 등이 건립되었다. 또한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동쪽에 있던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덕수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으며,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하였기 때문에 전각 배치도 정연하지 못하다.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석어당(昔御堂)은 덕수궁 내의 유일한 이층건물이며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같은 해에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건했다. 원래의 석어당은 임란 때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다. 광무 8년(1904) 화재로 원래의 건물은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그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이며 중층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다. 지붕에는 망와(望瓦) 외에는 아무 장식도 없다. 이 건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중층건물이다.
석어당 마당에 놓인 석조물로 기단부에 한 면에 복숭아가 조각되었다. 복숭아는 두 개이며 여러 개의 잎으로 둘러싸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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