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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냥 할 것

작성자 sta * * * * * 등록일2019-02-18
오슬로
오슬로
  • 작성자 평점 8.0점 / 10
  • 전체 평점 8점 / 10
  • 개요 연극14세 이상
  • 기간 2018-10-12~2018-11-04
  • 시간 평일 19시 30분, 주말 15시, 화 쉼
  • 장소 서울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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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갑작스레 발표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극적인 평화협정을 이끌어냈던 노르웨이의 한 부부. 전 세계가 말 그대로 ‘손놓고 있던’ 문제에 뛰어들어 세계를 바꾸었지만, 결코 당사자도 주인공도 될 수 없는 숨은 공로자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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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내 가족 내 친구 내 조국 문제가 아닌, 머나먼 누군가의 고통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그 일을 해야한다고 믿고 당장에 달려나가 행동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귀하고 또 경이로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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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의 이름조차 생소한 머나먼 외국 땅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 현재의 남북관계와 겹쳐지는 경험. 매우 시의적절하게 잘 올라온 연극이다. 정신없이 오가는 핑퐁대사와 끊임없이 좌절되는 협상으로 3시간 동안의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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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외교관 모나와 그의 남편이자 교수인 티에유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근무하던 중 각각 돌과 총을 들고 서로 대치하고 있던 어린 소녀/소년을 보게 된다.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는 '저 아이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두 사람. 당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미국 주도 협상에서 단 한발짝의 진전도 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던 중. 티에유는 양자가 조직이 아닌 개인으로 직접 만나 친밀감과 신뢰를 쌓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협상에 진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진주의 이론을 주장하며 아내와 함께 비밀협상을 추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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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무장투쟁 중인 양측을 협상테이블로 끌어오는 과정, 조국인 노르웨이 외교부를 설득하는 과정, 탁상공론이 아닌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으로 협상가를 업그레이드하는 과정,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놓고 명문화하는 과정.. 어느 것 하나 쉽지 않고 진통은 끝없이 이어지며 타협은 멀다. 계속 도돌이표를 반복하는 전개임에도 긴장감을 잃지 않았던 것은, 이 비밀협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얼마나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지 절절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포기한다면, 우리가 겪은 폭력을 우리 아이들도 그대로 겪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그 두려움. 그 절박함. 그 책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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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싸우다.. 결국 모든 걸 다 엎어버려 이제 끝이구나, 싶은 다음 순간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테이블에 다시 앉아 "첫줄부터 다시 봅시다" 하는 그 과정을 끈덕지게 보여주는 것이 연극 <오슬로>의 가장 큰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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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과정에서 HERstory가 아닌 HIStory라는 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쉽. 협상 당사자들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실존 인물이며 결코 그 공로가 작지 않은 모나는 남편 티에유에 비해 별다른 능력이나 활약 없이 아이캔디로 낭비되는 느낌마저 있었다. 특히 양측 분위기가 매우 험악해지자, 티에유가 모나에게 "당신이 있어야 한다"며 급하게 SOS를 치는 장면은 최악. 모나는 일이 생겨서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했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측은 모나 없이도 분위기가 풀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거기 모인 일곱 남자들의 반응이..;;; “모나는 여신이야! 우린 모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지!” 하면서 축배를 든다. 본인들은 진지하게 모나를 찬양하는 것 같은데, 진짜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었던. 모나 덕분에 화해한 상황이면 이해하겠지만, 모나는 적어도 이때만큼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의미없는 립서비스 딱 그거잖아. 전체적으로 계속 협상자리에 붙어있는 티에유와 달리, 현장에 없는 모나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덜 비춰지는 편. 오히려 요리사인 토릴의 와플이 더 구체적으로 칭찬받는 듯?? 실질적 권한을 가진 모나 없었으면 티에유는 그냥 말많은 이상주의자에 불과한데.. 모나 묘사에 좀 더 신경써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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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도 배우는 늘 그렇듯 개짱이었고 모나라는 캐릭터 자체도 엄청나게 매력적이었는데 무대가 제대로 받쳐주지 못했다. 나에게 모나는 이상주의-현실주의의 균형을 이룬 이상적인 외교관처럼 보였거든. 관료주의와 패권주의 늪에 빠지지 않고, 양심 있는 개인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기에 취하지 않는. 극 중 이스라엘 군사 전문가 요엘 싱어가 모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냐고. 나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아무런 이득도 없는 남의 나라 일에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렇게까지 애써주는 게 믿을 수가 없는 거지. 그러자 모나는 답한다. "그럼 설명해드려도 모르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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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결국 그렇게 나눠지는 것이다. 경험해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경험하지 않을 타인의 고통에 진심으로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전자가 세상을 바꾼다. 아주 조금씩, 옳은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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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협정은 역사적으로 성공작이자 실패작이다. 협정은 극적으로 타결됐지만, 양측의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협상을 이끌었던 당사자들은 살해당하거나, 정치적 생명이 끊겼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씁쓸해하는 모나와 관객들을 향해 티에유는 말한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을 보지 마세요. 우리가 피와 눈물과 증오를 뚫고, 얼마나 멀리에서부터 왔는지를 보세요. 우리가 그렇게까지나 멀리에서 왔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멀리까지 갈 수 있을지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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