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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으로

작품명
빛 속으로
저자
김사량(金史良)
구분
1930년대
작품소개
동경제국대학에 다니는 ‘나’는 S협회 근처에서 야학을 가르치는데, 늘 음울하고 말이 없으면서 근처를 맴도는 야마다 하루오라는 아이를 주목하게 된다. 한국인인 나는 ‘남선생’으로 불리어야 맞지만 아이들은 일본식으로 ‘미나미 선생’으로 부르게 되는데, 나는 일본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바로잡지 않고 그냥 둔다. 아동부 학생들이 모두 사흘간 고원캠프를 가는데, 나는 함께 가지 않고, 떠나는 다른 학생들을 옥상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는 야마다를 발견한다. 마침 당번이라 캠프를 안 가게 된 나는 야마다와 시내에 나가기로 하고, 야마다는 조선인인 내가 동경제국대학에 다닌다는 것을 신기해하며 따라 나선다. 그러나 야마다의 엄마가 사고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나는 급히 병원으로 따라 간다. 알고 보니 야마다의 어머니는 조선인으로, 남편에게 번번이 구타를 당하며 살고 있었고 그 남편인 ‘반헤이’는 나와 잠시 같은 유치장에 있었던 사람으로 그 역시 조선인임을 알게 된다. 야마다가 엄마의 병문안을 오게 되고 둘은 소풍을 간다. 무용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는 야마다는 나를 ‘남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저자
김사량(金史良, 1914~1950) 본명은 시창(詩唱). 1914년 3월 3일 평남 평양 출생. 1913년 평양고보 5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에 자극받아 일본군 배속장교 배척운동을 하다가 동맹휴업 주동자로 퇴교당했다. 그 후 일본에 건너가 사가고교(佐賀高校) 문과 을류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1943년 귀국하여 일본군 보도반원으로 북부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연안으로 탈출, 팔로군 조선의용군 기자로 활동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광복 후 북한에서 활동하였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종군작가로 참전하였다. 1950년 10월에서 11월 사이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상하다가 지병인 심장병 악화로 낙오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6년 동인지 <제방>을 발간하고, 일어로 된 처녀작 <토성랑>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평양 근교로 쫓겨나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거지떼와 처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움막 하층민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에 비해 <빛 속으로>(1935)는 일제 정치집단이 내세웠던 내선일체의 불합리성을 밝힌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한국적인 현실을 밀도 있게 드러냄으로써 식민지적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0년 <빛 속으로>가 아쿠다카와상(芥川賞) 후보로 올라 <문예춘추>에 실리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 단편소설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 <천마>, <무궁일가> 등과 장편소설 <낙조>, <태백산맥> 등이 있다. 이밖에 장편기행문인 <노마만리>와 희곡 <호접>, <더벙이와 배뱅이>, <붓똘의 군복>, <산채생활기>, <귀국일록> 등이 있으며, 일어창작집 <고향>이 있다. 김사량은 조선의 작가이다. 하지만 36세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그가 짧은 인생의 대부분을 지낸 것은 고국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의 시대였다. 게다가 그런 시대의 1931년부터 1942년까지 약 12년 동안, 그는 도쿄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생활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8년 동안과 작가 생활에 들어서고 나서의 4년 간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가장 혈기 왕성한 청춘 시대를 그는 일본에서 지낸 것이 된다. 김사량이 작가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39년에 들어서고 나서의 일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작가가 된 건 아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 작품의 습작을 시작하여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사가고등학교 출신의 친구들과 함께 문예동인지 <제방>을 발족시키고 여기에 습작을 게재하여 나름대로 문학수업을 쌓았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인 김사량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문학수업을 쌓는다는 의미보다 풍부한 일본어 표현력과 원숙해진 일본어 문장, 나아가서는 일본어로 쓰인 문학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김사량은 그런 노력을 거듭하면서까지 왜 소설가가 되는 길을 선택한 걸까. 일찍부터 그가 문학을 애호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처음 일본에 도항해 온 다음 해, 아마도 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을 터인 그는 김시창이라는 본명으로 <시정초추>라는 제목의 한 편의 시를, 당시는 경성이라 불린 오늘의 서울에서 발행되던 조선어 잡지 <동광>에 투고하였다. 이처럼 문학을 애호하는 그가 일본으로 도항해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무렵 조선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학교나 고등학교, 대학 등에 의무화된 군사 교련의 담당교사(배속장교)인 일본 직업 군인을 배척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퇴학 처분을 받아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 민족의 현실을 그가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일본에 도항해 와서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이윽고 대학에 진학하여 도쿄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당시 이주 조선인이라 불리던 조선 동포의 대부분이 민족적인 멸시나 차별에 의해 가난한 생활을 근근이 해나가는 등 여러 가지로 비참한 지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빛 속으로>, <무궁일가>, <십장 꼽새> 등에 묘사되고 있는 이주 조선인의 현실이 그 한 모습이다. 이 작품들 중에 <빛 속으로>의 무대로 선정되어 있는 현재는 구로다 구가 된 당시의 혼죠 구 일부 지역은 공교롭게도 필자의 고향이며, 이 소설에 묘사되고 있는 시기 또한 필자의 소년 시대와 거의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주 조선인 대부분이 처한 힘든 현실을 알게 되고 또한 그 모습을 목격함으로써, 문학을 애호하는 그가 응시한 것을 소설을 통해 그려내려고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40년도 상반기의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으로 뽑혀 사토 하루오로부터 ‘민족의 비통을 섬세히 그려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단편 <빛 속으로>는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다. 또 이로 인해 김사량이라는 작가가 탄생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빨리 빛 속으로 나아가고 싶다’, 안우식, <빛 속으로>, 소담출판사, 2001 (……) 김사량은 북(북한)에서도 남(남한)에서도 환상의 작가였다. 북한에서는 일찍이 작품집이 편찬되고 출판도 이루어지긴 했다. 하지만 임화와 한설야 등 일제시대에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 측에 서서 해방 때까지 고난을 맛보았던 문학가들이 계속해서 숙청되고 실각되어 가는 과정에서, 아마도 그의 문학작품 역시 ‘김일성’의 혁명 업적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은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일제시대에 일본어로 발표한 것을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할 정도로 북은 ‘문화적 국가’가 아니었다. 이미 김사량은 북의 문학적 독자들(그런 사람들이 다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의 기억에서 가맣게 잊혀져 버린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남한에 있어서도, 김사량은 이중으로 터부시되어 온 작가였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직전에 북경에서 중국 해방 지구로 탈출했다. 거기서 그는 조선의용군에 참가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해방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평양으로 들어가 북한의 인민 예술가로서 문학 창작을 하고 지도적인 입장에 섰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일본어로 소설을 썼고 그것이 일본의 대표적인 잡지 <문예춘추>나 <문예>에 게재되었다는 것은 결코 그의 경력을 빛내주지 못했다. 그는 평양 근방의 지주의 아들이었으며, 일본 동경제국대학(현 동경대의 전신)에 유학했다. 그리고 해방 전 서울(당시는 경성)에 있었을 무렵에는 어용 잡지라고 불리던 <국민문학>에 친일적인 장편 소설을 연재하기도 했었다. 다시 말해, 김사량은 ‘월북 작가’(그의 경우는 해방 직후 중국에서 북쪽으로 들어간 것이지만)임과 동시에 ‘친일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소개되거나 번역, 출판되지 않은 이유는 그런 의미에서 너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 김사량이 일제시대에 <국민문학>에 <태백산맥>이나 <바다의 노래>라는 장편 소설을 연재했다고 해서 그를 당장에 친일 작가라고 부르는 것이 부당한 것처럼, 그가 북한에서 인민 예술가로서 활동하며 한국 전쟁에 북한측 종군 작가로 남하했다고 해서 그를 공산주의자, 더구나 ‘김일성주의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제시대에 얼마나 심하게 총독부 당국에 의한 검열과 압박과 탄압이 있었는지, 그 속에서 본의 아니게 면종복배의 문장을 쓸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 문학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한국의 문학가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하물며 일제 시대에 <빛 속으로>라는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의 유력한 후보가 되고, <문예춘추>, <문예>라는 일본의 대표적인 잡지에 소설을 발표하는 등, 일본 문단에서 활동했던 김사량이 ‘붓을 꺾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는 특별고등경찰(정치, 사상,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된 일본 경찰. 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의 지령으로 해체됨)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김사량은 그런 가운데서도 <국민문학>의 ‘국민’(물론 이것은 대일본제국의 ‘국민’이었다)을 ‘nation(민족)’이라고 바꿔 부르며 ‘민족주의’의 테마를 그 작품세계의 저류로서 감추어 두었다. 김사량이 북한에서 문학가로서 활약했다 해도, 그로 인해 그가 지니고 있던 휴머니즘의 표현, 그리고 늘 사회적 상위자보다 하층 사람들, 서민들, 약자나 패자, 빈자를 향하고 있던 그의 동정과 공감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김사량뿐만 아니라 북한에 사상과 이념을 지니고 건너간 사람들(임화와 이태준도 그럴 것으로 본다)은 그곳에 진정으로 민족으로서 자립하고 해방된 사회가 실현될 것으로 생각했다. 귀천이 다름을 강조하는 신분 제도인 지주나 소작인 제도나 자본가와 노동자의 차별이 없는 평등 사회가 실현될 것이라고, 그들은 너무나 소박하고 단순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 땅에 실제로 실현된 것은 ‘절대적 김일성 왕조’라고나 해야 할, 현대 세계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드문 부자 세습의 독재체제 국가였으며, 그들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의 꿈은 완전히 배신당하고 만 것이다. 김사량은 오히려 그러한 북의 현상을 모른 채 죽은 것만 해도 행복한 편이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북에서도 남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김사량은 오히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동질의 ‘군사독재 국가’였던 남북 양국의 권력층으로부터 기피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일본어로 소설을 쓴 것은 일본인에게 아첨하기 위해서도 일본 문학에 무릎 꿇고 경배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민족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단 ‘민족’이라는 것을 괄호 안에 묶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주위 국가나 민족과 마찰을 일으키는 민족주의는 진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자가 자기의 독재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족’이라는 경계선으로 ‘쇄국’을 펴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오늘날까지 북한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민족주의는 그러한 가짜 민족주의인 것이다. 오늘에야 비로소, 늘 민족은,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적인 약자로서의 서민, 인민, 민중을 생각해 온 김사량 같은 문학가들이 상기되고 또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편협한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며 웃어 넘길 수 있는 뿌리 깊은 휴머니즘과 인터내셔널리즘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민족주의와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그의 민족주의와 대치되는 것은 다름 아닌 시대주의, 독재주의, 귀족주의, 제국주의 등과 같은 안티휴머니즘인 것이다. 김사량은 그런 것들에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반세기 동안 반도의 남북 양쪽에서 ‘행방 불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문학 작품은 부활했다. 이제 한국인은 이 ‘민족의 아들’을 다시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되살아나는 김사량’, 가와무라 미나토, <빛 속으로>, 소담출판사, 2001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빛 속으로>, 김사량, 소담출판사, 2001 <김사량 평전>, 안우식, 문학과지성사, 2000 <비평의 어둠걷기>, 정현기, 민음사, 1991 <오늘의 문학과 비평>, 김윤식, 문예출판사, 1988 <아리랑의 비가: 민족주의 작가 김사량의 비극적인 생애>, 안우식, 열음사, 1987 <한국프로문학비평연구>, 김시태, 아세아문화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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