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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궤범(樂學軌範)

문헌명
악학궤범(樂學軌範)
저자
성현(成俔) 외
개요
조선시대 음악의 유일한 지침이 된 9권 3책의 악전(樂典). 1493년(성종 24) 왕명에 따라 예조판서 성현(成俔)을 비롯한 유자광(柳子光)·신말평(申末平)·박곤(朴棍)·김복근(金福根) 등이 엮은 악규집(樂規集)이다. 당시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된 의궤(儀軌)와 악보(樂譜)가 파손되어 소략(疏略)하자 이를 교정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저자
성현(成俔, 1439~1504) 조선 초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시호는 문재(文載). 성현은 1462년(세조 8) 23세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466년 27세로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되었다. 홍문관정자·경연관(經筵官)·예문관수찬·승문원교검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형 임(任)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었는데,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觀光錄)>을 만들었다. 1475년 다시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147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때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1488년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올랐다. 성현은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으며 유자광(柳子光) 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에서 <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북전(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한편으로는 관상감·사역원·전의감(殿醫監)·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에 한성부판윤·공조판서·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으나 그 뒤에 신원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의 문집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조선 전기의 정치·사회·제도·문화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밖의 저서로는 <허백당집(虛白堂集)>·<악학궤범>·<용재총화>·<풍아록(風雅錄)>·<태평통재(太平通載)>·<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 등이 대표적이다.
내용과 특징
<악학궤범(樂學軌範)>은 당시 장악원의 의궤와 악보가 오래되어 훼손되고, 이 밖에 요행히 남은 것들도 모두 엉성하고 틀려서, 그것을 다른 것과 대조하며 교정하기 위해 새로이 편찬한 것이다. 편찬자들 중에서도 성현은 장악원의 제조(提調)를 맡았던 만큼 음악이 따르는 궁중의 전례(典禮)에 실제로 참여하여 음악에 정통하였으므로, 이 책을 편찬함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후 전에 있던 악기와 악제가 불타서 없어졌으나, <악학궤범>만은 되찾아 1610년(광해군 2)에 복각되었으며, 1655년(효종 6)과 1743년(영조 19)에 다시 복각되었다. 1933년 고전간행회(古典刊行會)에서 영인으로 간행되었으며, 1968년에는 임진란전판(壬辰亂前版)이 이홍직(李弘稙)에 의하여 일본에서 발견되어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영인본으로 발행되었고, 그 뒤 1975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으로 발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최고본은 1610년의 태백산본(太白山本)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1979년에는 <국역악학궤범>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되었다. 2권으로 나뉘었는데, 1권에는 권1부터 권4까지를, 2권에서는 권5부터 권9까지를 각각 주석을 달아 설명하고 있다. 국역 대본은 임진왜란 이전 본인 일본 호사문고본(蓬佐文庫本)이다. 내용을 보면 권1은 60조도(調圖)로 시작하는데, 궁(宮)에 의하여 60조의 중심음(中心音)을 빨리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으나, 이 60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론에 그쳤고, 그 중 12궁조만이 실제 사용되었다. 권2는 아악진설도설(雅樂陳設圖說)과 속악진설도설(俗樂陳設圖說)을, 권3에서는 <고려사> 악지의 당악정재(唐樂呈才)와 속악정재(俗樂呈才)를 설명하고 있다. 권4에서는 성종조의 당악정재도의(唐樂呈才圖儀)를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권3에 없는 박(拍)을 추가하여 그 박으로 춤사위의 변하는 것을 일일이 알려주며, 단순한 정재홀기(呈才笏記)에 그치지 않고 전래의 당악정재를 완전히 보존하려는 의도를 엿보게 한다. 권5에서는 성종 때의 향악정재도의(鄕樂呈才圖儀)를 소상하게 기술하고 그림으로 보이는 것 이외에 한글로 적힌 <동동>·<정읍>·<처용가>·<진작(眞勺)>의 노래를 보여 준다. <동동>과 <정읍>의 가사는 <대악후보(大樂後譜)>와 <악장가사(樂章歌詞)>에도 없고, 오직 <악학궤범>에서만 볼 수 있는 노래이여서 국문학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권6의 아부악기도설(雅部樂器圖說)과 권7의 당부악기도설(唐部樂器圖說)은 먼저 악기의 전체 모양을 그림으로 보이고, 그 그림에다 악기의 치수를 일일이 적고, 그 재료를 설명하였다. 이는 실제 악기제작에 참고가 되게 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임을 알 수 있다. 권8 중 당악정재의물도설(唐樂呈才儀物圖說)은 당악정재에 쓰이는 의물과 복식을 그림으로 전체 모양을 그리고 여기에다 치수를 기입하고 그에 쓰이는 재료를 적어서, 실제 그 제작을 가능하게 설명하고 있다. 향악정재악기도설(鄕樂呈才樂器圖說)은 아박(牙拍)·향발(響墩)·무고(舞鼓)·후도처용무(後度處容舞)에서 춤추는 사람이 쓰는 악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여기에다 치수를 기입, 설명한 것이다. 권9의 관복도설(冠服圖說)은 악사(樂師)와 악공(樂工)들의 관복, 세종 때 회례연에 아악이 사용된 때의 무무공인(武舞工人)의 복식, 처용관복(處容冠服)·무동관복(舞童冠服)·여기복식(女妓服飾)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치수를 적어 그 책을 보고 관복을 지을 수 있게 설명하였다. 즉 <악학궤범>의 내용은 12율의 결정(決定)과 여러 제향에 쓰이는 악조(樂調)에서부터 악기의 진설(陳設), 정재춤의 진퇴(進退), 악기·의물(儀物)·관복(冠服)에 이르기까지, 제향·조회·연향의 음악 연주에 필요한 사항들을 빠짐없이 망라하였으며, 특히 성종 당시의 아악·당악·향악 등 음악 전반을 포함하였다. 설명방법은 서술법을 요하지 않고, 음악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린 기술법을 채택하였는데, 그 내용이 치밀하고 정확하게 기술되어, 음악의 유실(遺失)을 방지하려는 찬정(撰定: 詩文을 지어서 골라 정함)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오늘날에도 성종 당시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기술한 <악학궤범>은 끊겨 없어진 음악을 복구하는 실용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면에서도 중요시된다. 성종 당시의 음악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음악을 비교,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며, 또 한편 <동동>과 <정읍>의 가사는 국어국문학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연계정보
-수제천(壽齊天)
-당악정재
-향악정재
-초적(草笛)
-동동(動動)
-정과정(鄭瓜亭)
-정읍사(井邑詞)
-한림별곡(翰林別曲)
-납씨가(納氏歌)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악장가사(樂章歌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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