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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溫達)

작품명
온달(溫達)
장르
전·전기
작품소개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는 온달의 일대기는 설화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니고 있어 온달열전은 민간전승을 통해서 형성된 설화가 편찬자에 의해 다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온달설화’는 한낱 평민에서 부마에 오르고 무장으로 이름을 떨친 온달장군의 인물설화이며, 역사상 실존인물을 다룬 역사설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영웅전설의 일반적인 구조처럼 온달의 죽음으로 이야기의 결말을 맺는 이 작품은 그 문학성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내용
국문풀이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원)왕(平岡(原)王) 때(서기 559∼90)의 사람이다. 얼굴이 파리[龍鍾(용종)]하여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心中(심중)]는 명랑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과 해어진 신으로 시정간(市井間)에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바보 온달(溫達)이라 하였다. 평강왕(平岡王)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희롱하여,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며, 왕은 매양 말하였다. 그런데 딸의 나이 이팔(16세)이 되자 상부(上部: 동부(東部)) 고씨(高氏)에게로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항상 말씀이,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필부도 식언(食言: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거늘 하물며 지존(至尊)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왕자(王者)는 희언(戲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네가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있을 수 있으랴?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에 이르렀다. 맹인 노모가 있음을 보고 앞으로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으니, 노모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이 가까이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은즉 반드시 천하의 귀인이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에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하였다. 공주가 그 집에서 나와 걸어서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공주가 더불어 소회를 말하니 온달이 성을 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할 바가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내 곁으로 오지 말라” 하며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는 혼자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서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자세한 것을 말하였는데,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거처할 곳이 못 되오” 하였다. 공주가 대답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만 같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에 금팔찌를 팔아 전지·주택·노비·우마와 기물 등을 사니 용품이 다 갖추어졌다. 처음 말을 살 때에 공주는 온달에게 이르기를 “아예 시장인의 말을 사지 말고, 꼭 국마(國馬)를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 하였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였는데, 공주가 먹이기를 부지런히 하여 말이 날마다 살찌고 또 건강해졌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樂浪)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신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나섰다. 이에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갔는데, 그 달리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에 서고 포획하는 짐승도 많아서,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 그 성명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어 요동(遼東)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배산(拜山) 들에서 맞아 싸웠는데,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명을 베니, 여러 군사가 승승분격(乘勝奮擊)하여 크게 이겼다. 공을 의논할 때에 온달로 제일을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가탄하여, “이 사람은 나의 사위라” 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며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을 삼았다. 이로 해서 은총과 영화가 더욱 우악하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양강왕(陽岡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통한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우신(愚臣)을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雞立峴: 조령(鳥嶺)))과 죽령(竹嶺) 이서(以西: 이북(以北))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지금의 광장진(廣壯津) 북쪽 아차산(峨嵯山)) 아래서 싸우다가 신라군(新羅軍)의 유시(流矢)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 장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영구(靈柩)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사생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 하고 드디어 들어서 장사 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비통해 하였다. * 유시(流矢)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 : 이때 조령(鳥嶺)·죽령(竹嶺) 이북의 한강 전유역은 신라의 소유로 되어 있었으므로 이것을 탈환코자 하여 비장한 결심을 하고 출정한 온달이 하단성하(河旦城下)에서 신라군의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였다는 것은 온달이 한수의 도강작전에 있어 아단성에서 쏟아져 나온 신라군의 방해공작에 의해 실패를 당하였던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참고: <삼국사기>, 이병도 역주, 을유문화사, 1996
해설
바보 온달로 구전되는 인물전설은 강화도 일대와 중부지방에서 주로 전승된다. 그리고 갈등구조상 동일유형으로 파악되는 쫓겨난 딸과 숯구이 총각에 얽힌 민담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갈등구조상 동일 유형인 숯구이 총각 민담에서는 세 딸을 둔 아버지와 자기 복에 먹고 산다고 해서 쫓겨난 셋째 딸,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숯구이 총각이 등장한다. 인물과 배경은 다르나 유형구조와 유형적 차원의 주제는 온달설화와 다름없다. 한편 화소들이 백제의 무왕설화(武王說話)와 유사해 동일 유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설화가 남녀간의 신분적 갈등을 다룬 것이라면, <온달설화>는 부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다. 사기와 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King Lear)>의 줄거리가 이와 비슷한 것을 보면, 서구에도 이와 같은 유형의 설화가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온달전>은 유기적인 대립구조로 형상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보온달과 울보공주에 대한 표면적 인식의 한계가 온달장군과 주체적 삶을 실현한 공주에 의해 극복됨으로써 기존질서의 허위를 비판하고 근대적인 민중의식과 여성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당대의 설화문학이 가지는 민중적 미의식과 역사의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주제는 부녀간의 갈등을 통해서 부권중심의 전통적인 도덕률을 비판하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주체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여성 자체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성취와 아버지의 인정에 의한 것이므로, 일정한 시대적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한편 벽화고분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자체의 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 6세기 단계의 고구려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의 검토가 요청된다. 온달의 출신은 고구려 최고지배세력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어 왕족과의 통혼권 밖에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평강왕의 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고, 나아가 국왕의 측근세력으로서 자기위치를 신장시켜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고구려 귀족세력간의 다툼으로 인해 고구려 지배질서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연계정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삼국사기(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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