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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전(孔方傳)

작품명
공방전(孔方傳)
저자
임춘(林椿)
장르
전·전기
작품소개
<공방전(孔方傳)>은 고려시대 문인 임춘이 지은 가전체소설로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권5와 <동문선(東文選)> 권100에 실려 있다. ‘공방(孔方)’이란 엽전에 뚫린 네모난 구멍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 작품은 엽전을 의인화(擬人化)한 우화이다. 이 작품은 공방의 존재가 삶의 문제를 그릇되게 하므로 후환을 막으려면 그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난세를 만나 참담한 가난 속에 지내다 일찍 죽고 만 작자의 돈의 폐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저자
임춘(林椿, 생몰년 미상) 고려 중·후기의 문인으로 예천 임씨(醴泉林氏)의 시조이다.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로 문헌을 상고하면 의종 무렵에 태어나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건국공신의 후예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할아버지 임중간(林仲幹)과 상서(尙書)를 지낸 아버지 임광비(林光庇) 및 한림원학사를 지낸 큰아버지 임종비(林宗庇)에 이르러 구귀족사회에 문학적 명성으로 기반이 닦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입신할 것을 표방하여 무신란 이전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다가 20세 전후에 무신란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입었다. 그는 다행히 겨우 피신하여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조상 대대의 공음전(功蔭田: 고려 시대 공신과 오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공을 따져 지급하던 토지)까지 탈취당하고 말았다. 개경에서 5년간 은신하다가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피신하여 약 7년여의 유락(流落)을 겪었다. 그런 생활 중에서도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벼슬을 구하는 편지를 쓰는 등의 자천(自薦)을 시도하기도 하고 다시 개경으로 올라와 과거준비까지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와 빈곤 속에 방황하다가 일찍 죽고 말았다. 임춘은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현실인식의 태도에 있어 유자(儒者)로서의 입신행도의 현실관을 견지하였고 남달리 불우하였던 생애를 군자의 도로 지켜가고자 하였다. 한편 이인로(李仁老)를 비롯한 죽림고회(竹林高會) 벗들과 시와 술로 서로 즐기며 현실을 탄식했으며, 그러면서 자신의 큰 포부를 문학을 통하여 피력하였다. 임춘의 시는 강한 산문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거의가 그의 생애의 즉물적 기술이라 할 만큼 작품 속에 자신의 현실적 관심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가전체소설인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은 신하가 취하여야 할 도리에 대한 입언(立言)이면서 당세의 비리를 비유적으로 비판한 의인체 작품이다. 임춘의 서(書)·계(啓)·서(序)·기 등은 안분지기(安分知機)·가일(可逸)의 경지를 그려내고 있다. <장검행(杖劒行)>을 비롯한 장편시들은 불우한 그의 인생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비분의 토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강렬한 현실지향성과 투철한 자아인식이 그의 문학의 특징이라 하겠다. 예천의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다. 문집인 <서하선생집>은 그가 죽은 뒤 지우(知友) 이인로에 의하여 엮어진 유고집으로 6권으로 편찬되었다. <동문선>·<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여러 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국문풀이
공방(孔方)의 자(宇)는 관지(貫之)이다. 그 조상은 일찍이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굴혈(窟穴) 속에서 살아, 아직 나와서 세상에 쓰인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 황제(皇帝) 때에 조금 채용(採用)되었으나, 성질이 굳세어 세상일에 그리 단련되지 못하였었다. 제가 상공을 불러 보이니, 공이 한참 동안 들여다보며 말했다. “산야의 성질이 비록 쓸 만하지 못하오나, 만일 폐하가 만물을 조화하는 풀무와 망치 사이에 놓아 때를 긁고 빛을 갈면 그 자질이 마땅히 점점 드러날 것입니다. 왕자(王者)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릇이 되게 하오니, 원컨대 폐하는 완고한 구리와 함께 내 버리지 마옵소서.”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 뒤에 난리를 피하여 강(江)가의 숯화로[炭鑛] 거리로 이사하여 거기서 눌러 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천(泉)은 주(周)나라의 재상으로 나라의 부세를 맡았었다. 방(方)의 위인이 밖은 둥글고 안은 모나며, 때에 따라 응변(應辯)을 잘하여, 한(漢)나라에 벼슬하여 홍려경(鴻臚卿)*이 되었다. 그 때에 오왕(吳王) 비가 교만하고 참월하여 권세를 부렸는데, 방은 여기에 붙어서 많은 이익을 보았다. 무제 때에는 온 천하의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나라 안의 창고가 텅 비어 있었다. 임금은 이를 보고 몹시 걱정했다. 방을 불러 벼슬을 시키고 부민후로 삼아, 그의 무리인 염철승(鹽鐵丞)* 근(僅)과 함께 조정에 있게 했다. 이때 근은 방을 보고 항상 형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방(方)의 성질이 욕심 많고 더러워 염치가 없었다. 그런 방이 이제 재물과 씀씀이를 도맡게 되니 본전 이자(利子)의 경중(輕重)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편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질그릇 쇠그릇을 만드는 생산(生産)의 기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방은 백성과 더불어 분리(分厘)의 이(利)라도 다투고, 물건값을 낮추어 곡식을 천하게 하고, 돈을 중(重)하게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근본을 버리고 끝을 좇게 하여 농사(農事)에 방해를 끼쳤다. 이에 간관(諫官)들이 많이 상소(上疏)하여 논했으나 위에서 듣지 않았다. 방(方)은 또 재치있게 권귀(權貴)한 자들을 잘 섬겨 그 문에 드나들며 권세를 부리고, 벼슬을 팔아 올리고 내침이 그 손바닥에 있으므로, 공경(公卿)들이 많이 절개를 굽혀 섬기니, 곡식을 쌓고 뇌물을 거두어 문권(文卷)과 증서(證書)가 산 같아 이루 셀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람을 접하고 인물을 대함에도 어질고 불초(不肖)함을 묻지 않고, 비록 시정(市井) 사람이라도 재물만 많이 가진 자면 다 함께 사귀고 통하니, 이른바 시정의 사귐이란 것이다. 때로는 혹 거리의 악소년(惡少年)들과 어울려 바둑두기와 투전하기로 일을 삼아서, 자못 연낙(然諾)을 좋아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孔方)의 말 한 마디면 무게가 황금 백 근만 하다.”라고 하였다 원제가 위에 오르자 공우가 글을 올려 아뢰었다. “방이 오랫동안 극무를 맡아 보면서, 농사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한갓 장사치의 이익만을 좇았습니다. 그가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니 공사가 다 곤궁하옵니다. 더구나 회뢰가 낭자하고 청알을 버젓이 자행하옵니다. 대저 ‘지고 또 타면 도둑이 된다.’고 한 것은 대역의 분명한 경계이니, 청컨대 그를 면직시켜 욕심 많고 더러운 자를 징계하옵소서.” 그 때에 정권을 잡은 자는 곡량(穀梁)*의 학문을 배워 진출한 이였다. 그가 군자를 모으는 책임자로 변방의 계책을 세우려 할 때 방의 일을 미워하여 공우의 말을 도왔다. 드디어 임금께서 그 말을 들어 방은 쫓겨나게 되었다. 방이 집안사람에게 하는 말이, “내가 얼마 전에 임금님을 뵙고 혼자 천하의 정치를 도맡아 보아, 장차 나라의 경제가 족하고 백성의 재물이 넉넉하게 되고자 하였더니, 이제 하찮은 죄로 내버림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쓰이거나 쫓겨나 버림을 받거나 나로서는 더하고 손해날 것이 없다. 다행히 나의 남은 목숨이 실오라기처럼 끊어지지 않고, 진실로 주머니 속에 감추어 말없이 내 몸을 용납하였다. 가서 뜬 마름과 같은 자취로 곧장 강회의 별장으로 돌아가 약야계(若冶溪)* 위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고기를 낚아 술을 사며, 해고(海賈)*와 더불어 술배에 둥실 떠 마시면서 한평생을 마치면 그만이다. 비록 천종의 녹과 오정의 밥인들 내 어찌 그것을 부러워하여 이와 바꾸랴. 그러나 나의 재주가 아무래도 오래면 다시 일어나리로다.” 라고 하였다. 진(晋) 나라 화교(和嬌)*란 사람이 있었다. 공방의 풍도를 듣고 기뻐하여 사귀어 거만(巨萬)의 재산을 모았고, 드디어 그를 사랑하여 한 가지 벽(癖)을 이루고 말았다. 이것을 본 노포(魯褒)*가 논(論)을 지어 화교를 비난하고 그릇된 풍속을 바로잡기에 애썼다. 화교의 무리 중에는 오직 완적(阮籍)*만은 방달(放達)하여 속물(俗物)을 즐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方)의 무리와 더불어 막대를 짚고 나가 놀아 목로술집에 이르러 문득 취하도록 마셨다. 왕이보(王夷甫)는 한 번도 입으로 방(方)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방을 가리켜 말하려면 그저 ‘그것’이라고 했다. 당(唐)나라가 일어나자 유안(劉晏)이 탁지판관(度支判官)*이 되었는데, 나라의 씀씀이 넉넉하지 못하므로 임금께 청하여 다시 방(方)을 이용해서 나라의 씀씀이를 여유있게 하려고 했다. 그가 임금에게 이른 말은 식화지(食貨志)*에 있다. 그러나 그때 방(方)은 죽은 지가 이미 오래였고, 그 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을 물색(物色)하야 나라에서 방 대신에 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방의 술책이 개원(開元), 천보(天寶: 당나라 현종 연호) 사이에 크게 쓰였고, 심지어는 국가에서 조서(詔書)를 내려 방(方)에게 조의대부소부승(朝義大夫少府丞)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기까지 하였다. 남송(南宋) 신종조(神宗朝) 때에는 왕안석(王安石)이 나라 일을 맡아 보면서 여혜경(呂蕙卿)을 불러와 함께 정사를 돕게 했다. 이들이 청묘법(靑苗法)*을 세우니 그 때에 천하가 비로소 떠들썩하여 아주 못살게 되었다. 소식(蘇拭)이 그 폐단을 극론(極論)하여 그들을 모조리 배척하려다가 도리어 모함에 빠져 쫓겨나 귀양가게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의 인사(人士)들이 감히 그들을 비난하지 못하였다. 사마광(司馬光)이 정승으로 들어가자 그 법을 폐하기를 아뢰고, 소식(蘇拭)을 천거하여 높은 자리에 썼다. 이로부터 방(方)의 무리가 차츰 세력이 꺾이어 다시 강성하지 못하였다. 방의 아들 윤은 경박하여 세상의 욕을 먹었고, 뒤에 수형령이 되었으나 장물죄가 드러나 사형되었다 한다. 사신이 말하기를,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큰 이를 좇는 자를 어찌 충이라 이를 것인가. 방이 법을 만나고 주인을 만나 정신을 모으고 마음을 도사려 정녕 한 약속을 손에 잡아 그다지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으니, 마땅히 이익을 일으키고 해를 덜어 그 은우를 갚을 것이거늘, 비를 도와 권세를 도맡아 부리고 이에 사사로운 당을 세웠으니, ‘충신은 경외의 사람의 사귐이 없다.’는 것에 어그러진 자이다.” 라고 하였다. 방이 죽자 그 무리가 다시 남송에 쓰여 권력을 잡은 자에게 아부하고 도리어 올바른 사람들을 모함하였으니, 비록 길고 짧은 이치는 저 명명한 데 있으나, 만일 원제가 진작 공우의 말을 들어 하루아침에 다 죽여버렸던들 후환을 없앴을 터인데, 오직 재억만을 더하여 후세에 폐단을 끼치게 하였으니, 무릇 일보다 말이 앞서는 자는 늘 미덥지 못함이 걱정이다.
어휘풀이
- 홍려경(鴻臚卿) : 한(漢)의 관직 이름. 외국의 빈객(賓客)을 접대하는 벼슬. - 염철승(鹽鐵丞) : 소금과 쇠를 가리키는 관직명. - 곡량(穀梁) : 자하의 제자인 곡량적을 이르는 말로 그는 유교경전인 ‘춘후’의 주석서 ‘곡량전’을 썼음. - 약야계(若冶溪) : 중국 남부의 지명으로 큰 부자인 도주공이 여기에서 돈을 모았다고 함. - 해고(海賈) : 바다 장사,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 - 화교(和嬌) : 진나라 서평 사람. 집안이 부유했으나 성품이 지극히 인색하여 지독한 구두쇠였다고 함. - 노포(魯褒) : 진나라 남양 사람. 배우기를 좋아하여 들은 것이 많았는데, 원당 후 기강이 무너지고 세상이 온통 비루한 것을 탐하자 이름을 숨기고 ‘전신론’을 지어 돈을 비난함. - 완적(阮籍) : 삼국 시대 위나라 사람.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노장학과 술을 즐겼고, 거문고를 타며 세상을 풍자함. - 탁지판관(度支判官) : 재산을 관리하는 벼슬. - 식화지(食貨志) : 역사 서술에서 사회 경제 관계를 기록한 부분. - 청묘법(靑苗法) : 왕안석의 신법 가운데 한 가지로서, 싹이 파랄 때에 관에서 돈 백문을 대여하고 추수한 뒤에 이자 이십 문을 붙여 상환하게 하던 법.
해설
임춘은 무신란을 만나 겨우 도망하여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극도로 빈한한 처지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따라서 돈을 소재로 취한 것은 그의 곤궁했던 삶과 관련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돈이 인간생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 때문에 생긴 인간의 타락상을 돈의 속성과 관련이 있는 역대의 고사를 동원하여 결구(結構)하였다. 작자가 작품의 말미에서 사신(史臣)의 말을 빌려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이익을 좇는 자를 어찌 충신이라 이를 것인가. 공방이 때를 만나고 주인을 만나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으니, 응당 이익을 일으키고 해가 됨을 덜어 그 은덕에 보답해야 할 것이거늘, 권세를 도맡아 부리고 사사로운 당(黨)을 만들었으니, 충신은 경외(境外)의 사귐이 없다는 것에 어그러진 자이다.”라고 한 평결(評結)은 극단적으로 금전을 부정하는 작가의 의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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